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영원

하느님의 자녀는 삶과 죽음, 그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영적 생명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의식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모든 선한 것을 지으신 분이시다. 그분은 선 자체이시다.’

하지만 그대와 나,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처신합니까?

내가 그대에게 했던 말을 그대가 이해했다는 것을 알고 기뻤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지요. “그대와 나는 마치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일하고 살고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랑 안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승리하십니다. 그대가 그분의 도구라면 그대 또한 승리할 것입니다. 그대가 치를 전투는 하느님께서 치르시는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은 정확하게 여기에 있습니다. 곧 평생 충실하게 분투하고 죽을 때엔 하느님의 뜻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데에 있습니다.

성찬례에서 주님을 모실 때,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하심을 진실한 마음으로 감사드리십시오.

메시아께서 오시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렸는지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성조들과 예언자들이 모두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 오시기를 이 땅이 목말라 하나이다.!”

그대의 사랑에 찬 기대가 오직 이와 같기만 하다면.

이 시대에도,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땅은 하늘과 아주 가깝습니다.

그대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하늘나라는…보화와 같다.’ 이 구절이 제 영혼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저는 전에 이 구절을 아주 많이 읽었지만, 그 의미를, 그 신적 맛을, 향기를 음미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입니다. 그 현명한 사람은 그 보화를, 값진 영광의 진주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팔아야 합니다.

성 마리아와 대화를 나누고 신뢰하며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오, 마리아님, 하느님께서 제 마음속에 심어주신 그 이상을 살기 위해서 저는 아주 높이 날아야 합니다. 한층 드높이!”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 세상 것들로부터 초탈하고 그것들을 한낱 먼지로 여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합니다. 천국에 더 가까이 가기 위서라면 온 우주를 발아래 쌓아둔다 해도 충분치 않습니다!

그대는 이 지상의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성령의 목소리와 숨결에 의지하여 날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대는 내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 날개가 얼룩져 있습니다! 진흙이 오랫동안 엉겨 붙어 지저분하고 꼴불견입니다!”

그래서 그대에게 거듭 말합니다. 성모님께 나아가십시오. 거듭 말씀드리십시오. “성모님, 저는 거의 날 수가 없습니다. 땅이 마치 저주받은 자석처럼 저를 끌어당깁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마음을 종착지로 하는 저 영광스럽고 결정적인 비행을 하도록 제 영혼을 날아오르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모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은 그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하느님께 영예를 드리고자 타오르는 향이 그분을 얼마나 기쁘게 해드리는지를 생각하십시오. 또 지상 것들의 가치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도 생각하십시오. 그것들은 시작인가 싶은데 어느새 끝자락입니다.

반면에, 하늘에서는 위대한 사랑이 그대를 기다립니다. 그 사랑은 배신하지 않고 속이지도 않습니다. 사랑 자체, 아름다움 자체, 위대함 자체, 지식 자체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절대로 물리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를 만족스럽게 할 것입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그대는 더 원할 것입니다.

초자연적 비전! 고요함! 평화! 이런 것들로 사안들을, 사람들과 사물들을 보십시오. 영원의 관점에서 보십시오.

그때에는 그대의 길을 막는 어떠한 장벽도, 인간적으로 말해서 거대한 장벽이라 하더라도,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대가 참으로 눈을 들어 하늘을 향한다면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곁에서 그분의 발걸음을 따른다면, 우리는 가난을, 지상 재화로부터의 초탈을, 궁핍을 온 마음으로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영성 생활에서는 하늘나라에서 승리하기 위해 이 땅에서 잃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잃는 것이 언제나 승리하는 길입니다.

현세적인 일을 두고 “영원히”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영원에 대해 “영원히”라고 말하는 것만이 오로지 진실합니다. 전적으로 진실합니다.

그러니, 그대는 저 영원을 생각할 때마다 천상의 감미로움을, 꿀맛을 맛보게 해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참으로 영원합니다.

위선, 악, 이기심, 배신. 이런 것이 삶이라면, 삶은 잔인한 헛소리일 것입니다.

비록 너무나 보잘것없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아니라 하더라도, 기뻐하면서 노력하면서 계속 나아가십시오.

그대가 그분과 함께한다면, 세상에서 아무도 그대를 막을 수 없습니다. 나아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선하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이 세상에 있는 온갖 문제는 해결책이 있습니다. 죽음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죽음이 생명입니다.

주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한 번의 죽을죄(大罪)로, 주님께서는 영원한 불행의 고통으로 단죄하십니다. 죄가 얼마나 주님 마음을 상해 드리는지요. 또 제가 얼마나 죄를 미워해야 하는지요!

성녀 데레사는 분명히 말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악마가 유혹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루에 단 15분이라도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구원받을 것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를 말합니다) 영혼이 거칠고 메마른 때에도 다정하신 주님과의 대화는 우리에게 참다운 위안과 삶의 올바른 영역을 보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영혼이 되십시오.

“그렇다면 그대가 왕이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왕이십니다. 그분은 그대가 원할 때 들어주실 뿐 아니라, 그대로서는 아직도 갈 수 없는 천국의 웅장한 당신 왕궁까지 포기하십니다. 사랑의 광기에서 말입니다. 내 말을 이해하기를! 그리고 그분은 감실에서 그대를 기다리십니다.

서둘러 그분께 가서 열심히 말씀드리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천상의 행복은 지상에서 행복해지는 법을 아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확신이 점점 더 듭니다.

아주 뚜렷하게, 현세와 내세의 행복의 비결, 그 공식을 봅니다. 하느님의 뜻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포용하고 자기 뜻을 하느님 뜻에 일치시키는 것, 한 마디로, 적극적인 의지의 행위로써 하느님의 뜻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강조합니다만, 이것이 기쁨과 평화의 그르칠 수 없는 비결입니다.

그대가 하느님의 은총에 흠뻑 젖고 취해 있음을 그대는 얼마나 자주 깨닫습니까. 그 은총에 보답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죄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유혹을 받을 때는 희망의 덕을 실천하면서 이렇게 말해 보십시오. “내가 안식을 취하고 기쁨을 누릴 영원한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충만한 믿음으로 일을 통해 휴식을 취하고 고통을 통해 기쁨을 누려야 한다. 천국의 사랑은 어떠할까?”

더 좋은 것은, 그대가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대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저의 하느님, 저의 사랑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인데, 상도 없고 벌도 없다는 듯이 모든 일에서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지향이 바르지 못하다는 걱정스러운 생각이, 때로는 번개처럼, 때로는 쫓아내도 계속 날아들며 성가시게 구는 더러운 파리처럼 그대 머릿속에 떠오를 때마다, 곧장 지향을 똑바로 하고 그분을 위해 그분과 함께 평온하게 일을 수행하십시오.

이와 함께 비록 입술로만 읊조린다는 생각이 든다 해도, 이렇게 천천히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의 영광을 위하고 당신의 사랑을 위한 것이 되게 하십시오.”

여기에 있으나 선교지(중국)에 있으나 마찬가지라고 그대는 말합니다.

어디에 있든지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이행하도록 노력하십시오.

많은 사람이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걷는 것 또한 그대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대가 접촉하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들의 수호천사에게 맡기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수호천사들은 그 사람들이 선하고 충실하고 기쁘게 살아가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또 때가 되면,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아들이신 하느님, 성령이신 하느님과 성모 마리아께서 영원한 사랑으로 포옹해 주실 것입니다.

밀알처럼, 우리는 죽어야 많은 결실을 낼 것입니다.

그대와 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깊고 빛나는 고랑을 매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가련한 육신을 뒤로 한 채 영의 들판에 뛰어들어, 인간이 하는 모든 일과 그 일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에게 초자연적 의미를 제시해야 합니다.

예수님, 저의 분심을 바꾸어 주십시오. 제가 당신과 대화할 때 세상을 떠올리지 않게 해주시고, 제가 세상사를 다룰 때 당신을 떠올리게 해주십시오.

그대는 너무나 많은 빛을 보아서 조금 두려워했습니다. 너무나 밝아서 쳐다보기가 힘들고 심지어 빛인지 헤아리기조차 어렵다고 생각했군요.

그대의 명백한 비참함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리십시오. 대신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향해 그대 영혼의 눈을 뜨십시오. 그대의 영적 지도자가 누구이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그대를 인도하시도록 하면서 계속 나아가십시오.

관대해지십시오. 예수님께 어떤 위로도 청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그 이유를 묻습니다. 하느님은 아주 멀리에 계시는 것 같지만, 참으로 우리 영혼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으시고는 우리 삶 전체를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을 그대가 아주 알 알기 때문이라는 게 나의 대답입니다.

나는 그대에게 말했습니다.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도 다음과 같은 말로 나를 감동하게 했다고 말입니다. “사실 나는 거룩한 영혼들이 행복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들은 지상의 것들을 넘어서는 시각으로 사건들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의 눈으로 봅니다.”

나는 나중에 이렇게 덧붙였지요. 복되신 삼위일체께서 그대를 대하시는 그 특별한 사랑에 응답할 수 있도록 그대도 이런 시각을 놓치지 말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원한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영혼에 두고자 하신 그 영원한 신적 빛으로 사람들의 일과 삶을 힘차게 비추는 데 공헌할 것임을 단언합니다.

그러나 성 요한이 가르치듯이 “예수님 안에 산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 길은 언제나 영광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희생을 통해야 하는 길입니다.

가짜 사도의 빛을 보고 그 빛에 다가가 어둠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이들은 얼마나 실망했을까요! 그들은 그 빛에 도달하려고 달렸습니다. 달려가다가 몸에 생채기도 났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 빛을 갈망하다가 영혼에 상처도 입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 가짜 사도 곁에 와 보니 춥고 어둡습니다. 그 추위와 더움은 한때 그 거짓 이상을 믿었던 사람들의 부서진 마음을 얼어붙게 할 것입니다.

그 가짜 사도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자신의 육체를 저 타오르는 불과, 사랑의 놀라운 보석과 바꾸려고 온 그 사람들은 실망해서 왔던 땅으로 되돌아갑니다. 상심한 마음으로, 더는 마음이 아닌 마음을 안고 돌아갑니다. 어둠으로 덮인 얼음 조각에 불과한 그들의 마음이 결국에는 그들의 정신을 흐릿하게 할 것입니다.

그대, 모순덩어리인 거짓 사도. 그대가 한 일을 살펴보시오. 그대 입술은 그리스도를 담고 있으나 행동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에게 없는 빛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대에게는 사랑의 따뜻함이 전혀 없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사람들은 항상 눈밖에 두면서 바깥의 사람들을 걱정한다고 떠들어댑니다. 그대는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리고 거짓은 마귀의 여식입니다. 그래서 그대는 마귀를 위해 일하면서 스승을 따르는 이들을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또 설사 그대가 여기 지상에서는 종종 승리할지 모른다 치더라도, 우리의 벗 죽음이 오는 그날에 그대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그대는 그대가 한 번도 속이지 못한 심판자의 진노를 보게 될 것입니다. 모순덩어리라니, 아닙니다, 주님. 모순투성이라니요? 절대로 아닙니다!

굴욕을 겪으며 십자가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불멸하는 영광으로. 이것이 안전한 길입니다.

그날 그 사도의 서간은 나를 얼마나 기쁘게 해주었는지요! 성령께서는 성 바오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불멸과 영광의 비결을 가르쳐 주십니다. 모든 사람은 살기를 갈망합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매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것을 행복하다고 여깁니다. 우리는 우리가 한 일을 영광스럽게 기념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의 이상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하다고 여길 때, 가 비참함에서 위로를 받을 때, 우리 모두 ‘영원히’ ‘영원히’ 하고 말하면서 바라는 것입니다.

오 악마의 지혜여! 악마는 인간의 마음을 얼마나 잘 알았던가! 그자는 우리의 첫 조상에게 “너희는 신들처럼 되리라” 하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끔찍한 속임수였습니다. 성 바오로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이 서간에서 불멸과 영광의 얻을 신묘한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필리 2,7-10)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과 최후의 승리에 동참하려면 먼저 주님의 희생 제사에 참여하여 골고타에서 돌아가신 그분과 하나가 돼야 합니다.

주의를 산만하게 하지 말고 상상을 부풀리지 마십시오. 조용히 거두어 그대의 내면으로 들어가십시오. 하느님께 아주 가까이 머물게 될 것입니다. 그대 자신에게 집중하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의 귀에, 모든 사람의 귀에 이 말을 되풀이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신앙을 가진 죄인은 설사 지상의 모든 복을 얻었다 해도, 반드시 불행하고 비참할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비록 가벼운 죄라고 할지라도 미워해야 하는 이유는 초자연적이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악은 무한한 선에 반대되는 것이기에 하느님께서는 죄를 무한히 증오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극도로 영원히 죄를 미워하십니다. 또 그것은 필요한 미움입니다. 하지만 내가 지적했듯이, 가벼운 죄라도 경계하는 것이 우리를 무한히 선하신 하느님께 인도할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고행을 실천한 만큼, 그대는 성덕을 쌓게 될 것입니다.

극심한 박해가 일어났을 때, 그 사제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하느님을 모독하는 저 불길이 타오를 때마다 사랑과 대속(代贖)이 불길이 제 안에 더 타오르게 하소서.”

사도직의 아름다움, 위대함과 효과를 생각하면서 장차 그대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먼 길(長途)을 떠올린다면 필시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를 기다리는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리고 그대는 예수님의 종으로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 무척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그대는 십자가와 고통, 사랑과 영혼들에 대한 크나큰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심코 본능적인 몸짓에서―그게 사랑이지요.―그대는 두 팔을 뻗고 두 손을 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당신의 복된 십자가에 그대를 묶어 당신 종이 되게 하십니다. 종이 되는 것, 그것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대의 입술에서 나온 열렬한 간구에 감동했습니다.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의 눈에 들고 싶을 따름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저와 상관이 없습니다. 원죄 없으신 성모님, 제가 오직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소서.”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범하기보다 죽기를, 천만번 죽기를 원한다고 온 마음으로 청하십시오.

이렇게 청하는 것은 죄에 대한 벌 때문이 아니라―우리는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예수님께서 그대에게 그토록 좋으신 분이셨고 또 좋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저의 하느님, 언제 제가 당신으로 인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될까요? 아무리 잘 생각해 보아도, 주님, 지속적인 상급은 당신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보상으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시편 작가가 이렇게 노래했지요.

사랑은 영으로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한을 갈망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크고 작은 일에서 영원을 갈망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 저는 당신의 관대하심에 한계를 두고 싶지 않기에 장차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대 친구의 저 성찰을 그대 자신의 것으로 만드십시오. 그 친구는 이렇게 썼습니다. “저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면의 기쁨으로 가득 차서 거리에서 ‘아버지! 아버지!’ 하면서 크게 외치고 싶었습니다. 제가 하느님의 자녀임에 감사드린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도록 말입니다. 비록 큰 소리로 외치지는 않았지만, 저는 낮은 소리로 ‘아버지!’ 하면서 많이 불렀습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셨으리라고 크게 확신합니다.

저는 다른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기만을 원할 따름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위한 것입니다. 제가 만일 구원받고 성화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임을 제가 알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말씀드리거니와 저는 결코 상에 눈독을 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사랑을 위해서지요!”

제가 영적으로 돌보던 한 여자 교우는 병중에서도 그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사랑했던지요! 길고 고통스러운 합병증으로 몸에 성한 곳이 없었지만, 그녀는 이것이 예수님의 축복이자 그분의 특별한 사랑의 표시로 보았으니까요. 비록 겸손하게 자신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하곤 했습니다만, 그녀의 온몸을 엄습한 그 끔찍한 고통은 벌이 아니라 자비였습니다.

우리는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관해서도요. 물론 예수님과 성모님에 관해서도 이야기했지요. 천국에서는 여기 지상에서보다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하게 될까를 두고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기쁨에 차서 “오늘이 그날이라면!” 하고 외쳤습니다. 죽으면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기쁨으로 죽음을 관조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벗이니까요!

죽음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하십시오. 종종 그대의 무덤을 들여다보십시오. 그대가 죽은 지 여드레가 지난 그 무덤에서 그대의 썩어가는 주검을 쳐다보고 만져보고 그 냄새를 맡아보십시오.

특히 육신의 충동으로 괴로울 때 이를 명심하십시오.

그는 자신의 영혼을 내게 드러내 보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즈음에는 죽음을 안식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저의 죄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그리고 ‘당신은 죽을 때가 됐습니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저는 ‘살 때가 된 것입니다.’ 하고 기쁘게 응답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죽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믿음을 지닌 사람이 어떻게 죽음을 두려워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주님께서 그대가 이곳 지상에서 계속 살기를 원하시는데 죽기를 원하는 것은 비겁합니다. 그대는 살아야 합니다. 살아서 고통을 겪으며 사랑을 위해 일하십시오. 그것이 그대의 몫입니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죽음의 순간을 떠올리십시오. 그러면 날마다 일어나는 일들을 죽음의 순간에 비추어 숙고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한 평화를 그대는 잘 체험하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나는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나 어디에서나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일찍 죽는 것은 너무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많은 날을 하느님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자 일하고 싶어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죽는 것? 얼마나 편한가! 나는 거듭 말합니다.

저 거룩한 주교님께서 연로하셔서 병이 들었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제가 쓸모가 있는 한, 살아서 당신을 위해 계속 일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대도 그렇게 말씀드립시오.

공로를 쌓기 위해서 또는 연옥의 형벌이 두려워 뭔가를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이, 제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이제부터 항상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피할 수 없는 좋은 자매인 죽음이 그대를 하느님께 인도하고자 찾아왔을 때 지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해 있지 않도록 간절히 바라십시오.

그대가 생명을,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얻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그대는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의 배에서 빠져나와서는 안 됩니다. 보십시오. 만일 그대가 배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다면, 그대는 파도를 헤쳐가야 할 것이고 결국 바다에 빠져 죽게 될 것입니다. 더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못하고 그분과의 우정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 우정은 그분께서 그대에게 제공하셨다는 것을 그대가 깨닫고 자진해서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몸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다른 이들이 비록 이 지상의 고난이라 할지라도 고난을 피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섬기는 데서, 곧 자발적으로 모든 영혼을 섬기는 데서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잘 자신을 통제하는 길은 없습니다.

이것이 지상과 천상 모두에서 가장 큰 영예를 얻는 길입니다

고통과 박해에 직면했을 때 초자연적 감각을 지닌 한 영혼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연옥에서 얻어맞기보다는 차라리 여기서 얻어맞겠습니다.”

내가 사랑한다면, 내게 지옥이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 덕분에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요! 하느님의 영광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요!

그대가 진정 영원한 생명과 영예를 얻고자 한다면, 그대의 고상한 개인적 야망들을 배제하는 법을 여러 가지로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대의 건강에, 이름에, 경력에, 직업에, 그대가 취하는 매 단계에 ‘그대’를 집어넣지 마십시오. 얼마나 성가신 일입니까! 그대는 그대가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그분의 것임을 잊어버린 듯합니다.

그대가 온종일―어쩌면 이유 없이―굴욕을 당했다고 느낄 때, 그대의 의견이 우세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매 순간 그대의 ‘자아’가 ‘나의 이것’ ‘나의 저것’ ‘나의 또 다른 어떤 것’ 하면서 계속해서 고개를 쳐들 때, 그대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음을, 시간을 죽이고 있음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그대가 해야 하는 것은 그대의 이기심을 죽이는 것임을 깨달으십시오.

칭찬받으려고 하지 말고, 또 마땅히 칭찬받을 만하다고 해도 칭찬받으려 하지 말 것을 그대에게 권고합니다. 드러내지 않고 지나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또 우리의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행동이나 생활도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작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요!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

비탄의 때에, 저 영혼은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저의 예수님, 제가 가진 것이라곤 명예밖에 없는데, 저의 명예 외에 제가 당신께 드릴 수 있는 게 무엇이란 말입니까? 제게 행운이 왔다면, 그것을 드렸을 것입니다. 제게 여러 덕이 있었다면, 그 덕들을 하나하나 쌓아 당신을 더 잘 섬겼을 것입니다. 제가 가진 유일한 것은 저의 명예였는데, 그것을 당신께 드렸습니다. 찬미 받으소서! 그것이 당신 손안에서 안전했음이 분명하오니!”

저는 진흙에서 생겼으며 땅은 제 모든 혈통의 유산입니다.

하느님 아니시라면 마땅히 찬미 받으실 분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대가 안에서 끓어오르는 자부심―교만!―을 느껴 자신을 슈퍼맨으로 여길 때, ‘아니야!’ 하고 소리칠 때가 온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그대는 오류를 범하면서도 선행을 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선한 하느님 아들이 누리는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바다의 별이신 성 마리아, 우리의 길잡이가 되소서!

이것을 확실하게 요청하십시오. 지극히 감미로우신 마리아의 마음을 난파시킬 수 있는 폭풍우는 없기 때문입니다. 폭풍우가 오는 것을 보고 튼튼한 피난처이신 마리아에게서 안전함을 구한다면, 요동치거나 침몰할 위험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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