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하느님 자녀들의 회개 (1952년 3월 2일 사순 제1주일 강론)

우리는 사순시기의 시작을 맞이했습니다. 참회와 정화, 그리고 회개의 시기입니다.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고 보면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가 그리 쉬운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우리의 첫 회개는 확실히 정말로 소중합니다. 우리들은 첫 회개의 순간을 저마다의 유일무이한 시간으로 기억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우리가 확실히 이해했던 특별한 시간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다음에 계속 이어지는 회개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회개할 때마다 점점 더 많은 것들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회개 안에 깃든 은총의 활동이 계속되게 하려면 우리의 영혼을 젊게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 간청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알게 해달라고, 무엇을 잘못했을 때 어떻게 하면 당신께 용서를 구할 수 있는지 깨닫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주일 전례에서 “그가 나를 부르면 나 그에게 대답하고” (시편 91,15) 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시고, 인간이 당신께 얘기하기를 기다리면서 언제나 우리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분은 항상 우리 얘기를 듣고 계시지만, 특별히 지금 이 순간에 더욱 경청하십니다. 우리 마음은 준비돼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화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분은 우리 얘기를 듣고 계시며, 우리의 “부서지고 꺾인 마음”(시편 51,19)을 결코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귀 기울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악(惡)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선(善)으로 가득 채우도록 하기 위해 우리 삶에 개입하길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를 해방하여 영예롭게 하리라.” (시편 91,15). 그러므로 우리는 영광을 희망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영적 생활(영성생활)을 일궈갈 ‘내적 움직임’을 다시 한번 시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영광에 대한 희망이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키웁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는 이 세 가지 신학적 미덕, 즉 ‘향주덕(向主德)’은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을 닮게 해줍니다. 이들 향주덕은 이미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순시기를 더 잘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참회의 정신과 정화를 위한 열망은 바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는 세 가지 향주덕으로부터 옵니다. 사순시기는 금욕의 외적인 실천만을 늘릴 수 있는 기회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사순시기가 가지는 깊은 의미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사순시기에 우리가 행하는 금욕의 외적 실천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결과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위험한 안전(安全) 

“지극히 높으신 분의 보호 속에 사는 이, 전능하신 분의 그늘에 머무는 이” (시편 91,1).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위험한 안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얘기를 경청하신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신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렇게 확신한다면 우리는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함께 나누려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께 다가간다면, 그것은 우리가 새로운 회개를 준비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정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감에 보다 주의 깊게 귀 기울이며,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영감이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하느님께서 불러일으키시는 거룩한 갈망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첫 번째 결정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참으로 따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결정한 이후,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이행해가는 여정에서 우리가 많이 성장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할 일이 여전히 많다는 게 사실이지 않습니까? 특히 우리 안에 여전히 너무도 많은 교만(驕慢)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실제로 다시 변화해야만 합니다. 더욱 성실하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은 줄어들고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커지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요한 3,30)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오로 성인이 얘기한 새로운 목표를 향해 쉼 없이 전진해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20) 이것은 고귀하고 숭고한 바람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뜻하며 이것이 바로 거룩함인 것입니다. 만약 세례 때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 심어주신 거룩한 삶을 우리가 그대로 살고 싶다면,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우리는 거룩함을 키워가야 합니다. 이 거룩함을 꺼리고 피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삶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거부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불길은 계속 지펴져야 합니다. 그 사랑의 불길은 우리 영혼의 힘을 모아 매일 커져야 합니다. 불길은 무언가를 계속 태움으로써 유지됩니다. 만약 우리가 계속 불을 지피지 않는다면 꺼져버릴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얘기를 기억합시다. “만약 여러분이 스스로 ‘이만큼 왔으면 충분하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길을 잃은 것입니다. 더 멀리 나아가십시오. 계속 가십시오. 같은 장소에 머무르지 마십시오. 되돌아가지 마십시오. 길 밖으로 벗어나지 마십시오.”

사순시기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따르며 성장하고 있는가? 거룩함에 대한 열망이 성장하고 있는가? 일상에서 실천하는 너그러운 사도직 활동이 성장하고 있는가? 내 동료들과 함께하는 일상의 일에서 성장하고 있는가?

우리 모두 조용히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한번 변화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고, 우리 행동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분명히 비추어지려면, 우리가 변화해야만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2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 말씀을 다시 하고 계십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라고 우리 귀에 속삭이시면서 말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박해 시기, 또는 순교의 기회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예전의 우리’를 부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지금의 우리’를 고백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행하고 생각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의 고백이 이뤄지도록 합시다.”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화답합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 (에페 5, 8-10)

회개는 한순간의 일이고 거룩해지는 것(聖化)은 평생의 과업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에 심어주신 사랑의 거룩한 씨앗은 자라나기를 원하고 행동으로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대로 한결같이 일치하는 열매를 맺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상황에서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처음 회개했던 순간의 그 빛과 강렬한 느낌을 되찾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며 양심의 깊은 성찰을 갖추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주님과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다시 회개하고자 한다면 다른 길은 없습니다.

지금이 용서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2코린 6,1)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닫지 않는다면, 이 사순시기에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를 가득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선하게 해야 합니다. 참으로 변화를 원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하느님의 은총을 가지고 장난칠 수 없습니다.

저는 두려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두려움이 아닌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났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인류와 피조물을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하지만 우리는 책임감에 대해, 진지함에 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우롱당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갈라 6,7). 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결심해야 합니다. 성 미카엘 천사와 악마를 위해 두 개의 초에 모두 불을 밝히는 건 잘못된 일입니다. 악마를 위한 초는 꺼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온전히 주님을 섬기는 데 써야 합니다. 거룩함을 향한 우리의 열망이 진심이라면, 하느님의 손길에 우리 자신을 맡길 만큼 우리가 충분히 유순하다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당신의 은총을 우리에게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회개를 위한 은총,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네 삶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시는 은총입니다. 특히 이 사순시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사순시기를 매번 반복되는 전례력 상의 다른 시기들과 똑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 시기는 아주 특별한 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거룩한 도움을 주시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순간은 예수님께서 우리 곁을 지나가시면서 우리가 한 걸음 크게 앞으로 내딛길 소망하시는 시기인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2코린 6,2) 우리는 다시 한번 착한 목자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분은 다정하게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이사 43,1) 착한 목자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용하는 친근한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다정하심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우리가 당신을 반드시 볼 수 있는 길가에 서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부르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만 아는 사실들에 관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물론, 우리만 아는 사실들이라 해도 모두 주님께 속한 것들이지만 말입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을 움직여 슬픔을 알게 하시고, 우리가 관대해지도록 우리 양심을 열어주시며, 우리 스스로 충실해지기를 바라게끔 격려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당신의 제자들이라고 불릴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친밀한 은총의 말씀을 들을 때, 애정 어린 나무람으로 오시는 그 은총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으셨음을 단번에 깨닫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우리가 당신을 보지 않았던 그 모든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당신의 마음속 그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2코린 6,2).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계속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영광과 당신의 사랑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그 영광과 사랑을 제때에 여러분에게 주십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으니 여러분은 주님께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우리를 만나기 위해 오신 이 예수님의 사랑에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할 것이며, 저는 또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구원의 날이 여기, 여러분 앞에 와있습니다. 착한 목자의 부르심이 우리에게 이르렀습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이사 43,1) 사랑은 사랑으로 보답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1사무 3,9) 라고 응답해야 합니다. 저는 이 사순시기를 마치 바위 위에 떨어진 빗방울처럼 아무 흔적도 없이 흘려보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이 사순시기가 제 안에 스며들어 저를 바꾸게 할 것입니다. 저는 변화할 것이며, 다시 한번 주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사랑받기를 원하시는 그대로 주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마태 22,37)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한 사랑 말고 여러분의 가슴에 남은 구석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영혼에는요? 여러분의 마음에는요? 하느님께서는 ‘전부’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을 만드신 그분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것을 온전히 당신께 달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관해 이렇게 확실히 알았다면, 우리는 이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으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일꾼으로 내세웁니다.” (2코린 6,4).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여러분 자신을 내어드린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영향이 여러분의 직업 활동에서, 여러분의 일터에서, 인간적인 일들을 거룩하게 하려는 여러분의 노력 안에서 분명히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 은총의 영향이 크건 작건 간에 말입니다. 사랑은 모든 일에 새로운 영역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란 사실을 이 사순시기 동안 절대로 잊지 맙시다. 사순 제1주일의 서간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곧 많이 견디어 내고, 환난과 재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겪으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또 수고와 밤샘과 단식으로, 순수와 지식과 인내와 호의와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으로,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힘으로 그렇게 합니다.” (2코린 6,4-7)

우리가 날마다 살아가는 다양한 활동과 그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종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말입니다. 거룩한 뿌리가 우리 삶에 깊이 박혀 있음을 알고, 그에 합당하게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 말씀에 따라 우리는 행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 자체가 세상 한가운데서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의 소명을 인정해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똑같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열정을 나누고, 인간 삶의 슬픔과 기쁨을 공유하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의 소명을 확인시켜 주는 까닭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 가는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요청하는 것은 여러분이 언제나 당신의 자녀이자 종으로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때만, 참으로 우리 스스로를 온전히 내어줄 때만, 이런 삶의 평범한 상황들이 거룩한 여정으로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격한 언어를 곧잘 사용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되게 살 것이며, 항상 긴장되고 위험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멋지고 편안하게 신앙을 살아가려고 한다면, 그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는 일이 또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교의 삶의 방식은 인간 존재의 모든 고난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심오하고도 진지한 그리스도교의 삶의 방식이 번민과 억압, 두려움에 가득 찼다고 여기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실주의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지닌 초자연적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적인 사실주의는 그로 하여금 삶의 모든 측면들을 인정하도록 도와줍니다. 슬픔과 기쁨,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고통, 확신과 의심, 관대함과 이기심 등 모든 삶의 모습들을 인정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것들을 겪어내며 인간적 성실함과 하느님께 받은 힘으로 이들에 맞섭니다.

그리스도께서 유혹 받으시다 

사순시기는 당신의 공생활을 준비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보내신 40일을 기리는 기간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승리로 절정을 맞이할 주님의 공생활을 준비하신 광야의 시기를 기념하는 것이지요. 40일의 사순시기는 기도와 참회의 기간입니다. 끝으로 전례에 따른 오늘의 복음 말씀을 떠올려 봅시다. 바로 그리스도의 유혹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인간이 감히 이해하기를 바랄 수 없는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유혹을 받으시고, 악(惡)이 멋대로 설치게 놔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가르침을 이해하도록 도와달라고 주님께 간청하면서 이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혹 당하시다… 전통적으로 광야에서 겪은 그리스도의 시련을 이런 식으로 바라봅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의 모범이 되신 주님께서는 유혹에 시달리는 일 또한 스스로 원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죄가 없다는 것 말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완벽한 인간이므로 우리와 똑같이 유혹 받으시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마도 약초와 풀뿌리 조금, 그리고 약간의 물 말고는 다른 어떤 음식물도 없이 40일간 금식하셨기에 예수님은 허기를 느끼셨을 겁니다. 보통의 인간들이 그렇듯 그분도 정말로 배가 고팠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마가 돌멩이를 빵으로 바꿔보라고 제안할 때 예수님은 당신의 육신이 갈구하는 음식을 거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더욱 큰 유혹을 뿌리치십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당신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의 거룩한 힘을 쓰라는 유혹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복음서 전체를 보면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어떻게 일으키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카나의 결혼식에서 축하객들을 위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고, 배고픈 군중을 위해 빵과 물고기를 많아지게 하십니다. 그렇지만 당신 자신은 수년간 스스로 일을 하셔서 생계를 꾸리십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땅을 돌아다니며 공생활을 하시는 중에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생활하십니다.

복음사가 요한 성인은 긴 여행을 하신 뒤 예수님께서 ‘시카르’의 우물에 도착하셨을 때 제자들을 고을로 보내 먹을 것을 사오게 하셨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이 오는 것을 보자 예수님은 그녀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하십니다. 부탁하는 방법 말고는 물을 얻을 길이 없었던 겁니다. 오래 길을 걷느라 지친 당신의 육신이 피곤을 느끼신 것입니다. 다른 경우였다면 그분은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잠을 청해야 하셨겠죠. 당신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셔서 인간의 육체적 상태를 온전히 받아들이시는 우리 주님은 얼마나 너그러우십니까! 그분은 자신의 고충이나 노고를 피하기 위해 당신의 거룩한 힘을 절대 쓰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우리가 강인해지도록, 우리가 우리의 일을 사랑하도록, 그리고 우리들 자신이 노력한 결과를 음미할 수 있는 인간적이면서도 거룩한 고귀함을 깨닫도록 말입니다.

두 번째 유혹에서 악마는 예수님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권능을 사용하라는 악마의 제안을 다시 한번 거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겉으로 드러내는 허영(虛榮)을 좇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 자신의 장점을 내보이는 배경으로 하느님을 이용해선 안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셨지만, 하느님의 계획을 미리 예상하지도, 기적의 시기를 앞당기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오직 인간의 고된 길을, 십자가로 나아가는 사랑의 여정을 묵묵히 걸어가셨을 뿐입니다.

세 번째 유혹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왕국과 권력과 명예를 제안받습니다. 악마는 이제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야 할 신심(信心)마저도 인간의 야욕으로 돌리기 위해 열을 올립니다. 이렇게 악마는 편안한 삶을 우리에게 약속합니다. 우리가 악마 앞에, 우상 앞에 무릎 꿇기만 하면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참으로 경배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하느님뿐이라고 역설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만을 섬기겠다는 당신의 다짐을 명확히 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마태 4,10)

우리는 이러한 유혹의 순간에 보여주신 예수님의 태도로부터 배워야만 합니다. 그분은 지상에서 사시는 동안 당연히 누려야 할 영광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으로서 마땅히 흠숭 받으셔야 했지만, 그분은 종의 모습을, 노예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영광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복음의 숭고함과 위대함을 결코 자신의 이익이나 인간적 야망을 위해 사용해선 안 된다는 사실도 잘 압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모든 인간적 영광을 거절하시는 그분의 태도는 당신께 부여된 위대한 사명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그것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육신을 취하신,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드님으로서 수행해야 할 임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받으셨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이 당신의 사명을 이루도록 자애로운 보살핌으로 이끌어주십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 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 (시편2, 7-8)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이렇게 하느님 아버지를 온전히 흠숭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누구나 우리 주님의 사랑스런 돌봄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가 나를 따르기에 나 그를 구하여 주고, 그가 내 이름을 알기에 나 그를 들어 높이리라.” (시편 91,14)

예수님께서는 어둠의 왕자인 악마에게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곧바로 밝아집니다.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마태 4,11). 예수님께서는 시험에서 이기셨습니다. 그것은 진짜 시험이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 성인은 광야의 유혹이 진짜 시험이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으로서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권능을 쓰시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분이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힘을 쓰셨다면, 광야에서 유혹 받으신 사건이 무슨 본보기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서로 나눌 수 있는 도움만을 쓰셨던 것입니다.”

악마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자기 멋대로 왜곡해 인용합니다.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시편 91,11)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 아버지를 시험하려는 유혹을 거부하십니다. 그리고 악마가 왜곡해 인용한 성경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러한 충실함의 보답으로 때가 되자 아버지 하느님의 사역자들(천사들)이 나타나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악마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사용한 유혹의 방법은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악마는 성경 말씀의 의미를 불경하게 왜곡해서 그 문구들을 가지고 언쟁을 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속지 않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기록된 것이지 인간을 혼란에 빠뜨려 타락하게 하려고 쓰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으로 한 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악마처럼 성경 말씀을 조작하는 그런 짓거리에 아무도 속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짓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악마가 저지르는 전형적인 수법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지혜의 말씀을 거짓으로 속이고 빛을 어둠으로 바꾸려는 수작인 것이죠.

예수님의 삶에서 이렇게 천사가 등장하는 순간을 한번 살펴봅시다. 그러면 모든 인간의 삶에 있어서 천사가 하는 역할, 즉 그들 천사의 사명에 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전승은 수호자인 천사들을 ‘강력한 친구들’이라고 묘사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길을 가는 데 동행해주라고 하느님께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배정해주신 존재들인 거죠.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들과 친구가 되라고 이끄시며,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도와주게 하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삶의 행적들을 묵상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죄와 비참함, 그리고 정화의 절실함을 깨닫는 이 사순시기에도 기쁨의 여지가 존재함을 일깨워줍니다. 사순시기는 용기의 시간인 동시에 기쁨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용기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를 저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 곁에 계시며, 당신의 천사를 우리에게 보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들은 우리 인생 여정의 동반자가 되고, 길을 가는 내내 세심한 조언자가 되며, 우리가 맡은 모든 일의 협력자가 될 것입니다. 시편은 이렇게 천사들에 관해 노래합니다.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시편 91,12)

우리는 천사들에게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지금 천사들에게 의지하십시오. 당신의 수호천사들에게 얘기하십시오. 사순시기에 주시는 이 영성의 물결이 여러분의 영혼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영혼 깊이 깃들게 해달라고 간청하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은 가엾은 존재들이니까요. 또한 여러분의 선한 의지를 주님께 가져가 보여드리라고 천사들에게 부탁합시다. 마치 퇴비 더비에서 자라난 한 떨기 백합처럼 우리의 비천함을 뚫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라난 선한 의지를 주님께 가져다드리라고 말입니다. 거룩한 천사시여, 우리의 수호자시여, “싸움 중에 있는 저희를 보호하소서. 그래서 마지막 심판의 날에 저희가 사라지지 않게 하소서.”

하느님의 자녀들 

여러분은 이 확신에 찬 기도를, 악(惡)과의 전쟁에서 우리가 결코 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 깨달음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이런 확신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바로 이 ‘하느님의 자녀됨’이야말로 언제나 제게 경이롭게 다가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사순시기에 우리의 변화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결코 포악한 지배자도, 엄격하고 무자비한 심판자도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부족한 관대함과 우리의 죄와 실수에 관해 말해주십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해주시는 것은 우리를 그것들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시기 위해서이며, 당신과 나누는 친교와 사랑을 약속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우리가 기쁘게 회개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는 아버지의 집으로 우리가 되돌아오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됨’은 오푸스데이 영성의 바탕입니다.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아이는 아버지를 여러 방법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깨닫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세상 한가운데 있는 당신 집으로 우리를 데려가서 하느님의 가족이 되게 하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것이 곧 우리의 것이고 우리의 것이 바로 그분의 것입니다. 마치 달을 따달라고 조르는 어린아이처럼 주님께 간구하는 친근함과 자신감을 키워가도록 노력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주님을 아버지로 모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아첨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단순히 격식과 예의만을 차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참으로 진실되고 의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진노하시게 만들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불신(不信)을 참으실 수 있습니다. 당신 자녀들이 주님께 돌아올 때, 회개하며 용서를 청할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어떤 잘못도 용서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너무도 좋은 아버지여서 용서받고 싶어 하는 우리의 소망을 항상 기다리시며, 은총 가득한 당신의 팔을 벌리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저는 아무것도 지어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예화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예화를 기억해봅시다. 바로 방탕한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루카 15,20) 성경에 기록돼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보다 더 인간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까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부성애를 이보다 더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해 달려오실 때 우리는 침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오로 성인과 함께 ‘아빠, 아버지(Abba, Pater)’라고 외칩니다. 비록 하느님께서는 우주의 창조주이시지만, 우리가 어마어마하게 찬양하며 반기지 않더라도 괘씸하게 여기지 않으시며, 당신의 위대하심을 우리가 알지 못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으십니다. 단지 그분은 우리가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길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영혼이 기쁨에 가득 차서 이 ‘아버지’라는 말을 음미하길 바라시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인간의 삶이란 끊임없이 우리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입니다. 통회(痛悔)를 통해서, 마음의 회개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우리 마음의 회개는 스스로 변화하고픈 열망을 의미합니다. 우리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굳센 결심, 희생과 자기증여(自己贈與)라는 말로 표현되는 그 확고한 다짐을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갑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입고, 그분의 형제이자 하느님의 가족이 되는 ‘용서의 성사(고해성사)’를 통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화 속 아버지처럼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비록 우리에겐 그럴 자격이 없을지라도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빚이 얼마나 많은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방탕한 아들과 똑같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음을 열고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는 것뿐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응답은 너무나 초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실제로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 거룩한 선물에 놀라고 기뻐하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아무리 놀라운 일들이라도 금방 잊어버리고 신비로운 사건도 곧 익숙해지는 인간의 이상한 능력은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 사순시기에 우리 모두 명심합시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피상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자신과 같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매일의 일에 얽매여 바쁘고 스트레스를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온전히 하느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됨’은 기쁨 넘치는 진실이자, 우리를 위로해주는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됨’은 우리의 모든 영적 생활을 가득 채웁니다. 또한 하느님께 어떻게 얘기해야 하는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어떻게 알고,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아울러 우리의 내적 투쟁을 희망으로 넘치게 하며, 우리에게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어린아이의 단순함을 선사합니다. 덧붙여 자세히 말하자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 안에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이신 우리 아버지의 손길로부터 온 모든 것에 경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한가운데서 세상을 사랑하며 관상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순시기에 교회전례는 아담의 죄가 인류의 삶에 끼친 영향을 돌이켜봅니다. 아담은 하느님의 선한 아들이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거역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오 복된 탓이여(felix culpa)’라는 찬양의 메아리를 듣습니다. 사순시기가 끝나고 부활 성야 때 온 교회가 기쁨에 겨워 이 성가를 부를 것입니다.

때가 찼을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평화를 다시 세우기 위해 당신의 외아드님을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외아드님이 인간을 죄에서 구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갈라 4,5) 이로써 우리가 죄의 멍에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삼위일체의 거룩한 친교를 더불어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새롭게 하느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모든 피조물은 혼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분은 피조물과 하느님 사이의 화해를 이뤄내셨던 것입니다.

지금은 참회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결코 부정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사순시기는 ‘하느님의 자녀됨’이라는 영성 안에서 지내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됨’이란 영성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것이며, 우리들 영혼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께 더 가까이 오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과 같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에페 5,1) 따라서 하느님께서 뜻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 겸손하면서도 열렬하게 협력하십시오. 깨어진 것을 고치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며, 죄 많은 인간이 무질서하게 흩어놓은 것에게 다시 질서를 돌려주고, 길 잃은 것들을 제 갈 길로 인도하며, 모든 피조물의 거룩한 균형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뜻하신 목적입니다.

때때로 사순시기의 전례는 하느님을 저버린 인간의 결말을 강조함으로써 비극적인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마지막 말씀을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바로 당신의 구원과 자비로운 사랑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복음사가 요한 성인의 말씀을 오늘 다시 반복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1요한 3,1)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자녀이자,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의 형제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에 대해 요한은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 1,4)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고, 빛의 형제들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일부인 우리의 심장에 불을 붙일 수 있는 유일한 불꽃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강론을 멈추고 미사를 계속 집전하겠습니다. 여러분이 각자 생각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요구하고 계시는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여러분 안에서 어떤 결심과 다짐을 북돋우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자기 헌신과 끊임없는 투쟁입니다. 여러분은 이 투쟁이 초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요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본보기라는 사실도 기억하십시오. 아울러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유혹 당하셨고 그로 인해 우리는 한결 더 나은 영성 안에 머무를 수 있으며, 확실한 승리를 체감(體感)할 수 있게 되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지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과 하나가 된다면 우리는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스스로 승리자라고, 진정한 승리자인 하느님의 선한 자녀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행복합시다. 저는 행복합니다. 사순시기가 요구하는 양심 성찰로 제 삶을 바라보면 행복해해선 안 되겠지만, 저는 그래도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다시 저를 찾고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여전히 제 아버지이심을 아는 까닭입니다.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빛과 은총의 도우심으로 여러분과 제가 확실히 태워버려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들을 태워버릴 것입니다. 또한 뿌리 뽑아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들을 뿌리 뽑을 것이며, 포기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들을 포기할 것입니다.

이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확실한 안내자가 있습니다. 우리에겐 그 안내자가 없어선 안 되며 또한 안내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실 것이며, 그리하여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고 우리를 정화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끌어안을 수 있고 그분과 함께 부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기쁨은 십자가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조력자이며 죄인들의 피난처’이신 우리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님이시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도록 당신의 아드님께 청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확신에 차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결심이 우리 마음에 일어나도록 해주소서.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자 중 한 분이 외친 평화로 가득한 말씀을 우리들 영혼 깊이 들을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오너라, 너희의 아버지께 돌아오너라” 그분이 너희를 기다리고 계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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