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혼인: 하느님의 진정한 부르심 (1970년 성탄 시기에 드리는 강론)

성탄절에 우리는 성자(聖子)의 탄생을 둘러싼 여러 사건과 상황들을 생각합니다. 베들레헴의 마구간이나 나자렛의 성가정을 묵상하면, 성모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어린 예수님이 우리 마음 깊이 특별히 자리하게 됩니다. 이 소박하고도 경이로운 성가정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나요?

이 물음과 관련해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그 중 하나에 관해 특별히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탄생은 “때가 차자” 시작된 일을 의미합니다. (갈라 4,4). 이는 곧 하느님께서 인류를 향한 사랑을 펼쳐보이기 위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에게 보내시기로 선택하신 순간을 뜻합니다. 그런 하느님의 뜻은 가장 소박하면서도 평범한 환경에서 이뤄졌습니다. 생명을 출산하는 여인과 가족, 가정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환경 말입니다. 이런 평범한 것들로 이뤄진 인간적 현실(現實)을 통해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이를 깨달은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평범한 인간적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선한 것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무리 사소하고 평범하게 보이는 것일지라도, 그리스도와 만날 수 없는 인간적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적 상황이 하느님 나라로 향해가는 우리들 여정의 한 걸음인 것입니다.

참으로 소박한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묵상할 때마다 교회가 기쁨에 넘치는 것은 실로 당연합니다. 성가정 축일의 아침기도 찬송을 우리 함께 읽어봅시다. “우리는 기뻐하며 나자렛의 가난한 집과 그 빈약한 형편을 떠올립니다. 예수님의 숨겨진 삶을 노래로 다시 이야기하니 또한 기쁩니다. 예수님은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자라나셨고, 요셉이 하는 소박한 일을 배우셨습니다. 자애로운 어머니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곁에 앉으십니다. 또한 좋은 아내로 남편 곁에 계십니다. 피곤한 아들과 남편을 당신 사랑으로 위로해주시며 성모님은 만족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떠올릴 때면, 저는 빛과 기쁨으로 가득한 집을 즐겨 상상합니다. 주님의 성가정에 가득했던 바로 그 빛과 기쁨이 넘치는 집 말입니다. 성탄 메시지는 진정 힘차게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14). 또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콜로 3,15)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진실을 알게 될 때 평화가 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에게 평화가 찾아옵니다. 동정 성모님의 보호하심과 요셉 성인의 도우심으로 얻게 되는 평화인 것입니다. 평화는 우리네 삶을 밝게 비춰주는 위대한 빛입니다. 거듭되는 고난 속에서도, 우리들 각자의 실패 속에서도 평화의 빛은 우리가 계속 노력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줍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평화와 화목의 공간이어야만 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소소한 실패들과 마주치더라도, 우리의 가정은 심오하고도 진실한 사랑의 기운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온 가정에 평온(平溫)이 깊이 뿌리내려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참된 신앙을 실천할 때만 얻을 수 있는 결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단순한 사회적 제도가 아니며 인간의 약함을 달래기 위한 치료법은 더더욱 아닙니다. 결혼은 정말로 초자연적인 부르심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교회 안에서 이뤄지는 위대한 성사입니다. (에페 5,31-32) 동시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맺어지는 영원한 계약입니다. 우리가 좋아하건 아니건 간에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혼인성사는 결코 스스로 풀 수 없는 것입니다. 결혼은 그리스도와 함께함으로써 거룩하게 된 영원한 계약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남편과 아내의 영혼을 채워주시고, 부부가 함께 당신을 따르도록 초대하십니다. 그분은 부부의 결혼생활 전체를 지상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기회로 변화시킵니다.

남편과 아내는 그들의 결혼생활을 성화(聖化)하며, 그 안에서 다시 자신들을 거룩하게 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만약 부부가 자신들의 영적 발전에서 가정생활을 배제한다면 그건 심각한 실수입니다. 결혼이라는 결합, 자녀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일, 가족의 필요를 채워주고 가정의 안전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 공동체를 이루는 다른 사람들과의 친교 등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이 처한 일상 상황에서 이뤄지며, 그리스도인 부부들은 이런 일상의 상황들을 거룩하게 만들도록 소명 받았습니다.

모든 가정이 맞닥뜨리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진심으로 마주하며 신앙과 희망의 미덕을 실천한다면, 또한 사랑과 열정을 다해 부부의 의무를 온전히 이루어내기 위해 분투한다면, 부부는 그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한다면, 부부는 모든 일에 있어 애덕을 실천하게 됩니다. 그들은 웃는 법을 배우며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위해서 기꺼이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법을 익힙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경청하고 자녀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가족들이 진정으로 사랑받고, 또 이해받고 있음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 부부는 이기심 때문에 벌어지는 사소한 마찰들에 대해서는 잊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일상에서 애정을 다해 서로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가정의 삶을 성화(聖化)하는 것,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인 부부의 목표입니다. 동시에 진정으로 가족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하루하루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의 많은 미덕들이 필요합니다. 우선 신학적인 미덕이 필요하고, 이어서 신중함, 충직함, 성실함, 겸손, 부지런함, 명랑함 등 다른 미덕들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결혼과 결혼생활에 한해서 말한다면, 남편과 아내 간에 서로의 사랑을 명확하게 얘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인간적 사랑의 거룩함 

부부의 사랑은 순결하고 숭고하며 신성한 것입니다. 사제로서 저는 온 마음을 다해 이 사랑을 축복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전승은 예수님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셨다는 사실을 통해 하느님께서 결혼에 부여하신 가치를 확인합니다. 이와 관련해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성인은 이렇게 썼습니다. “인간 삶의 근원을 거룩하게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우리 구세주께서 혼인잔치에 가셨습니다.”

결혼은 두 사람의 몸이 하나가 되는 성사입니다. 신학은 “혼인성사의 주제가 남편과 아내의 몸”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이 같은 사실을 매우 강조해서 표현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나누는 사랑을 거룩하게 하시고, 또한 축복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결혼을 영혼의 결합일 뿐 아니라 육신의 결합이라고 여기십니다. 결혼의 소명을 받았건 아니건 간에 어떤 그리스도인에게도 결혼의 가치를 과소평가할 권리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지으셨고 또한 지성을 부여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지성은 하느님의 지혜로부터 온 한 점 불꽃과도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또 다른 선물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의지 덕분에 우리는 이해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 몸 안에 출산의 능력을 심어주셨습니다. 이 능력을 통해 우리는 주님만이 가지신 창조의 권능에 동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사랑의 힘으로 이 세상에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교회의 몸을 키워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성(性)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성(性)은 생명과 사랑과 결실을 맺어주시는 하느님의 거룩한 선물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그리스도교의 성(性)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 땅에 존재하는 아름답고 고귀하며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들 중 그 어떤 것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간단명료하게 가르쳐줍니다. 우리들 삶의 규범이 결코 이기적인 쾌락의 추구가 돼선 안 된다고 말입니다. 오직 희생과 절제만이 진정한 사랑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진실하게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도록 초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은 다음과 같이 역설적으로 표현합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 10,39)

끊임없이 자기 자신만 생각하며 오직 자기만족만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얻기 어려우며, 현세의 삶에서도 불행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줄 때만이 이 땅에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결혼생활뿐만 아니라 삶의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얻는 행복은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준비하고, 그 기쁨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사랑에는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결혼생활이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기쁨이 있고, 가정을 꾸리고 돌보는 열망과 열정이 있으며, 남편과 아내의 사랑이 있고,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는 행복이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슬픔과 고난이 동반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육신은 소진하고, 마음은 갈수록 쓰라리며, 겉보기에 항상 똑같은 날들이 단조롭게 이어지면서 인성(人性)이 위협받습니다.

그런 고난들에 직면했을 때 사랑과 기쁨이 끝나버렸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결혼과 인간의 애정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 닥쳐온 바로 그때 우리의 진짜 감정이 드러납니다. 바로 그때 자기를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과 다정한 심성이 뿌리를 내려 진실하고 깊은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냅니다. 이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모든 혼인관계에서 충실함과 정직함을 요구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이와 관련해,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활동을 수행할 때 기쁨이나 만족을 느낄 수 있도록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인간 활동으로부터 오는 기쁨이나 만족은 선한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그 반대로 오직 만족 자체만 목표로 삼아 이를 추구한다면, 그래서 만족이 지향해야 할 선(善)함을 무시한다면, 이는 만족의 진정한 본성을 왜곡시킨 것이며 만족을 죄로, 또는 죄를 짓게 되는 상황으로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정결(貞潔)은 단순히 금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 깃들어 있는 의지(意志)에 대한 명확한 긍정입니다. 삶의 어떤 상황에서건 정결은 사랑을 항상 생기 넘치게 유지해주는 미덕입니다. 육체적인 성숙에 눈뜨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걸맞은 정결이 있고, 결혼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어울리는 정결이 있습니다. 또한 독신생활을 하도록 하느님께 부르심 받은 이들에게 맞는 정결이 있으며, 기혼자로 하느님께 선택받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결도 있습니다.

저는, 토비야가 사라와 결혼하기 전에 대천사 라파엘이 그에게 준 굳세고도 명확한 조언이 떠오릅니다. “그러자 라파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내 말을 들으시오. 그러면 나는 누가 마귀에게 휘둘릴 수 있는지 당신에게 보여줄 것이요. 자기 자신에게서, 자신의 마음에서 하느님을 배제하고, 분별력 없는 말이나 노새처럼 욕정에 몸을 던지는 방식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하려는 사람은 마귀의 힘에 좌우되는 이들이기 때문이요.”

정결의 미덕이 없다면, 결혼생활에서 순수하고 진실하며 기쁨에 찬 인간의 사랑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정결의 미덕은 부부로 하여금 성(性)의 신비를 존중하게 합니다. 또한 그 신비에 충실하며 인격적으로 헌신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저는 불순한 것에 관해 얘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혐오스럽고 의미 없는 궤변에 빠져들지 않도록 항상 애써왔습니다. 대신에 저는 정결과 순결, 그리고 사랑에 대한 기쁨에 찬 확신에 관해서 여러 차례 말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결혼생활에서의 정결과 관련해 저는 모든 부부들에게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데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오히려, 서로 애정을 드러내는 일은 결혼생활의 뿌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부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그들이 서로 존중하고 서로에게 성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품위 있고 단순하며 단정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바라십니다. 저는 또한 부부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사랑을 표현할 때 그 결과로 부부관계가 존엄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부부의 관계가 결실을 맺어 출산(出産)에까지 이르면, 부부의 사랑은 엄존(儼存)할 것입니다.

이렇게 삶의 원천이 되는 일들을 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선물을 거스르는 범죄입니다. 이는 곧, 인간은 사랑이 아닌 이기심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마치 공범(共犯)처럼 바라보게 되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지며 불화가 싹트게 됩니다.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불화는 십중팔구 치유하기 불가능해집니다.

부부의 사랑에 정결이 깃들어 있다면, 그들의 결혼생활은 진실한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진심으로 대하고 서로 이해하게 되며, 부부 사이의 일치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性)이라는 하느님의 선물이 왜곡될 때 부부의 친교는 망가져버리고, 더이상 서로를 솔직하게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부부는 서로에 대한 진지하고 순결한 애정을 기반으로, 또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녀들을 세상에 데려오는 기쁨을 바탕으로 그들의 삶을 함께 꾸려야만 합니다. 부부는 그들 자신의 안락함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하며,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대가족을 이루는 것은 확실히 행복하고 보람 있는 삶을 보증합니다. 이기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의 그릇된 옹호자들은 정반대로 이야기하겠지만 말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전혀 다투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지만 아이들 앞에서는 절대 싸우지 마십시오. 그러면 아이들이 상처를 입게 됩니다.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편을 들어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부지불식간에 부부의 일치를 저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자주가 아니라면 부부싸움은 오히려 사랑의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부부간에 필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요. 부부가 싸우게 되는 상황을 보면 대개 이렇습니다. 남편은 일에 지쳐서 피곤합니다. 권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내도 피곤합니다. 아이들과 온갖 집안일에 치이기 때문이지요. 아내의 심성이 굳세지 않거나 인내심이 강하지 못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마음먹기만 한다면 여성은 남성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자만하지 마십시오. 자만심은 여러분 결혼생활의 가장 큰 적입니다. 여러분이 사소한 부부싸움을 할 때 남편과 아내 중 어느 누구도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 중 더 침착한 쪽이 먼저 한 두 마디 말을 건네서 서로의 나쁜 성질이 드러나는 걸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부부만 남았을 때 계속 의논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곧 평화가 찾아들 것입니다.

아내들께서는 혹시나 여러분의 외모를 챙기는 일을 잊어버리지 않았나 자문해보십시오. 여성은 스스로를 예쁘게 가꿔야 한다고 말하는 여러 속담들을 기억하십시오. 결혼 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의 용모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것이 아내의 의무이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입니다. 나아가 그것은 또한 정당한 의무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남편에게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남편들 또한 자신들이 아내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그러니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 한사랑에 빠졌던 젊은 시절과 똑같은 애정을 서로에게 드러내 보일 의무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 얘길 듣고 빈정대며 웃는다면 그것은 좋지 않은 징후입니다. 당신의 사랑이 차가운 무관심으로 변했다는 뜻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밝고 활기찬 가정 

가정을 얘기하지 않고 결혼에 대해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가정은 결혼의 결실이요 그 연장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남편과 아내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포함하며, 조금 넓게 보면, 조부모와 다른 친척들도 가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들까지도 포함됩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가정 안에서 가족의 온기를 함께 나눠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자녀를 주시지 않은 부부도 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부부가 더욱 서로 사랑하기를 하느님께서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한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선익(善益)에 봉사하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녀를 갖는 일은 부부에게 일반적이며, 그것이 부부의 첫 번째 관심사여야만 합니다. 부모(父母)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이 세상에 자녀를 낳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새 생명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 권능을 더불어 나누는 것이며, 세대를 잇는 연속성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키워내기 위해 성령과 협력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영적인 문제와 인간적인 문제들을 교육해야 할 의무를 가진 첫 번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항상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부모는 신중해야 하고, 이해심이 깊어야 하며, 사랑의 능력을 기르고,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항상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권위적 방식으로 아이들을 강제로 가르치려 드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부모의 가장 이상적인 태도는 자녀들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걱정을 기꺼이 같이 나누고, 그들에게 닥친 문제에 귀기울이며, 효과적이고 기분 좋은 방식으로 그들을 돕는, 그런 친구가 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모는 자녀들과 함께 보내며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것은 사업이나 일, 휴식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대화를 나눌 때 부모는 자녀의 얘기를 경청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관심을 기울이고 이해하려 애써야 합니다. 만약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더라도 아이들의 의견이 부분적으로 때로는 전적으로 옳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동시에 자녀들이 옳은 방향으로 노력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주고, 그들이 하려는 일이 올바로 실행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부모는 자녀들이 모든 일을 깊이 생각하고 그 이치를 따질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는 어떤 행동을 하라고 강요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왜 해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해 인간적이면서도 초자연적인 동기를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부모는 자녀들의 자유를 존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책임을 가르치지 않는 교육이란 진정한 교육이 아니며, 자유를 수반하지 않는 책임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주로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 자녀들을 가르칩니다. 아들과 딸이 아빠와 엄마에게서 얻고 싶어 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나 충고가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증거를 얻고자 합니다. 어느 특별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드러나는 삶의 가치에 대한 증거, 한 시대에 걸쳐 여러 상황과 환경에서 확인된 삶의 의미에 대한 증거 말입니다.

제가 부모님들께 조언을 드리자면, 무엇보다도 여러분이 신앙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속이지 맙시다. 자녀들은 어렸을 때부터 여러분의 모든 것을 보고 있고, 판단합니다. 부모들이 입으로만 하느님을 말하지 말고, 그분을 증거하고 있음을 아이들에게 행동으로 보여주십시오. 신앙에 충실하고자 진실하게 애쓰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여러분이 먼저 서로 사랑하고, 또한 자녀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여러분의 자녀들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한 최선의 헌신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자녀들은 성실하고 정직하게 커갈 겁니다. 그들은 열린 영성으로 삶의 모든 상황들을 마주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또한 동료에게 봉사하고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주며,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자녀들의 얘기를 경청하십시오. 자녀들에게 여러분의 시간을 내어주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위해 챙겨둔 시간이라 할지라도 자녀에게 선뜻 내어주십시오. 여러분이 자녀들을 신뢰하고 있음을 보여주십시오. 그들이 무슨 말을 하건, 때로 여러분을 속이려 들더라도 자녀들을 믿어주십시오. 자녀들이 반항한다고 해서 섭섭해하지 마십시오. 부모인 여러분도 그 나이 땐 어느 정도 반항적이었을 테니까요. 자녀에게 양보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그리스도교적인 태도로 행동한다면, 자녀들도 천진난만하게 여러분께 다가올 것입니다. 그 나이 때에 당연히 가질만한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거칠고 상스러운 친구를 찾아가는 대신 부모에게 다가올 것이란 얘깁니다. 부모가 신뢰와 상냥함으로 자녀를 대한다면 자녀들도 진실하게 부모를 대하는 모습으로 응답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일시적으로 불화와 오해가 생기더라도그리 큰 문제가 되진 않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의 평화이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초세기 때 한 그리스도인 작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요? 교회에 의해 맺어져, 남편과 아내의 헌신으로 굳세어진 결혼의 기쁨을 말입니다. 축복으로 다져지고 천사에 의해 선포되어 아버지 하느님께 받아들여진 혼인의 환희를 말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남매와 같으며, 서로를 섬기는 하인과도 같습니다. 그 무엇도 영육 간에 그들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부는 하나의 육신 안에 존재하는 두 사람이며, 참으로 하나의 육신과 하나의 영성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가정을 기대하시면서 기뻐하시고 당신의 평화를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있는 곳에 그리스도께서도 같이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는 어떤 악(惡)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영롱한 가정의 몇몇 특징들에 관해서 이야기해보았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이런 특징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빛과 기쁨으로 가득한 가정입니다. 부모의 일치는 자녀들의 일치로, 모든 가족들의 일치로, 그리고 그들의 삶과 연관된 모든 사람들의 일치로 이어집니다. 이처럼 참된 그리스도인 가정은 어떤 방식으로든, 하느님께서 선택하셔서 세상을 이끌도록 파견하신 교회의 신비를 재현합니다.

사제이건 평신도이건 기혼자이건 미혼이건 상관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온전히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성가정축일에 우리가 읽었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 (콜로 3,12) 이 말씀에 나오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수없이 실수를 저지르지만 그 실수를 극복하기 위해 분투하며, 자신이 처한 세속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들 한 명 한 명이 바로 그런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하느님께 선택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달은 기쁨을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 전하도록 뽑힌 것입니다.

성직자의 강론이나 종교 수업, 또는 하느님께서 이 길을 따르도록 부르시고자 하는 사람들의 양심 성찰에서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결혼은 하느님의 진정한 부르심’이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그러니 부부들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완수하는 데 동참하기 위해 그들이 진정으로 부르심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사도 시대의 그리스도인 가정은 오늘날 그리스도인 부부들에게 최고의 본보기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의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였고, 그의 집에서 이방인들도 교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참조 사도 10,24-28) 아퀼라와 프리스킬라는 코린토와 에페소에서 바오로 사도와 협력해 선교하였으며(참조 사도 18,1-26), 자선과 선행을 많이 한 타비타는 야포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도왔습니다.(참조 사도 9,36) 유다인과 이방인들,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의 수많은 다른 가정들에서도 주님의 첫 사도들의 가르침이 결실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어 살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을 전하는 가정이 된 것입니다. 작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이 복음과 메시지를 세상에 널리 선포하는 중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그 시대의 다른 가정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리스도인 가정은 새로운 영성으로 살아가고, 그들과 관계 맺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를 전파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며, 우리도 그들처럼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화와 기쁨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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