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지극한 겸손으로 승리하신 그리스도 (1963년 12월 24일 강론)

“이날 빛이 우리를 비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선언(宣言)입니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에 감동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온 인류에게 선포됐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여기’에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계신다는 이 진리가 우리의 모든 삶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탄은 우리에게 새롭고도 특별한 하느님과의 만남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빛과 은총을 우리네 영혼 깊숙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성모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그 아기’ 앞에 멈춰 섭니다. ‘그 아기’는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는 1951년 8월 15일에 아주 특별한 이유로 이탈리아 로레토에 있는 ‘성가정 성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조용하고 경건하게 미사를 집전하고 싶었죠. 하지만 저는 그곳의 수많은 신자들의 열정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성모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이 깊었던 그곳의 신자들이 ‘성모 승천 대축일’에 엄청난 인파로 모일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교회법적으로는 그곳 신자들의 신심을 표현하는 방법이 적절하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전례법규에 따라 제대에 입을 맞추려 했을 때 그곳 여성 신자들 서너 명도 저와 똑같이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주의가 산만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확실히 감동적이기도 했습니다. 전승(傳承)에 따르면, 로레토의 ‘성가정’은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의 집이었다고 합니다. 그 가정집의 제대 위에는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요한 1,14) 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눈여겨보았습니다.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의 한 작은 모퉁이에, 사람이 지은 집에서 하느님께서 살고 계셨던 것입니다.

완벽한 하느님이며 완벽한 인간이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완벽한 하느님이신 동시에 완벽한 인간이십니다. (perfectus Deus, perfectus homo). 이 신비 안에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무엇’이 있습니다. 저 역시 그 신비 안에서 감동받았고, 또한 지금도 감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로레토의 대성당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곳에 가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마음 깊이 다시 체험하고,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는 문구를 또 한 번 묵상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십니다. (Iesus Christus, Deus homo). 이것은 “하느님의 위업”(사도 2,11) 중 하나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을 되새기고, 또한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를”(루카 2,14)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뜻에 자신들의 뜻을 일치시키길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상관없이 모든 이들에게, 모든 형제들에게 참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모두 한 형제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의 형제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바로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민족만 존재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민족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언어로 다 같이 이야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아버지와 말씀하셨던 그 언어 말입니다. 그것은 가슴과 마음으로 나누는 언어이고, 지금 우리가 기도 안에서 말하고 있는 언어입니다. 이는 영성 깊은 사람들이 쓰는 관상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영성적인(영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진실을 깨달았기에 관상의 언어를 쓸 수 있습니다. 이 언어는 우리의 의지를 표현하는 수많은 행동들을 통해, 우리 마음의 명징한 통찰을 통해, 그리고 우리 마음의 이끌림과 덕행의 삶에 이르는 우리의 헌신, 선함과 행복, 평화를 통해 표현됩니다.

여러분은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사랑이십니다. 이 모든 것이 신비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며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는 신앙으로 이 신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이 신비를 아주 깊이 탐구하기 위해 우리의 믿음을 활용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 영혼 특유의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의 빈곤하고 부족한 생각과 인간적인 설명으로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축소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이 신비가 어둠을 거슬러 인류의 삶을 인도하는 빛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우리 함께 최선을 다합시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들 인간의 실체(實體)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토록 경이로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일을 이해하기 위해 에너지를 낭비하지는 맙시다. 이해하려는 대신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신 일들을 겸허하게 받아들입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않은 일들을 캐내려고 애쓰지 맙시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과 같은 경건한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는 이 신비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이 사람으로 오신 이 신비가 우리에게 주시는 찬란한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어떤 인간적 추론보다도 훨씬 설득력 있는 가르침 말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 오셨는가? 

저는 성탄절 구유 옆에서 강론을 할 때마다 포대기에 쌓인 채 구유 속 지푸라기 위에 누워 있는 아기를 우리 주님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아무 말도 못하는 아기지만, 저는 이 아기를 나의 주인님이라고 여깁니다. 또한 이 아기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저는 이 아기를 스승님으로 바라봅니다. 이 아기로부터 배우기 위해서 여러분도 그의 삶을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상에서 지내신 그분 삶의 거룩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복음서를 읽고 신약성경의 장면(행적)들을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재현(再現)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지금 우리가 구유 앞에서 기도하듯이 그렇게 기도함으로써 그분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을 공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분이 갓 태어난 아기였을 때, 이 축복 받은 인간의 땅에서 처음 눈을 뜨셨던 그 순간부터 시작됐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과 똑같이 성장하고 생활하셨다는 사실은, 인간의 존재와 인류의 모든 일상 활동이 하나같이 거룩한 의미를 갖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굳이 이 모든 것에 대해 깊이 성찰하지 않더라도, 예수님 삶의 숨겨진 30년 세월을 생각하면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 30년 동안 그분께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과 더불어 생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사셨지만, 그 시기야말로 우리에게는 빛으로 가득한 시간인 것입니다. 그 30년의 세월은 우리네 인생을 비춰주고 삶을 의미로 가득 채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함께 생활하셨던 그때의 사람들처럼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똑같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30년 동안 ‘목수의 아들’로 사셨던 방식인 것입니다. 이후에 3년간의 공생활이 이어졌고, 예수님은 그 기간을 군중 속에서 보냈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저분이 누구냐?”,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마태 13,56) 하고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었고, 평범한 사람들과 생활했던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 (마르 6,3) 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분이 하느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인류를 구원하셨고 모든 것을 당신께 이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일어난 다른 여러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그분의 숨겨진 시간들을 묵상할 때도 우리는 언제나 감동하게 됩니다. 이 30년의 시간은 우리의 이기심과 나태함을 털어내라는 부르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한계와,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마음과, 우리의 욕망을 알고 계십니다.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스스로를 내어주는 것이 인간에겐 참으로 어려운 일이란 사실을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또한 사랑을 찾을 수 없을 때의 심정이 어떤지, 입으로는 주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반쯤 무관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 그 기분이 어떤지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복음사가들이 묘사한 인상적인 장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세속적인 욕망에 가득 차고 오직 인간적인 계획에만 몰두하는 사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도들을 가까이에 두시고 당신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을 그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이 우리를 부르시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물으 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묻습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마태 20,22) 여기서 ‘잔’이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여러분 자신을 바칠 수 있느냐’는 의미입니다. 그때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습니다.(Possumus!). 우리는 준비돼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그럴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모든 일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의 온 마음을 주님께 드렸던가요? 아니면 하느님이 아닌 우리들 자신에 얽매이고, 우리의 이익과 편안함, 그리고 자기애에만 집착하고 있나요? 우리 생활 속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지하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요? 우리의 길을 그리스도인답게 바꾸는 것을 꺼리게 만드는 무엇이 있는 겁니까? 다행히 이 모든 것을 올곧게 바로잡을 기회가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이 질문들을 우리에게 개별적으로 주셨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질문을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인 것입니다. 저는 감히 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큰 소리로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각자 마음속으로 조용히 우리 주님께 고백하십시오. “주님, 제가 얼마나 쓸모없는 인간인지요, 얼마나 겁쟁이인지요! 얼마나 많은 실수를 거듭해왔는지요.” 그러고 나서야 조금 더 나아가 주님께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뭐 괜찮습니다. 주님, 당신의 손길로 저를 지켜주고 계시니까요. 만약 저를 그냥 내버려두신다면 저는 정말로 최악의 수치스러운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저를 내버려두지 마세요. 어린아이처럼 저를 보살펴 주십시오. 저는 강하고 용감해지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저를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저는 보잘것없는 피조물입니다. 주님, 제 손을 잡아 이끌어 주십시오. 당신의 성모님께서 항상 제 곁에서 지켜주시도록 해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시면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possumus!)! 당신을 우리의 본보기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결코 주제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거룩한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우리가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인간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그 거룩한 길을 인간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길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그렇게 낮추신 이유입니다. “그분이 당신 자신을 그리도 낮추셔서 종의 모습을 취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 주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존재셨지만, 자신의 위엄과 권능을 스스로 낮추셨습니다. 그러나 선함과 자비는 그대로이셨습니다.”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그 거룩한 길을 우리가 쉽게 갈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초대를 거부하지 맙시다. 그분께 “아니요.”라고 말하지 맙시다. 그분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하지 맙시다. 핑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지 못할 거라고 더 이상 생각하지 맙시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범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온 마음을 다해 여러 형제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귀중한 본보기를 무시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예수님을 따르고 성령 안에서 여러분의 영혼을 새롭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셨다 

예수님을 알고, 그분의 삶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러분은 아시겠습니까? 저는 성경에서 예수님에 관한 정의(定義)나 그분의 전기(傳記)를 종종 찾아보곤 합니다. 그리고 저는 성령에 의해 기록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셨습니다.” (사도 10,38) 태어나셔서 돌아가실 때까지 지상에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하루하루는 바로 그 한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 삶의 모든 날들을 선행의 실천으로 가득 채우셨던 것입니다. 성경의 또 다른 말씀은 이렇습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마르 7,37) 예수님은 모든 일을 훌륭하게 해내셨으며, 좋지 않은 일과 선하지 않은 일은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한 일 가운데 바로잡아야 할 것들이 있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제 경우에는 올바로 고쳐야 할 일들이 정말로 많습니다. 저 혼자의 힘으로는 선하고 좋은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요한 15,5)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께 나아가 그분의 도움을 부탁합시다. 성모님의 전구를 통해 간청합시다. 사랑하는 하느님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신심 깊은 사람들처럼 우리도 그분께 간구합시다. 이제 저는 더 이상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간절한 바람에 관해 주님과 개인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여러분 각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마음속으로 기도하십시오. 시끄럽게 소리 내어 말하지 마십시오. 지금 기도하십시오. 물론 제가 여러분에게 드린 이 조언들은 제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 많은 선행을 하시기 위해, 어디에서든 오직 좋은 일만을 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하셨을까요? 복음 속 예수님의 또 다른 전기(傳記)를 통해 우리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루카 2,51) 우리는 특히 이 ‘순종’이라는 말에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거역하고 반항하며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분열하는 오늘의 상황에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제가 ‘순종’이라는 그리스도교의 미덕을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제 마음속 깊이 ‘자유’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아버지의 뜻을 우리가 이룰 수 있기를 원해야만 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대로 모든 일을 해내야 하되 우리가 스스로 그냥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에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단순히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만 하는 가장 초자연적인 이유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35년 이상 오푸스데이의 영성을 실천하고 또한 가르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오푸스데이의 영성은 제가 개인의 자유를 이해하고 사랑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 주님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을 주실 때, 특별한 소명으로 우리를 부르실 때, 그것은 마치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가득한 손을 우리에게 내미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아들, 딸로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따로 찾으십니다. 우리의 연약함도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건네신 주님의 손이 사랑으로 넘치는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건넨 도움의 손길을 우리가 잡으려고 애쓰기를 기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노력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우리가 자유롭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라고 당부하십니다. 이 일을 우리가 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겸손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어린아이들 이란 진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경이로운 부성애에 순종으로 응답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축복받은 순종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들어오시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 있게 그분께 고백하며, 그분이 우리 삶에 들어오시는 길에 놓인 모든 장애물과 복잡한 문제들을 치워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간섭받지 않으려 하고 이기심에 얽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왕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 왕의 자리가 인간들의 비참한 왕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께 다가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가가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만들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과 온 인류를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오로 성인이 하신 말씀의 진리를 깨닫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6,22-23).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의합시다. 우리는 늘 이기적인 성향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유혹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순종함으로써 신앙을 드러내 보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뜻을 떠들썩하게 표현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때로는 우리 양심 깊은 곳에 당신의 뜻을 속삭이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주의 깊게 귀 기울이고 그분께 충실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종종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들의 결함을 먼저 봅니다. 또는 그들이 문제를 잘 알지 못하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르려는 유혹에 빠지는 거죠. 그러나 이런 행동들 역시 거룩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맹목적인 순종을 강요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지성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가진 지성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에 대해 모든 경우를 검토하며 진지하게 생각해봅시다.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과연 진리에 대한 사랑입니까? 아니면, 우리들 자신의 판단에 얽매이는 이기심과 집착입니까? 우리의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우리를 떼어놓는 것이라면, 우리의 공동체와 형제들과의 일치를 약화시킨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확실한 징표인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순종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본보기를 다시 한번 살펴봅시다. 그분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셨습니다.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들에 순종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정하건대 두 분은 매우 완벽한 피조물입니다. 우리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을 제외하면 누구보다도 위대하십니다. 그리고 요셉 성인은 가장 순결하신 분입니다. 하지만 그분들도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그분들에게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우리에게 주신 그분의 뜻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네 평범한 삶의 의무들을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인생의 여러 상황에서 우리가 져야 하는 의무들, 직업의 의무, 노동과 가정, 사회생활의 의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보살피는 의무, 친교의 의무, 그리고 옳고 정의로운 일을 하고자 하는 열망의 의무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탄이 가까워올 때마다 저는 아기 예수님의 상징물들을 즐겨 봅니다. 스스로 낮아지신 하느님을 나타내는 조각상과 그림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줍니다. 전지전능하신 그분께서는 우리가 알기 원하십니다. 당신이 완전히 무방비 상태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부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희생의 삶, 일을 하고 기쁨을 누리는 삶을 온전히 살아내도록 재촉하십니다.

우리가 실제로 예수님을 본받으려 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처럼 우리도 겸손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하느님의 위대하심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아십니까? 바로 구유 안입니다. 포대기 안입니다. 마구간 안입니다. 우리들이 구원사업의 협력자가 되도록 하는 힘은 오직 겸손을 통해서만 발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은 그만하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실감해야 합니다.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일지라도 개인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때때로 생기는데, 실제로 심각한 걱정을 낳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라는 것들은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스스로 오만해지고, 모든 이들의 중심에서 관심받고 싶어하며 자신을 좋아해주기를 바라는 욕망이 솟아나는데, 그런 사람들에게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항상 좋은 모습으로 보이길 원하고, 개인적으로 번듯하게 잘 되기를 바랍니다. 남몰래 실천하는 선행에 만족하지 못하다 보니, 영혼의 놀라운 평화와 엄청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만과 억측에 빠져 불행해지고 허망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겸손하셨습니다. 당신의 삶을 통틀어 그분은 어떤 배려나 특권을 좇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이신 그분은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성모님의 태중에서 9개월을 보내시는 것으로 지상의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의 자연스러운 탄생과정을 따르신 것입니다. 그분은 인류가 당신을 간절하게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고, 모든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오시기를 갈망하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기다리셨습니다. 다른 모든 아기들이 태어나는 것과 같은 과정을 거쳐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잉태에서 탄생에 이르기까지 성모님과 요셉 성인 그리고 엘리사벳 성인을 제외하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 경이로운 진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사시기 위해 오셨다는 놀라운 진실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참으로 소박하셨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위풍당당하게 세상에 오시지 않았고 아무도 그분에 대해 몰랐습니다. 지상에서는 오직 성모 마리아와 요셉만이 이 거룩한 사건에 함께했을 뿐입니다. 나중에 천사의 메시지를 들은 목동들이 왔고, 동방박사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하늘과 땅을, 하느님과 인간을 하나로 이어준 이 초자연적 사건의 유일한 증인들이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에 무감해질 만큼 우리의 가슴이 무딜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낮추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당신이 베푼 사랑에 우리가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권능뿐만 아니라 그분의 놀라운 겸손 앞에서 우리의 자유가 머리 숙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느님이신 이 아기의 위대함이란…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분의 아버지는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느님이신데, 정작 하느님의 아들은 “여관에 들어갈 자리에 없어서…” (루카 2,7) 구유에 누워계십니다. 모든 피조물의 주님께서 계실 곳이 어디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셨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들 마음속에서 당신의 쉴 곳을 찾고 계십니다. 저는 결코 진실을 왜곡하지 않고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그분께 각자의 무지함과 배은망덕함에 대한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가는 우리 영혼의 문을 스스로 닫아 버리지 않도록 은총을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은 권리를 요구하지 않고 섬기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어떻게 순종하셨을까요?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립 2,8) 여러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곤혹스러워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삶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조용한 삶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다르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뜻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 여러분 스스로가 바뀌어야만 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여러분의 뜻에 맞춰서 하느님의 뜻을 왜곡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요청하신 일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칩니다. 주님처럼 “죽음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저는 매우 기쁩니다. 그들은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또한 모두의 선익(善益)을 위해서 자신의 열망과 직업적 노동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순명(順命)을 배웁시다. 섬김을 배웁시다. 스스로를 거리낌 없이 내어주며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원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리더십입니다. 우리 내부에 자만심이 커져서 우리가 뭐든 할 수 있는 슈퍼맨이란 생각을 하게 될 때, 그 순간이 바로 “아니요”라고 말할 때인 것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승리는 겸손의 승리일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스스로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일치시킬 수 있습니다. 마지못해 안절부절못하며, 시큰둥하게 하는 게 아니라, 아주 기쁘게 말입니다. 우리 자신을 잊을 때 찾아오는 기쁨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여러 번 강조했던 예수님의 솔직하심과 소박하심에 관해 다시 한번 얘기하겠습니다. 그분의 숨겨진 시간들이라고 해서 결코 중요하지 않은 기간이 아니었으며, 단순히 다가올 공생활을 준비하는 기간도 아니었습니다. ‘오푸스데이’를 시작한 1928년 이후 저는, 하느님께서 주님의 삶 전체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본보기가 되기를 바라셨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하게 됐습니다. 특히 그분이 평범한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신 그 숨겨진 세월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됐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조용하고 평범한 생활 속에서 자신들의 성소를 인정하길 원하십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려면 당연히 우리의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자신을 일상의 삶으로부터 분리시킬 이유는 없습니다. 일상의 삶을 사는 평범한 우리들은 누구나 나름의 계층과 일,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수많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평범한 시민으로서의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꿈을, 그들의 동료와 친구들과 더불어 열망과 노력을 나누는 꿈을 꿉니다. 그리고 그 꿈은 이뤄졌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이 거룩한 진실에 관해 소리쳐 얘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잊었다거나, 여러분을 부르신 적이 없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활동과 관심 속에서 살아가도록 여러분을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직업과 직종, 재능이 하느님의 거룩한 계획으로부터 결코 벗어나 있지 않은 것임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들을 성화하셔서 당신 아버지께 드리는 가장 기쁜 봉헌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삶은 무의미하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이렇게 되새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을 다른 사람들과 떨어뜨려 구분하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 는 것입니다. (요한 13, 34-35) 이는 항상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라는 의미이며 모두가 평등하다는 뜻입니다. 또한 세상 안에서 주님을 섬기기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잘 알도록 만들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길이 땅 위에 이미 열려 있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말로만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고, 실제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 이를 입증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법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도입부를 기억하십니까? 루카 성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처음부터 다 다루었습니다.” (사도 1,1)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말이 아닌, 스스로 행동하심으로써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를 가르치면서 당신 자신이 본보기가 되었고, 우리의 스승이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기 예수님 앞에서 각자의 양심을 계속 성찰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도록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나요?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될 준비가 되어 있나요? 그렇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께, 그리고 제 자신에게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또 한 명의 그리스도가 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렇게 소명 받은 여러분은 과연 스스로에게 하느님의 아드님이 하셨던 대로 할 일을 해왔고, 또한 그렇게 가르쳐 왔다고 말할 수 있나요? 여러분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마음을 쏟고 있나요? 그래서 그분 뜻대로 선하고 고귀하고 거룩한 인간 구원의 가치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나누도록 독려할 수 있나요?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나요? 세상의 한가운데서 일상생활을 하며 그리스도의 삶을 살고 있나요?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번듯한 말로만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을 위해 우리 자신을 바치라는 초대입니다. 우리 자신을 죽여야 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순명하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드높이 올리신” (필립 2,9)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한다면, 십자가는 곧 우리의 부활과 ‘드높이 올려짐’을 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그리스도의 삶이 한 걸음 한 걸음씩 채워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의 착한 자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저마다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결점이 얼마나 많은지와는 상관없이, 좋은 일을 하려고 두루 돌아다니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애썼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산다면, 누구에게나 당연히 닥쳐올 죽음의 순간에 우리는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범하게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기쁘게 죽음을 맞는 것을 저는 보아왔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가 선한 일을 한다면, 우리들 각자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며 십자가를 짊어진다면, “정녕 되살아나신” (루카 24,34) 주님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어린아이로 오신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이 점을 생각해봅시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스스로 죽으심으로써, 겸손하고 소박하게 순명하심으로써 이기신 것입니다.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인간의 평범한 삶을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죽음에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위치로, 하느님 자녀의 위치로 끌어올리셨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인 우리가 있는 곳까지 내려오셔서 우리를 주님의 위치로 끌어올리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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