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도인의 삶 (1960년 4월 15일 ‘성금요일’ 강론)

그리스도인들이 전통적으로 성주간이라고 부르는 이번 주간에 우리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집니다. 바로 예수님 삶의 마지막 시간들을 되돌아보고 다시 체험하는 기회입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신심을 나타내는 다양한 표현들입니다. 그런 표현들이 우리 마음에 불러오는 것들은 예외 없이 당연하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지향합니다. 그분의 부활이야말로 바오로 성인의 말씀대로 우리들 신앙의 밑바탕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여정을 너무 서둘러 걸어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매우 간단한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안에서 그분과 일치를 이루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부활을 더불어 나눌 수 없을 것입니다. 성주간의 말미에 주님의 영광 안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려면, 우리는 우선 번제물(燔祭物)이 되신 그분의 안으로 들어가 진실로 주님과 하나가 돼야 합니다. 그분이 갈바리아산에서 돌아가셨을 때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고결한 자기희생은 죄에 대한 도전입니다. 죄의 존재를 결코 부정할 수 없지만, 죄의 실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죄는 그야말로 죄악(罪惡)의 신비(mysterium iniquitatis)를 보여줍니다. 이는 피조물이 범하는 설명할 수 없는 죄악입니다. 피조물 자신의 교만함이 스스로를 하느님께 대항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인류만큼이나 오래됐습니다. 인류의 원조(元祖), 즉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함께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후 시대가 흐르면서 인류의 활동 여기저기서 끝없는 타락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들 각자가 개별적으로 하느님을 거스르기에 이르렀습니다. 죄라는 것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깨닫기란 정말로 어렵습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이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는 건 참으로 힘듭니다. 인간적인 맥락에서도 죄의 경중(輕重)은 피해자의 중요도에 따라, 그러니까 그 죄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자격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런데 하물며 인간이 죄를 지어서 하느님께 상처를 드렸다면 어떻겠습니까! 피조물이 창조주를 부인했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사랑”(1요한 4,8)이십니다. 인간의 죄악이 짊어진 악의 심연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극복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잘못을 보속하고, 무너져버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일치를 다시 세우려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이런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는 구약의 번제물로는 충분치 않았습니다. 하느님이신 인간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상상해본다면 이 불가해한 신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세 위격께서는 서로 방해하지 않으시면서 무한한 사랑의 친교 안에 함께하십니다. 삼위일체께서 내린 불변의 결정에 따라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드님께서 인간성을 취하시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우리가 겪어야 할 참혹한 슬픔의 짐을 견디셨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이후 그리스도의 모든 삶은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실현하고자 하는 불타는 열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분과 함께 3년 동안 살았던 사도들은 계속해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라는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당신의 희생제사가 완결되신 첫 성금요일 오후까지도 그 가르침은 계속되었습니다.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요한 19,30)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잘못을 홀로 지시고 그 무게에 짓눌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순전히 우리의 죄가 저지른 폭력과 사악함 때문에 쓰러지신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상처 입으신 주님을 묵상합시다. 어떤 문구도 당시의 실제상황을 완전히 표현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진실에 가까운 표현을 사용하자면 오래전 어느 작가가 쓴 글귀를 인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육신은 고통의 자화상이다.” 생명을 잃은 그분의 육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져 어머니 성모님께 전달됐습니다. 그때 멍들고 으스러진 그리스도를 보고, 그렇게 파괴된 예수님을 보고, 우리는 아마도 그분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한때 그를 따르던 군중은 어디에 있으며, 그가 예언했던 왕국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바로 승리였습니다. 결코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부활에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당신의 순명으로 이루신 승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삶으로 부르십니다 

우리는 갈바리아산의 그 드라마를 다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감히 설명하건대, 예수님께서 죽으신 갈바리아산의 그 드라마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거행된 최초의 미사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죽음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예수님은 당신에게 사형선고로 내려진 십자가를 껴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희생은 당신 아버지에 의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희생의 결과로 성령께서 인류에게 강림하신 것입니다.

수난의 비극은 우리의 삶과 전체 인류의 역사에 성취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성주간이 단순한 기념시기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성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우리 영혼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하는 그 무엇인가로 여기고 묵상하는 시기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제2의 그리스도이자, 그리스도 자신(alter Christus, ipse Christus)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 모두는 우리 삶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1베드 2,5) 사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순명을 드러낼 수 있으며, 따라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사명을 우리가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곧바로 우리 자신의 비참함과 개인적인 타락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 때문에 낙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비관주의자가 되어선 안 되며, 우리의 이상을 버려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처한 현재의 상황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당신의 삶을 더불어 나눔으로써 우리 삶이 거룩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곧잘 ‘거룩함’이란 헛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거룩함이란 결코 성취할 수 없는 것이고, 왠지 수덕신학(修德神學)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거룩함은 실질적인 목표도, 살아있는 실재(實在)도 아닙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서로를 설명할 때 “성도(聖徒)”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모든 성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로마 16,15)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사는 모든 성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필리 4,21)

지금 갈바리아산을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지만 그분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나타내는 표식은 아직 없습니다. 성금요일은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살기를 원하는지, 진정 거룩하게 되길 원하는지 성찰하기에 좋은 시기입니다. 그리고 신앙을 행동에 옮김으로써 우리의 연약함에 맞설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으며 우리가 매일 하는 일에 사랑을 쏟겠다고 결심할 수 있습니다. 죄의 체험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성장해야 합니다. 또한 더욱 충실해지고 진정으로 우리 주님과 하나가 되겠다고 더 깊이 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주님의 사도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주신 사제로서의 사명을 꾸준히 수행해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주신 사제의 사명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도록 격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일상 활동을 잘 살펴보고 우리가 선포하는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임하도록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주간은 일종의 ‘종교적 막간(幕間)’이 될 수 없습니다. 삶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온 시간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삶이란 인간사(人間事)에 철저히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성주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심오하게 이해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언행(言行)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랑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특별한 조건을 내거십니다. 우리는 루카 성인이 우리를 위해 기록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6) 이것은 매우 어려운 말씀입니다. 사실, 영어의 ‘미워하다(hate)’라는 단어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매우 강하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 문구의 논조를 약화시키기 위해 ‘미워하다’를 “덜 사랑한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처럼 “덜 사랑한다”는 뜻을 표현하시려고 한 게 아니었습니다. ‘미워하다’처럼 강력한 말이 지닌 힘은 그 단어가 가진 부정적이고 냉정한 의미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 예수님은,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바로 그분이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어놓으신 그분인 까닭입니다.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에 관한 한, 우리가 결코 미온적이어선 안된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참뜻입니다. 이기적이거나 부분적인 사랑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더 사랑하라, 더 잘 사랑하라.”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우리 자신의 영혼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곧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바입니다. 만약 우리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래서 우리의 유일한 관심이 우리들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뿐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심지어 이 세상 전체를 미소하기 짝이 없는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하려 든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여길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뿐 아니라 행동과 진심으로 우리 자신을 실제로 봉헌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하고 그 어깨 위로 인류의 무게를 느끼도록 해주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가 일하고 생활하는 모든 환경에서 하느님이 뜻하시는 명확하고도 사랑 넘치는 계획을 실현하게끔 이끕니다. 우리가 방금 읽은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계속 얘기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7)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가르치고 요구하는 대로 우리의 모든 삶을 바로 세우도록 굳게 다짐합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투쟁과 괴로움과 아픔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신앙을 지켜나간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슬픔의 한가운데서도, 심지어 온갖 모략이 난무하는 한복판일지라도,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우리의 초자연적인 기쁨을 그들이 함께 나누도록 도와주는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과 인간의 역사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만족을 위한 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사명 받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도록 초대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되새겨보았습니다. 베드로 성인은 하느님이 주신 이 계명에 응답하면서 구약 성경의 구절을 통해 그 의미를 솔직담백하게 설명했습니다. “선택된 겨레이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1베드 2,9)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 삶에 깊이 뿌리내린 거룩한 현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명확한 전망을 갖게 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동하겠다는 의지가 강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순례가 지속적인 봉사로 드러나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봉사는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수많은 방법으로 이루어지지만, 언제나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그 동기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개인의 명성과 야망 같은 사소한 대상들을 잊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며, 심지어 박애주의나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한 연민 같은 더 고귀한 목표들조차 잊어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보여주신 사랑의 충만함을 향해 나아가겠다고 우리의 마음 깊이 갈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비에 함께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태도의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오로지 경건한 실천의 집합체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경건한 실천과 일상의 삶이 처한 환경들 간의 관계를 깨닫지 못한 데 따른 결과입니다. 일상의 삶이 처한 환경에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응하고 불의(不義)를 바로잡아야 하는 시급함이 포함됩니다.

제 생각에는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 강생(降生)의 의미를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인간의 육신과 영혼과 목소리를 취하셨습니다. 우리와 운명을 나누셨고, 심지어 끔찍한 죽음의 고통을 체험하시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인간 세상에서 낯선 사람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려 하지는 않았겠지만요.

또, 어떤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그리스도교 교리의 몇몇 핵심 부분들을 무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기도 생활이 마치 인간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거나 세상을 버리는 일이나 되는 것처럼 굴어댑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사랑과 봉사의 최고 수준을 보여주신 분이 다름 아닌 예수님이란 사실을 잊은 것입니다. 죽음에까지 이르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고난과 무관심에 우리 스스로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을 밝게 비추는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현존하시는 그분께 대한 신앙입니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상황을 변화시키는 역할, 인간 역사의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세상의 창조로부터 시작해 마지막날에 완성에 이르게 될 인간의 역사에서 그리스도인은 결코 내쳐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도시에 모여 사는 시민이며, 그의 영혼은 하느님을 갈망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아 왔고, 그 사랑이야말로 땅에 사는 모든 인간이 도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목표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 자신의 개인적 경험이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저는 사제로서, 그리고 영혼의 목자로서 제가 하는 일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돕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여겨왔습니다. 사람들을 도와 각자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요구들을 받아들이고 특별히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스스로 발견하도록 돕는 일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인 양심의 특징이라 할 인간의 거룩한 독립성과 축복받은 개인적 책임을 어떤 식으로든 제한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행동방식과 영성은 밝혀진 진실의 초월성을 존중하고 인간 개인의 자유를 사랑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한 말씀 더 드리자면, 그리스도인의 행동방식과 영성은 또 하나의 깨달음을 근간으로 합니다. 이는 곧 역사가 결코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선택에 따라 열려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존중하신다는 깨달음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성전으로 피신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발전에 어깨를 으쓱하거나, 인간 또는 국가의 성취와 일탈을 무시하면서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하느님의 창조물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진 각 개인의 존엄함을 깨달음으로써 세상이 지니는 고귀함과 아름다움의 가치를 인정하게 합니다. 신앙은 또한, ‘자유’라고 하는 훌륭한 선물을 존중하게 합니다. 자유는 우리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고, 천국의 은총을 통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스스로 세워갈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신앙을 인간의 이데올로기로 격하시킨다면, 여러분은 신앙을 하찮은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본래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여러분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해서 정치적-종교적 기준을 세운다면, 그 또한 신앙을 얕잡아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이해 

제가 방금 말씀드린 여담의 목적은 오직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 한 가지를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느님 안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되새겨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가능한 한 가장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인간이 창조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더 심오한 목적을 위해 이 땅에 왔습니다. 바로 하느님 당신과 통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편한 삶이나 세속적인 성취를 우리에게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네 여정의 마지막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하느님 아버지의 집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성금요일의 전례에는 ‘믿음의 십자가(Crux fidelis)’라는 제목의 놀라운 성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가 ‘믿음의 십자가’는 십자가의 승리자이신 우리 주님의 영광스러운 분투를 노래하고 찬미하게 합니다. 온 우주를 구원하신 구세주께서는 희생 제물이 되셨고, 승리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의 주님이신 하느님께서는 무력(武力)이나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의 세속적 권능을 통해 당신의 현존을 느끼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무한하신 당신 사랑의 고귀함으로 주님의 현존을 감지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멸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분은 바로 당신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가 억지로 당신께 순명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결정이 우리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우리의 행동을 통해, 갈바리아산에서 펼쳐진 사랑의 드라마를 떠올릴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온갖 약점과 실수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맛을 내는 소금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행복한 소식을 전하는 빛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빛이 전하는 행복한 소식이란, 당신이 인간을 엄청나게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진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이요 빛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무언가에 승리했거나 무엇을 정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제 맛을 내지 못한다면 결코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스스로의 말과 본보기를 통해 예수님을 증거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자기 삶의 목표를 잊어버린다면, 그는 결코 빛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죽음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바람직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죽으심의 외적인 모습과 그에 대한 진부한 표현들을 뛰어넘어 그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주간의 이 며칠 동안 우리가 다시 체험하는 그 장면들 속으로 우리 자신을 진심으로 들여보내야 합니다. 우리가 들어가 체험해야 할 그 장면에는 예수님의 슬픔과 성모님의 눈물, 그리고 사도들의 도망과 거룩한 여인들의 용기가 있습니다. 또한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했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니코데모의 대담함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그분께 가까이 다가갑시다. 그리고 골고타 언덕 꼭대기에서 어렴풋이 드러나는 그분의 십자가에 다가섭시다. 우리는 그분께 진심으로 가까이 가야 합니다. 또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징표인 내적 기도로 그분께 다가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 수난의 거룩하고도 인간적인 사건들이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처럼 우리의 영혼을 관통할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비밀을 드러내시고, 하느님께서 우리 삶에서 기대하시는 바를 보여주시기 위해 건네시는 그분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몇 년 전에 저는 어느 그림을 보았는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 옆에 세 명의 천사들이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한 명은 절망에 겨워 울고 있었고, 또 한 명은 마치 예수님의 죽음이 사실임을 스스로에게 애써 납득시키려는 듯이 한 손에 못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천사는 온 힘을 다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그림 속에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울고,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와 모든 인류의 죄 때문에 슬퍼해야 합니다. 그 죄로 인해 예수님께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이 장엄한 진리 깊숙이 우리의 신앙이 스며들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신앙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하느님 사랑에 대한 놀라움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우리들 자신의 삶과 희생의 본보기이자 동기가 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승리자의 이름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승리하실 것이며, 그로 인해 죽음은 삶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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