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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일상 활동을 잘 살펴보고 우리가 선포하는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임하도록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주간은 일종의 ‘종교적 막간(幕間)’이 될 수 없습니다. 삶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온 시간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삶이란 인간사(人間事)에 철저히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성주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심오하게 이해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언행(言行)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랑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특별한 조건을 내거십니다. 우리는 루카 성인이 우리를 위해 기록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6) 이것은 매우 어려운 말씀입니다. 사실, 영어의 ‘미워하다(hate)’라는 단어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매우 강하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 문구의 논조를 약화시키기 위해 ‘미워하다’를 “덜 사랑한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처럼 “덜 사랑한다”는 뜻을 표현하시려고 한 게 아니었습니다. ‘미워하다’처럼 강력한 말이 지닌 힘은 그 단어가 가진 부정적이고 냉정한 의미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 예수님은,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바로 그분이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어놓으신 그분인 까닭입니다.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에 관한 한, 우리가 결코 미온적이어선 안된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참뜻입니다. 이기적이거나 부분적인 사랑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더 사랑하라, 더 잘 사랑하라.”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우리 자신의 영혼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곧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바입니다. 만약 우리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래서 우리의 유일한 관심이 우리들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뿐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심지어 이 세상 전체를 미소하기 짝이 없는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하려 든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여길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뿐 아니라 행동과 진심으로 우리 자신을 실제로 봉헌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하고 그 어깨 위로 인류의 무게를 느끼도록 해주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가 일하고 생활하는 모든 환경에서 하느님이 뜻하시는 명확하고도 사랑 넘치는 계획을 실현하게끔 이끕니다. 우리가 방금 읽은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계속 얘기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7)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가르치고 요구하는 대로 우리의 모든 삶을 바로 세우도록 굳게 다짐합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투쟁과 괴로움과 아픔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신앙을 지켜나간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슬픔의 한가운데서도, 심지어 온갖 모략이 난무하는 한복판일지라도,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우리의 초자연적인 기쁨을 그들이 함께 나누도록 도와주는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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