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일

성 바오로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주님을 모든 일의 최상부에 그리고 가장 중앙에 모셔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대는 그대의 일에서, 그대의 직무에서 이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대는 그대의 삶 전체를, 그대의 일과 휴식과 눈물과 미소를 하느님께 바칠 생각은 없습니까?

그대는 할 수 있습니다. 또 해야만 합니다!

모든 피조물 하나하나가, 현세 생활의 모든 사건 하나하나가 예외 없이 그대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계단이어야 합니다. 이 계단을 통해 그대는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하고, 또 이 계단을 통해 그대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할 의무가 있습니다. 양심적으로, 책임 의식을 지니고 사랑과 인내로 회피하거나 경시하지 않고 일할 의무가 있습니다. 일은 하느님의 명령이며, 하느님께는 시편 저자가 말하듯이 기쁘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는 모든 고상한 인간적 가치를 획득해야 합니다.

참으로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추구할 시간이 없으며, 교만할 여지도 없습니다. 오로지 섬기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활동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하든 중요하지 않든, 주님과 인간을 섬기기 위한 수단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 활동의 중요성을 측정하는 진정한 척도입니다.

언제나 일하십시오. 그리고 매사를 희생으로 하십시오. 그리하여 모든 인간 활동의 정점에 그리스도를 모십시오.

은총에 상응하는 것을 우리는 일상의 보잘것없는 평범한 것들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중요하지 않아 보이지만 대단히 중요한 사랑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품위 있고 숭고하고 정직한 일은 초자연적인 질서로 들어 높여져 하느님의 일이 될 수 있으며 또 돼야 한다는 것을 그대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님이시고 모범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이 성장하고 사시면서 인간 삶―그대의 삶―이,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이 영원한 신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선하심에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대는 그대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대의 집과 가족과 조국이 바로 그대가 성화해야 할 재료라는 것을 알면서 기쁨으로 충만하지 않다는 것입니까?

딸이여, 가정을 꾸렸군요. 그대도 잘 알겠지만, 여성은 큰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드러나지 않도록 특별한 부드러움 속에 그 힘을 감싸는 법을 그대는 압니다. 바로 그 점을 그대에게 일깨워 주고 싶군요. 그 힘으로 그대는 남편과 아이들을 하느님의 도구가 되게 할 수도 있고 마귀의 도구가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대는 언제나 그들을 하느님의 도구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대의 도움에 의지하고 계십니다.

나는 그 사도가 그리스도교 혼인을 ‘큰 성사’라고 부르는 것에 감동합니다. 그리고 또 이로부터 나는 부모의 일이 대단히 중요함을 알게 됩니다.

그대는 하느님의 창조 능력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사랑은 거룩하고 숭고하고 선합니다. 하지만 마음에서 솟아나는 이 이 기쁨을 어떤 이들에게는 자유로이 포기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에 찬 섭리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주시는 자녀는 모두가 하느님의 큰 축복입니다. 자녀를 갖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수많은 부부와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강조하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 부모는 자녀가 성인이 되도록 도와주어야 하지만 또한 이 지상에서는 아무도 성인이 될 수 없음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분투하고 분투하며 또 분투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를 더 보탭니다. 그리스도인 부모인 그대는 하느님의 힘을 자녀들에게 보내는 강력한 영적 모터입니다. 그 힘은 투쟁을 위한 힘이며, 승리하기 위한 힘이며, 성인이 되도록 하기 위한 힘입니다. 자녀들을 주저앉히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위하여 영혼들을 사랑하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이들을 한층 더 사랑한다고 해서 괘념치 마십시오. 그들을 무척 사랑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더 주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행하신 다음에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이중적인 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실천하지 않으면서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달리 말해서 적어도 실천하려고 노력하면서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인 그대는 공동선을 지향하는 법을 준수하여 시민으로서 모범이 되는 것을 포함해 그대가 하는 모든 일에서 모범이 돼야 합니다.

그대는 대단히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공공 서비스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 자기 의무를 이행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의무입니다!”라고 그대는 말합니다. 그런데 그대는 그대 자신의 시간표를 존중하는지, 그 시간표를 양심적으로 이행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대는 시민으로서 모든 의무를 준수하고 어떠한 의무에 대해서도 이행하기를 회피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대의 모든 권리를 공동체의 선을 위하여 행사하되 무분별하게 예외를 두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그 점에서도 그리스도인다운 증인이 돼야 합니다.

우리의 일을 정말로 성화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이행해야 할 첫째 조건이 있습니다. 일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뿐 아니라 초자연적으로 진지하게 일을 잘하는 것입니다.

그대의 사랑이 호감을 주어야 합니다. 항상 신중함과 자연스러움을 잃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어야 합니다. 비록 속으로는 눈물을 흘리고 있더라도 말이지요. 섬김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그대의 일을 절반만 마치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요청하시는 완전한 번제(전적인 봉헌)를 우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대가 그리스도를 본받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미적거린다면 본받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직업 노동―가사 노동 또한 가장 훌륭한 직업에 해당합니다.―은 인간이 존엄하다는 증거가 되며 자신의 개성을 개발하는 기회가 되고 다른 이들과 일치를 이루는 끈이 되며 원천적인 자원이 되고 우리가 사는 사회의 개선에 기여하고 전 인류의 진보를 촉진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러한 전망이 한층 더 확장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노동하심으로써 노동을 성화하고 또 성화의 수단이 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노동은 성덕에 이르는 수단이자 길입니다. 거룩하게 하고 또 거룩하게 될 수 있는 구체적인 과업입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의 선물을 받은 당신 자녀들이 창조계에 대해 원래의 낙관적인 시각을, 그리스도교의 핵심 메시지인 세상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의 직업 노동에는, 지상 도시를 건설하려는 그대의 노력에는 언제나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대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대가 반드시 맞게 될 직업적인 성공이나 실패 때문에 노동의 참다운 목적을 잠깐이라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노동의 참다운 목적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노동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시간을 메우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이고 전문적인 역량을 가지고, 또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을 가지고 일을 하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의 보화인 시간을 마냥 허비하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요!

모든 떳떳한 직업은 거룩하게 될 또 거룩하게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자녀라면 그 누구도 “나는 사도직을 수행할 수 없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드러나지 않은 삶(공생활 이전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서두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곧 내적 삶이 무엇보다 먼저입니다, 그 나머지 곧 사도직, 모든 사도직은 이 내적 삶에 따라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이 세상 문제들에 초자연적 감각을 가지고 또 윤리 규범에 부합하게 대처하십시오. 초자연적 감각과 윤리적 규범은 개성을 위협하거나 파괴하지 않습니다. 개성을 지니게 해줍니다.

이렇게 처신하면 그대는 활력에 찬 행동으로 사람들을 사로잡게 될 것이며, 그대가 바른길을 따라 진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 하느님께서는 그대가 거룩하게 되어 다른 이들을 성화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그대는 용기 있게 그리고 성실하게 그대 자신과 우리 주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 그러고 나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대의 고상한 인간적 자질들을 촉진하십시오. 그것들은 성화를 이루는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데는 이와 함께, 이미 다른 기회에 말했습니다만, 모든 것을 불살라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필요하다면 사람들의 이목과 평판까지도 말입니다.

그대는 공공 생활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활동을 장려하고 격려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 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그렇기에 그대는 각 사람의 자유를 합당하게 존중하도록, 또 모든 신자에게 신앙에 부합하게 처신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울 수 있도록 양성돼야 합니다.

그대는 인간적이고 초자연적으로 가장 완벽하게 끝낼 수 있는 그대의 전문적인 일을 통하여 그대의 전문 분야나 일을 수행하는 그곳에 그리스도교적 기준을 제시할 수 있고 또 제시해야 합니다.

그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초연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하여 충실하게 그리고 자유로이 협력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이며 동시에 다른 이들과 같은 범주에 드는 시민인 우리는 사람들의 모든 정직한 활동과 단체들에 ‘두려워하지 말고’ 참여하여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계시도록 해야 합니다.

사회의 현재와 미래가 걸린 일들과 결정들에 우리 각자가, 부주의나 태만으로 인해, 자유로이 개입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엄중하게 셈을 치르도록 하실 것입니다.

깊은 겸손―이 겸손은 시편 작가의 말처럼 “병거와 기마의 수에서”가 아니라 우리 하느님의 이름에서 강합니다―으로 우리는 사회의 구석구석에 그리스도께서 알려지지 않은 곳이 없도록 인간적인 고려를 하지 않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대는 자유로이 그리고 그대의 관심사나 재능에 따라 나라의 건전한 공립 또는 사립 단체에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참여하십시오.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가득 차서 참여하십시오. 이러한 단체들은 인간의 현세적이고 영원한 선에 절대로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그대가 시민으로서 온전한 권리를 가지고 활동하고 운용하는 인간적 제도들과 구조들이 그리스도교적 인생관에 적용되는 원칙들에 맞도록 그대는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대는 사람들에게 저마다 존엄성에 맞게 살아갈 수단을 그대가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또 그대는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신의 그리스도교적 소명에 직접 응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거리와 도로 곳곳에 세워져 있는 십자가와 성모상 같은 성상이나 조형물들을 신심을 위해 또 문화를 위해 보호하고 장려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자 시민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상 파괴자들에 의해 또는 세월이 흐르면서 훼손되고 파기된 성상이나 조형물들을 복원해야 합니다.

그대가 볼 수 있듯이, 마귀의 직계인 저 ‘지옥에 떨어질 자유들’ 곧 방종의 딸들, 악마적 욕정의 자손들, 원죄의 후손들에 대해 우리는 담대하게 맞서야 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또 하느님의 원수들이 더 해악을 끼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그자들이 세상을 뜬 후에라도 널리 알려지게 하거나 찬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어머니인 교회가 사회에서 또 정부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바로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을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대를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저들에 맞서 투쟁하고 그런 영역들에 진리를 전파하도록 말입니다.

그대는 보통 시민입니다. 그대의 이 세속성은 그대 동료들의 세속성과 똑같으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대는 그대의 신앙을 다른 사람들이 감지할 충분한 용기―이 용기는 때로는 대단히 용감해야 함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가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그대의 선행과 그 선행이 동기를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그대는 자신의 고유한 직업적인 또는 사회적인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절대로 혼자가 아닙니다!

언제나 그대와 함께하시는 우리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충실하게 하는 수단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당신께 인도하는 수단을 그대에게 주십니다.

모든 것을 사랑을 위해! 이것이 바로 성덕의 길, 행복의 길입니다.

이를 마음에 새기고 그대의 지적인 과제들을, 우리 모두 반드시 이행해야 할 일들인 최고의 영적인 과제들과 가장 현실적인 과제들을 마주하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 것입니다.

그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교리와 윤리의 범위 안에서 그대의 모든 것을 양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해서 내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을 양보할 수는 없습니다.

그대는 명령을 내려야 할 때, 아무에게도 치욕스럽게 하지 마십시오. 부드럽게 하십시오. 복종하는 사람의 지성과 의지를 존중하십시오.

그대가 현세적 수단을 이용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지상의 온갖 것에 매이지 않도록 많이 노력하십시오. 그래야 언제나 하느님을 섬기고 인간을 섬기는 마음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계획한다고요? “모든 것!”이라고 그대는 내게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신중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일은, 쉽든지 어렵든지 간에, 예기치 못한 구석이 있음을 늘 헤아려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나아가 희망의 통로를 닫아서도, 하느님의 섭리를 잊어서도 안 됩니다.

그대는 초자연적 비전으로 일함으로써 그대의 일을 성화하는 데에 전념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상의 것이 신적인 것이 되고 일시적인 것이 영원한 것이 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금전적인 부족 때문에 실패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정신의 부족으로 실패합니다.

예수님의 가난과 가깝다고 느끼는 것이 기쁘지 않습니까? 필요한 것마저도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멋진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는 조용히 드러내지 않은 채 넘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신실한 신심, 하느님께 대한 참된 사랑은 일을 하도록 인도해 줍니다. 비록 힘이 들더라도 일상의 의무를 이행하도록 이끌어줍니다.

내적 삶 없이 일하도록 부추기는 위험을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또한 일하지 않는 내적 삶이 있다면, 그런 삶이 위험하다는 것 또한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적 투쟁은 우리를 현세 일로부터 멀어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더 잘 마무리하도록 이끌어줍니다.

그대의 삶은 항상 똑같은 행동의 반복이 아닙니다. 다음 행동은 이전 행동보다 더 올바르고 더 효과적이며 더 사랑으로 차 있어야 합니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빛을 띠고 새로운 희망이 돼야 합니다. 그분을 위해서!

하루하루의 여정에서 하느님을 알기 위해,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 매 순간 하느님과 더 깊은 사랑에 빠지기 위해 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십시오. 그리고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과 영광만을 생각하십시오.

아들이여, 그대는 이 계획을 이행하게 될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의 기도 시간을 지키고, (화살기도와 신영성체[神領聖體]로 불타올라) 하느님 앞에 머물며, 차분하게 미사를 봉헌하고, 그대의 일을 그분께서 잘 마무리하시도록 한다면 말입니다.

기도와 활동이 양립할 수 없다는 듯이 그 둘을 분리하는 이들의 의견을, 나는 존중하기는 하겠지만, 절대로 동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관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군중의 소음 가운데서도 주님과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영혼의 침묵을 발견할 줄 압니다. 또 아버지를 바라보듯이, 친구를 바라보듯이, 사랑에 미쳐 연인을 바라보듯이 하느님을 바라볼 줄 압니다.

잘난 척하지 않으며 신심 깊고 경건한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으로 하는 의무를 완벽하게 수행해 냅니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모든 인간적인 활동을 하는 가운데 관상하는 정신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나는 강조합니다. 우리는 기도와 고행을 통해, 종교와 직업에 대한 지식을 통해 빛과 소금과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안에 있을수록 더 하느님의 자녀가 돼야 한다.’라는 이 목표를 우리는 완수할 것입니다.

양질의 금과 다이아몬드는 인간의 손길이 미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땅속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대 자신과 다른 이들의 성화를 위한 일은 바로 그대의 열의와 기쁨, 그대의 일상에, 모호하고 통상적이고 평범한 일상 일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행위에서, 우리는 손을 대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하게 한다는 미다스 왕의 전설을 훨씬 능가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날마다 하는 인간적인 일을 영원까지 미치는 하느님의 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대가 삶의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는 제물이 되도록 마음을 굳힌다면, 그 모든 것이 하늘에 계시는 그대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그대를 늘 지켜 주시며 새로운 빛을 주실 것입니다.

기쁘게 평화롭게 그리고 하느님의 현존 속에 일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그대는 또한 그대의 과제를 상식적으로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피곤이 엄습하더라도 끝까지 완수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가 하는 일들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것입니다.

온종일 주님과 끊임없이 대화하십시오. 이는 그대가 직업상 하는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감실에 다가가 그대 손이 하는 그 일을 주님께 바치십시오.

그대가 일하고 있는 그곳에서 마음을 감실 바로 곁에 계시는 주님께로 향하고는 유난스럽지 않게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저의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분을 “저의 예수님”이라고 부르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또 그분께 자주 말씀드리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제가 성무일도를 바치는 동안 이렇게 기도하고 싶었습니다. “성무일도를 시작할 때 ‘나는 성인들처럼 기도하고 싶다’라는 격언을 따르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수호천사에게 주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나와 함께 부르자고 청하겠습니다.”

그대가 구송기도를 바칠 때 그리고 또 그대의 일터에서 하느님께서 더 오래 현존하시도록 하는 방법으로 이를 시도해 보십시오.

그대는 구체적인 길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머무르면서 하느님 안에서 그대의 직무를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초자연적 관점을 놓치지 마십시오. 높은 파도가 칠 때 선박은 별을 보며 방향을 바로잡듯이,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그대의 지향을 바로잡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대는 언제나 틀림없이 항구에 도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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