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승리

복되신 동정녀를 본받으십시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온전히 인식할 때만이 우리는 창조주의 눈에 소중하게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젊은 사도 요한이 십자가에 계신 그리스도 곁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성모님의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성모님의 사랑은 그 얼마나 강력한지요!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닮지 않는다면, 그분이 겸손하셨듯이 겸손해지지 않는다면, 진실로 초자연적이며 인간적 기쁨, 진정 좋은 유머를 절대로 얻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을 성실하게 다른 이들에게 내어주는 것은 큰 효과를 내기에 하느님께서는 기쁨에 찬 겸손으로 보답해 주십니다.

모욕을 당하고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감추고 사라지는 일은 전적이어야 하고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진정한 겸손.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기에 모욕을 당하는 데서 기뻐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저의 예수님. 제 것은 당신 것입니다. 당신 것이 제 것이고 저는 그것을 당신께 넘겨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 진실이 훼손되지 않은 문제들에서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요청하시는 굴욕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그대는 겸손의 덕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만은 애덕을 무디게 만듭니다. 그대 자신과 모두를 위해 날마다 겸손의 덕을 주님께 청하십시오. 제때에 바로잡지 않는다면 시간이 가면서 교만은 불어만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른 노릇을 하려 드는 것보다 더 불쾌한 일이 또 있을까요? 어린아이에 불과한 가련한 인간이 교만에 잔뜩 부풀어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기고 자기 자신만을 믿으며 ‘어른처럼 행동’한다면, 어떻게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겠습니까?

틀림없이 그대는 단죄받을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다고 그대는 확신합니다. 온갖 악의 씨앗이 그대 마음속에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만일 그대가 하느님 앞에 어린아이가 된다면, 그로 인해 그대는 하느님 아버지와 성모 마리아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 요셉과 그대의 수호천사는 그대가 어린아이인 것을 보게 되면 그대를 보호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을 지니십시오. 할 수 있는 만큼 많이 하십시오. 참회하고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그대에게 부족한 것을 그분들이 주실 것입니다.

겸손하게 살아가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래서 널리 알려진 그리스도교의 지혜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만은 교만한 사람보다 하루를 더 살다가 간다.”

그러므로 그대의 영혼을 지도하도록 특별한 은총을 하느님께 받은 사람이 그대를 두고 하는 말과는 달리 그대 자신이 옳다는 생각이 들 때는, 그대가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시오.

어린이들을 양육하고 병자들을 사랑으로 보살피십시오.

단순한 영혼들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지성의 눈높이를 낮춰야 합니다. 가난한 병자들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마음이 겸손해야 합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 모두를 낮추면 우리는 인간의 초라함, 우리 자신의 초라함이라는 저 확실한 길을 따라 예수님께 이르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때, 하느님께서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토대로 일하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결심: 정말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절대로 나의 개인적인 일을 이야기하지 않기.

그대에게 확신을 주시는 예수님께 감사드리십시오. 그대를 바위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것은 고집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빛입니다. 선량하지만 믿음이 없는 다른 사람들은 슬프게도 모래 속으로 가라앉아 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대의 삶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삶에도 믿음의 덕을 주시도록 주님께 청하십시오.

제가 달리 처신한다면, 제 성격을 더 잘 조절한다면, 주님께 더욱 충성한다면, 주님, 당신께서는 얼마나 놀랍게 저를 도우실까요!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그대의 영혼에 속죄하고자 하는 갈망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대가 보잘것없는 개인적 속죄 행위를 예수님의 무한한 공로에 합친다면, 그대의 그 갈망이 충족될 것입니다.

그대의 지향을 바로잡으십시오. 그리고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그분을 통하여 고통을 사랑하십시오.

그대가 진보했는지 또는 어느 정도나 진보했는지를 그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것을 알아야 하는지요?

중요한 것은 그대가 항구하게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대의 마음이 불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대가 더욱 빛을 받아서 더 먼 지평을 보는 것입니다. 그대가 우리의 지향을 이루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설사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해도, 그 지향을 그대 자신의 지향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예수님, 제 정원에는 제대로 된 꽃이 한 송이도 없습니다. 모두 병이 들었네요. 모두 빛깔을 잃고 향기를 잃은 것 같습니다. 가련한 저! 오로지 땅 위 쓰레기 더미에 얼굴을 처박고 있습니다. 그게 제 자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길입니다.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분께서 그대를 차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는 승리할 것입니다.

그대가 이렇게 결론을 내렸을 때 나는 잘 이해했습니다. “결국, 저는 당나귀만큼도 되지 못했습니다. 당나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분을 태웠지만, 저는 가장 가난한 넝마주이조차도 무시해 버릴 역겹고 더러운 넝마 더미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그대를 선택하셨고 그대가 당신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이유에서 그대가 자신을 그토록 가련하게 여기는 것은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그대를 부르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겸손하고 환희에 찬 마리아의 노래인 ‘마니피캇’은 주님께서는 어린아이같이 되는 이들, 자신을 낮추어 정말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이들에게 무한히 관대하심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어떤 특별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세상 사람들이 좋은 일 또는 나쁜 일이라고 부르는 것에 개의치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당신께 감사드리는 ‘테 데움(Te Deum)’을 바침으로써 당신의 선하심을 인정하는 이들을 아주 기뻐하십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손길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끌질이 우리를 아프게 하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모난 구석을 다듬어 더 완전하게 되도록 하시는 사랑의 표시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적절한 수단을 쓰려고 노력합니다.

내가 몇 세기 전에 살았더라면 필시 깃펜에 잉크를 사용해 필기했을 것입니다만 현재는 만년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고자 하실 때 부적절한 수단을 선택하십니다. 내가 거듭거듭 그대에게 말한 것을 기억합니까?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그대와 나, 우리의 비천함이 지니는 엄청난 무게를 아는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주님, 제가 비록 비천하지만, 당신 손에 들린 신성한 도구임을 잊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크고 작은 모든 노력을 아버지이신 하느님, 아들이신 하느님, 성령이신 하느님을 위해 봉헌할 것입니다.

명민한 대학생 네 명이 기쁘게 학생 기숙사의 가구를 옮기면서 한 일을 떠올리면 감동적입니다. 두 명은 공학도였고, 두 명은 건축학도였는데, 교실에 칠판을 옮긴 후에 “모든 것은 하느님을 영광을 위하여!”라고 쓴 것입니다.

예수님, 저는 예수님께서 크게 기뻐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대는 어디에 있든지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분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나 달리 행동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인 우리에 대한 특별한 권리를 갖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당신 사랑에 우리가 응답하기를 요구하실 권리입니다. 이 진실은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책임을 부과하면서 우리가 하느님 손에 든 연장임을 완전하게 깨닫게 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날마다 이 연장에 의존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하느님을 섬기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연장들이 잘 갖춰져 준비돼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대는 언제나 만반의 태세를 갖추도록 하십시오.

성모송을 바칠 때마다, 동정 마리아께 인사를 드릴 때마다 심장이 사랑으로 새롭게 고동친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 곧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렇게 평범해야 합니다.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똑같은 일들을 날마다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 매 순간에 작은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세상 안에서 우리의 거룩한 사명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의무를 이행하려고 노력하지만 때로는 완수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양심 성찰을 하면서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오늘 당신께 바칠 덕행이 없습니다. 결점만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 은총으로 저는 승리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대의 죄에도 불구하고(다시는 예수님을 거슬러 죄를 짓지 말기를!) 당신의 자비로 그대가 하느님의 뜻을 사랑하는 복된 삶을 늘 살도록 해주시기를 나는 온 마음으로 바랍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중요하지 않은 일은 없습니다. 모두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중요한지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영적 수준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작은 것들도 보살피신다는 깨달음이 그대에게 기쁨을 주지 않습니까?

그대가 진심으로 그분의 것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그분께 다시 보여드리십시오. “오, 예수님, 저를 도우소서. 저를 참으로 당신의 것으로 삼으소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보잘것없는 것들을 통하여 제가 불타올라 다 타도록 하소서!”

거룩한 묵주기도. 동정 마리아 생애의 환희와 고통과 슬픔과 영광이 찬미의 관을 엮습니다. 이를 천사들과 하늘의 성인들이…그리고 여기 땅 위에서 성모 마리아를 사랑하는 이들이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바칩니다.

이 거룩한 신심을 매일 실천하고 전파하십시오. (호세 마리아 성인 당시에는 묵주기도가 환희, 고통, 영광의 세 신비로 이뤄져 있었다. 오늘날과 같이 환희의 신비 다음에 빛의 신비가 추가된 것은 200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서다-옮긴이.)

세례는 우리를 충실한(fideles, 믿음 있는) 이들, 곧 신자들이 되게 합니다. (라틴어 fideles, 스페인어 fieles는 ‘충실한, 믿음이 있는’이라는 뜻의 형용사이지만 또한 복수로 ‘신자들’을 가리킬 때도 사용한다-옮긴이) 이것은 성도들(sancti, 성인들)란 단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서로를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들은 오늘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충실한 이들(신자들)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이에 관해 생각해 보십시오.

관대함에 있어서 그 누구도 하느님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잘 명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의탁하는 이들에게 성실하십니다.

자신을 내어놓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많은 영혼이 드러나지 않은 내적 삶에서 자신을 내어놓습니다. 주님만이 빛나시도록 하려고 말입니다.

나는 그대와 내가 성가정 축일에 하느님께 아주 가까이 가기를 원했던 그 사람처럼 행동하기를 원합니다. 당시에 성가정 축일은 주님 공현 팔일 축제 중에 지냈습니다.

“제게는 작은 십자가가 많이 있었습니다. 어제는 그 가운데 하나가 저를 너무 아프게 해서 저는 울었습니다. 오늘 그 십자가로 저는 아버지 성 요셉과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서 당신들의 이 자식이 성탄 선물 없이 지내도록 하지 않으시라는 것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 선물은 제가 예수님께 배은망덕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 빛이었습니다. 저를 당신의 도구로 쓰시길 원하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을 저의 돼먹지 못한 처신으로 거스르려 했던 엄청난 잘못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 거룩한 여인들은 무덤에 도착해서는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일은 항상 일어나지요! 해야 할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면, 어려움을 쉽게 극복하게 됩니다.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그 어떤 일에도 효과를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어떤 명령을 받았을 때 그 누구도 그대보다 더 잘 순종할 수 없을 정도로 하십시오. 춥거나 덥거나, 의욕이 있을 때나 지쳤을 때나, 젊거나 나이가 들었거나 간에 한결같이 순종하십시오.

“순종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명령하는 법을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12개를 내놓을 수 있는데 4개를 내놓는 사람을 두고 만족스러워하는 지도자는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그대는 언제나 큰 사랑으로 순종해야 하고 또 명령해야 합니다.

그대의 기도로 나를 도와주십시오. 나는 거룩한 교회 안에 있는 우리가 모두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한 몸의 지체들이라는 것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리가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자모이신 로마 교회의 기쁨과 어려움, 그리고 발전에 큰 관심을 지니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나는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고 또 모두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아들이여, 교회 안에서 분열은 죽음임을 깨달으십시오.

어머니인 거룩한 교회 안에서 모든 이의 마음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처럼 한마음이 되도록 해달라고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그리하여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라는 성경 말씀이 세상 끝날까지 참으로 실현되게 하십시오.

나는 그대에게 진지하게 말합니다. 이 거룩한 일치가 그대로 인해 훼손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것을 그대의 기도로 삼으십시오.

로마 교황님께 충성하는 데에 꼭 필요한 한 가지는 교황님의 생각을 아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당신의 생각을 회칙이나 다른 문헌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든 가톨릭 신자가 교황님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듣고 그 가르침들을 삶에서 일상 행동으로 실천하도록 도와주고자 우리의 몫을 해야 합니다.

나는 우리에게 언어의 은사를 주시도록 온 마음으로 주님께 날마다 기도합니다. 이 언어의 은사는 여러 언어를 아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수준에 맞추는 법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대중이 이해하도록 속되게 말하는”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이해할 수 있게 분명한 그리스도교적 언사로 지혜롭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주님과 주님의 복되신 어머니께 자녀들을 위해 청하는 언어의 은사입니다.

악의적인 극소수와 무지한 다수. 하느님과 교회의 원수가 이렇습니다.

악인들을 타파하고 무지한 이들을 계몽합시다. 하느님의 도우심과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는 세상을 구원할 것입니다.

모든 지적 활동 분야에 참다운 그리스도교적 양심을 갖고 일관된 삶을 살며 인류와 교회에 봉사하고자 과학의 무기를 사용하는 올곧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오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거짓을 꾸며서라도 과학적 지식을 활용해 그리스도와 그분에게 속한 이들을 박해하려는 새로운 헤로데들이 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과제가 얼마나 큰지요!

그대가 하는 활동은 전부 영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영혼을 대상으로 하는 일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차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어려움이 극복될 것입니다.

이 진실을 확인하고자 시편 저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들을 비웃으시리니, 저들을 빈털터리로 만드시나이다.”

이 말씀은 다른 말씀을 확인하게 해줍니다. “하느님의 원수들은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저들은 교회를 거슬러 또 교회에 봉사하는 하느님의 도구들을 거슬러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는 흘러넘치는 놀라운 사랑으로 로마에서 땅 끝까지 온 세상에 복음의 씨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을 위해 이 복음의 씨를 전파하는 일에 협력할 때, 그대는 땅 끝에 있는 이들을 교황님께 인도하십시오. 온 세상이 하나의 양 떼와 하나의 목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곧 하나의 사도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길 원합니다. 하느님의 모든 영광을 위하여!

이것이 그리스도의 무기로 무장하여 전투를 치르고 승리하려는 이상(理想)입니다. 이 이상은 오직 기도와 희생, 믿음과 사랑을 통해서 실현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하십시오. 신뢰하십시오. 고난을 겪으십시오. 그리고 사랑하십시오!

교회의 일은 하루하루가 마치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거대한 직물을 짜는 일과 같습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교회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충실하게 헌신적으로 우리 과제를 수행한다면, 이 거대한 직물은 흠 없이 아름다울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 여기에 있는 실 한 올을 풀어버리고, 저기에 있는 또 다른 한 올을 풀어버리고, 반대쪽에 있는 실 한 올을 또 풀어버리고…이런 식으로 계속한다면, 우리는 아름다운 직물 대신에 너덜너덜한 누더기를 갖게 될 것입니다.

왜 그대는 형제애로 교정해 주려고 결심하지 않습니까? 교정을 받을 때 적어도 처음에는 아픔을 겪는데 자기를 낮추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형제애로 바로잡아 주는 일은 언제나 힘듭니다. 누구나 이를 압니다.

기도와 좋은 표양을 보여준 후에, 형제애로써 교정하는 일은 그대가 도와줄 수 있는 최상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대를 신뢰하시어 교회로 데려오셨으니 그대는 성숙한 인간이 지니는 중용, 평정, 강함, 인간적이고 초자연적인 분별을 갖춰야 합니다. 이런 특질들은 많은 사람이 오랜 세월을 거쳐야 얻을 수 있습니다.

교리문답에서 배웠듯이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임을 그대는 잊지 마십시오.

그대는 강한 사람이 되길 원합니까? 그렇다면 자신이 아주 약하다는 것을 먼저 깨달으십시오. 그런 후에 그대의 아버지이시고 형이시며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신뢰하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강하게 만드시고 이길 수 있는 수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성사들이 그것입니다. 성사 생활을 하십시오.

그대가 내게 “거룩한 미사 전례에 푹 잠기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나는 그대를 아주 잘 이해했습니다.

거룩한 전례에 대한 신심은 얼마나 값진지요!

며칠 전 누가 내게 최근에 세상을 떠난 한 모범적인 사제에 관해 “그분은 대단한 성인이셨어요!” 하고 말했을 때,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 사제를 잘 아십니까?” 하고 내가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아니요.” 하면서 “딱 한 번 미사를 거행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그대는 교회의 거룩한 전례를 살아야 합니다. 사제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하도록 정해진 날에 또 새 사제들이 성품성사를 받는 날에, 그런 지향으로 참다운 관심을 가지고 사제들, 특히 새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하십시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한마음 한뜻이 되고 한 정신이 되게 해달라는 목적으로 기도하고 보속하고 행동하십시오. 이것은 우리가 모두 교황님과 일치하여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아들이여, 그대는 나를 기쁘게 하고자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군요.

주님께서 그대에게 만족하신다면, 나도 만족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그대에게 만족하시는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것은 그대 마음속의 평화와 기쁨입니다.

하느님 사람의 명백한 특징은 그 영혼의 평화입니다. 그 사람은 ‘평화’를 지니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줍니다.

증오심에 찬 저 가련한 이들에게 대응하는 법을 익히십시오. 그들이 그대에게 돌을 던질 때, 그대는 그들에게 ‘성모송’으로 화답하십시오.

그대의 일이 지금 당장은 쓸모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대가 뿌리고 있는 씨앗이 거룩함의 씨앗이라면 잃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이들이 추수 때에 수확할 것입니다.

비록 기도에서 빛을 별로 얻지 못한다 해도, 답답하고 메마르게 느껴진다 해도, 신심 생활의 세세한 모든 면에서 항구하며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그대는 확실하고 늘 새로운 안목으로 숙고해야 합니다.

그대는 성장했습니다. 사도직의 어려움을 대하고는 이렇게 기도했지요. “주님, 당신은 언제나 한결같으십니다. 당신의 은총에 부응할 줄 알았고 당신의 이름으로 큰 기적들과 정말 경이로운 일들을 행한 이들의 믿음을 제게 주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기도를 마쳤지요. “저는 당신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저는 또한 우리가 당신께 청하고 당신을 찾기를 원하신다는 것도 압니다. 당신께서는 우리가 당신 마음의 문을 힘차게 두드리기를 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그대는 겸손하고 신뢰에 찬 기도에 항구하게 인내하려는 결심을 새롭게 했지요.

그대는 순경에서나 역경에서나 거듭해서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제가 주님을 떠나도록 놔두지 마십시오. 저를 떠나지 마십시오. 철부지 아이를 대하듯이 저를 도와주십시오. 언제나 제 손을 잡아 이끌어 주십시오!”

거대한 격류라 하더라도 사랑의 불을 끌 수는 없었습니다. 그대에게 이 성경 말씀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제시합니다. 첫째 해석은 과거에 그대가 많은 죄를 지었다 해도 완전히 회개한 이상 그 죄들이 그대를 우리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둘째 해석은 그대가 겪을지 모르는 오해와 반대의 물결에 그대의 사도직 활동이 지장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들이여, 끝까지 일하십시오, 끝까지!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는 필요한 수단이 있습니다. 그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끝낼 것입니다. 건물의 꼭대기를 마무리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그분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불가능을 늘 극복하게 될 것이니까요.

우리가 초자연적 비전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때로는 바로 앞에 닥친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여,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더 많이 활동하십시오. 그리하면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그대의 문제들을 계속해서 해결해 주실 것이 확실합니다.

하느님의 일상적인 안배 자체가 하나의 끊임없는 기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필요하실 때는 특별한 수단을 쓰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낙관론은 달콤한 낙관론이 아니며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인간적인 확신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낙관론은 자유를 의식하는 데에, 그리고 은총의 힘을 확실히 아는 데에 뿌리를 둔 낙관론입니다. 매 순간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각성하고 분투하게 하는 낙관론입니다.

주님께서 승리하신 날, 부활하신 그날이 최종적입니다. 권력자들이 세워둔 경비병들은 어디 있습니까? 무덤을 막은 돌에 붙여 놓은 봉인은 어디 있습니까? 스승님을 심판한 자들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의 승리 앞에 저 불쌍하고 가련한 이들이 모두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대는 희망에 차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승리하십니다.

만일 그대가 마리아를 찾는다면 반드시 예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성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한층 더 깊이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대가 사도직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면, 하느님을 찾았던 어떤 사람의 다음과 같은 말을 그대에게 적용하십시오. “오늘 사제들을 위한 피정 지도를 시작합니다. 많은 결실을 거두게 해주십시오. 첫 번째는 저 자신을!”

나중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 날 이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120명이 피정 중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영혼에 좋은 일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들이여, 겸손하고 복종하며 충성하는 것, 하느님의 영에 잠기는 것, 그리하여 그대가 처한 자리에서, 그대의 일터에서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영을 전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전쟁 중에 적과 마주하고 있는 병사들의 용기는 탄약과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하는 비전투 요원들이 없다면 아무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의 기도와 희생의 도움 없이는 진정한 사도직 활동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기적을 행하는 힘!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서 활동하시게 해드린다면, 그대는 얼마나 많은 죽은 영혼들을, 심지어 썩어가고 있는 영혼들을 살리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지나가고 계셨고 사람들, 병자들이 주님을 부르며 찾았다고 복음서는 당시 상황을 이야기해 줍니다. 지금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그대 안에서 그냥 지나가고 계십니다. 그대가 그분을 도와드린다면, 많은 사람이 그분을 알고 그분을 부르며 그분께 도움을 청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이로운 은총의 빛에 그들의 눈이 뜨일 것입니다.

그대는 그대 나름의 길을 가겠다고 고집하는군요. 그러면 그대의 일은 아무런 결실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순종하십시오. 온순해지십시오. 기계의 각 바퀴는 제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계가 작동을 멈추거나 부품이 손상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품을 생산하지 못하거나 기계 작동이 형편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합당한 활동 분야를 벗어나면 사도직의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방해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사도는 주님께서 자신을 활용하여 활동하시도록 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었습니다.

첫 열두 사도 역시 자신들이 복음을 전한 그 땅에서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맞닥뜨린 사람들의 세계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완전히 대치되는 토대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이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의 구원 메시지가 자신들에게 맡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도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행동하면서 알아채지 못하게 지나감으로써 사람들이 그분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공동구속자의 삶을 효과적으로 또 항구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사도직 활동을 할 때 강력한 조명 장치와 같아야 합니다. 강력한 조명 장치는 자신이 밝히는 세상을 빛으로 가득 채우지만, 그 자체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내 말을 듣는 사람이다.”

그대는 아직도 그대의 말이 사람들을 설득시킨다고 여깁니까? 성령께서는 가장 쓸모없는 도구로도 당신의 계획을 이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그대는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하느님 자녀들에게 얼마나 적합한 말씀을 남기셨는지요! 성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타실, 어미 나귀에 매여 있는 어린 나귀의 줄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 줄은 주님의 명령으로만 풀 수 있는데 사도들의 손에 그 줄이 풀렸습니다. 이와 같은 일을 하려면 특별한 삶의 방식과 특별한 은총이 필요합니다. 사로잡힌 이들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그대 또한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 대목을 그대에게 다시 한번 언급하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승리를 위해 필요로 하시는 영혼들을 그들의 굴레로부터 풀어주어야 할 것인지요! 우리의 손이 사도들의 손이 되고 우리의 행위가 사도들의 행위가 되고 우리의 삶이 사도들의 삶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도 사도의 은총을 주시어 묶인 이들의 차꼬를 부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를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우리 것으로 여겨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지나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을 같이하고 생각을 같이하고 뜻을 같이해서 그분 가까이 갈 때 그분께서는 영혼들을 변모시키십니다. 곧 착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주십니다. 하지만 그 일을 하시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그대도 아니고 나도 아닙니다. 곁을 지나가고 계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때 그분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그대의 마음 안에, 또 내 마음 안에―그리고 우리의 감실 안에 머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나가시다가 머무시러 오십니다. 그분은 그대들 안에, 그대 각자 안에, 그리고 제 안에 머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과 함께 공동구속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놀라운 일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시고자 주님께서는 복음사가들을 움직이시어 놀라운 일들을 대단히 많이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무엇으로나 빵이 되게 할 수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협력을 구하셨습니다. 그분은 한 어린이, 한 소년, 빵 몇 개와 물고기 몇 마리가 필요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대와 내가 필요하다고 보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분의 은총에 부응하여 관대해져야 합니다.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비록 사소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대가 주님을 도와드린다면, 주님께서는 기꺼이 기적들을 행하실 것입니다. 빵을 많게 하시고 생각을 바꾸게 하시며 캄캄한 지성에 빛을 주시며, 한 번도 올바르게 살지 못했던 이들이 특별한 은총으로 올바르게 살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분을 도우려 한다면, 그분께서는 이 모든 것을…그 이상을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시신이 되셨습니다. 그 거룩한 여인들은 기대할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저들이 그분을 얼마나 모질게 대하고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았는지를 보았습니다. 저 고통스러운 수난의 폭력이 생생하게 살아있었습니다.

그 여인들은 또한 경비병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덤이 봉인되어 닫혀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치워 줄까요?” 하고 여인들은 서로 물었습니다. 거대한 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들은 그분과 함께 있고자 그리로 갔습니다.

보십시오. 크고 작은 어려움을 당장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있다면, 이런 장애물들에 신경 쓰지 않고 대담하게 단호하게 그리고 용기 있게 나아갑니다. 그대는 이 여인들의 추진력과 대담함과 용기를 보고 부끄럽다고 고백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대의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그대를 예수님의 사랑 앞에 데려다주실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대는 기쁘고 평화롭게 지낼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는 언제나 ‘데려다 질’ 것입니다. 그대 혼자서는 넘어져 진흙투성이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계속해서 데려다 질 것입니다. 믿고 사랑하도록, 그리고 고난을 겪도록 데려다 질 것입니다.

성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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