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단련

주님, 저의 애착을 없애 달라고 청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을 섬기는 데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정화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느님의 모든 경이로운 위업과 우리 인간의 온갖 실패를 보면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제게 모든 것입니다. 저를 당신 좋으실 대로 써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에게도, 저희에게도 더는 외로움이란 없을 것입니다.

거룩함의 위대한 비밀은 자신을 낮추어 유일하고 지극히 사랑스러운 모델이신 그분을 더욱 닮는 데 있습니다.

그대는 기도를 시작할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혼란스럽고 메마르다고 느낄 때, 그대 자신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대신 그대의 눈길을 우리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돌리십시오.

주님께서는 올리브 동산에서 가장 가까운 세 사도에게 “깨어 기도하여라.”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각자에게도 요청하신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거룩한 복음서를 펼칠 때, 그 안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동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복음서에서 말하는 모든 것이, 하나하나가 전부 그대가 구체적인 삶의 환경 속에서 생활화하도록 모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가까이 따르라고 우리를 가톨릭 신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그대는 예수님의 생애를 봅니다. 하지만 나아가 그대 자신의 삶을 보아야 합니다.

그대 또한 사도들과 같이 애정을 담뿍 안고 “주님께서는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여쭙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의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라는 결정적인 답변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날마다 복음서를 펴서 읽고 그것을 구체적인 규칙으로 생활화하십시오. 이것이 성인들이 했던 것입니다.

만일 그대가 진정 마음으로 응답하고자 한다면, 주님의 상처를 들여다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대는 그분을 친밀하게 알게 될 것이며, 그분께 밀착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 심장이 고동치는 것을 느낄 것이고 그분이 그대에게 요청하시는 모든 일에서 그분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도가 위로제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사도가 살아가는 삶을 상징합니다. 때로는 힘들고 또 무겁다고 느낄 수 있지만, 십자가가 주는 힘과 진리는 영혼과 육신을 모두 기쁘게 합니다.

그대가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기를 원한다는 것을 나는 이해합니다. 그대는 그분과 그분을 채찍질하는 이들 사이에 등을 들이대기를 원합니다. 그분을 대신해서 그대의 머리에 가시관을 쓰기를 원합니다. 그대의 손과 발이 못에 박히기를 원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그대는 골고타에서 그분의 어머니, 거룩하신 마리아와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또 그대의 죄 때문에 하느님을 죽이는 잘못에 대해 탄원하기를 원합니다. 고난 받기를 원합니다.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대는 더욱 자주 성령께 나아갈 것을 결심하면서 성령의 빛을 비추어 주시도록 청했다고 내게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렇지만 아들이여, 성령은 십자가의 결실임을 기억하십시오.

영혼을 행복하게 하는 감미로운 사랑은 고통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포기 없이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십니다. 그런데 그대는? 여전히 그대 자신의 변덕과 취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군요. 아니 달리 말하면 그대 자신의 변덕과 취향에 못 박혀 있군요.

우리는 쉽게 쉽게 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아야 하며, 그럴 수도 없습니다. 지상에는 반드시 고통과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십자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십자가 없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뿐 아니라 그들은 자기 십자가를 피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심각하고 무거울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평화로 가득 차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키레네 사람 시몬이 되시어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신뢰하며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이것이 어떤 십자가입니까? 십자가 없는 십자가네요. 이제는 당신께 저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는 그 법칙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당신의 도우심으로, 저의 모든 십자가는 늘 이럴 것입니다.”

우리의 저 친구가 오래전에 한 이 결심을 그대 자신의 영혼 안에서 새롭게 하십시오. “주님, 저는 구경거리가 아닌 고통을 원합니다.”

십자가가 있다는 것은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을 모시는 것이니!

한 개인이나 사회 전체를 진정 불행하게 하는 것은 걱정에 짓눌려 이기적으로 안녕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거슬리는 것은 다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사랑의 길은 이름이 있습니다. 희생입니다.

십자가, 거룩한 십자가는 무겁습니다.

우선, 저의 죄가 있습니다. 또 어머니인 교회가 겪는 여러 고난의 슬픈 현실이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가톨릭 신자가 냉담합니다. 그들은 실제로는 십자가를 원치 않으면서도 원하는 척하니까요.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갈라져 있습니다. 우리가 또는 다른 사람들이 겪는 질병과 시련이 있습니다.

십자가, 거룩한 십자가! 무겁습니다. 지극히 의롭고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 뜻이 이루어져 모든 것 위에 영원히 찬미와 찬양받으소서! 아멘. 아멘.

그대가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곳을 걸을 때, 자신을 단지 십자가에 내맡기지 않고 온 마음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 그대가 하느님의 뜻을 사랑할 때, 그대가 십자가를 사랑할 때, 그때, 오직 그때만이 그분께서 십자가를 지십니다.

관대하게 ‘이루어지소서!’ 하고 응답하면서 그대의 고통―그것이 외적인 십자가이든 내면의 십자가이든 간에―을 하느님의 뜻에 합치시키십시오. 그러면 그대에게 기쁨과 평화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십자가의 명백한 표징은 이러한 것들입니다. 평온함, 깊이 느끼는 평화, 어떠한 희생도 기꺼이 치르려는 사랑, 예수님의 상처받은 옆구리에서 나오는 큰 효험입니다. 또 한결같은―또 대단히 명백한―기쁨입니다. 자신을 참으로 내어주는 이들은 자신이 십자가 곁에 있다는 것을, 따라서 우리 주님 곁에 있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대의 전 생애에 걸쳐 그대의 육신과 정신을 거룩한 십자가의 인호(印號)로 표시해 주시는 왕이신 그분의 총애를 그대는 늘 의식하며 감사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저 친구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오래 쓰고 입맞춤을 하고 해서 낡아빠진 작은 십자가를 지니고 다닙니다. 그 십자가는 할머니께서 늘 사용하시던 것인데 돌아가실 때 아버지에게 물려주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아주 초라하고 낡아 다른 사람에게 줄 엄두가 나지 않아서 이렇게 지니고 다니는데 그 십자가를 보면 십자가에 대한 나의 사랑이 커질 것입니다.”

한 사제는 시련이 닥쳤을 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당신께서 주시고자 하는 그 십자가를 제게 주십시오. 이제 저는 그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제 사제직의 풍요로운 축복으로 찬미합니다.”

강한 타격을 받을 때, 어떤 십자가가 주어질 때, 그대는 우울해하지 마십시오. 반대로 행복한 얼굴로 주님께 감사드리십시오.

돌아가셔서 누워 계시는 예수님을 그린 성화 한 점을 어제 보았는데, 무척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한 천사가 지극한 정성으로 기름을 부으면서 그분 왼손에 입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 천사는 그분 발치에서 십자가에서 뽑아낸 못을 들고 있었습니다. 앞쪽에서는 등을 관람자 쪽으로 돌린 채 땅딸막한 꼬마 천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울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주님께 그 성화를 제게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이 한 구매 예상자에게 그 성화를 보여주었을 때 그 사람이 한 말을 듣고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사람은 “그 그림은 시신이란 말이요!” 하면서 성화를 사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제게는 당신이 언제나 생명일 텐데요.

주님, 저는 주저하지 않고 수없이 거듭해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께서 치욕스럽고 참혹하게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저는 당신을 따라 당신과 함께 고통을 겪고 싶습니다.

십자가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의 거룩한 피를 제 혈관에 넣어 주시어 매 순간 십자가의 너그러움을 살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그대 삶에 또 하느님의 뜻에 대한 그대의 응답에 모델이 되고 자극이 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아픔이 올 때 또는 보속을 해야 할 때, 십자가는 구세주 그리스도의 상징임을 명심하십시오. 십자가는 악의 상징이기를 그치고 승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음식 재료 가운데 ‘가장 맛있는 것’으로 고행을 실천하십시오.

며칠 동안 엄청난 고행을 하고 그 밖의 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참회의 정신이 아닙니다.

참회의 정신은 크고 작은 일을 눈에 띄지 않게 사랑으로 봉헌하면서 하루하루를 이겨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보잘것없는 일들을, 우리의 크고 작은 어려움을 희생 제물이신, 유일한 희생 제물이신 우리 주님의 큰 고난에 합치시킨다면, 그것들의 가치가 커질 것이고 보화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쁘게 그리고 멋지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온갖 고난이 곧 극복될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우리의 평화와 기쁨을 앗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대가 사도가 되고자 한다면 성 바오로 사도가 가르친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그대 안에 모시고 다녀야 합니다.

사실입니다! 거룩한 십자가가 우리 삶 속에 들어올 때, 그 십자가는 우리가 그분의 것, 그리스도의 것임을 틀림없이 확인해줍니다.

십자가는 고통도 아니고 불쾌함도 아니며 쓰라림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개선하시는 거룩한 나무입니다. 또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것을 우리가 기쁘고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 또한 십자가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희생 제사를 마친 후에 그대는 신자들의 인내와 심지어 그들의 지상 삶조차도 그대의 신앙과 사랑에, 그대의 참회와 기도와 활동에 얼마나 크게 의존하는지를 그대는 보았습니다.

십자가를 찬미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지시는 그리고 그대와 내가 지는 그 십자가를!

오, 예수님! 사랑의 광기로 타오르는 모닥불이 되고 싶습니다. 저의 현존이 꺼지지 않는 불이 되어 주변 수 킬로미터를 충분히 밝히기를 원합니다. 제가 당신의 소유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런 다음에 십자가를 맞이하게 하소서.

고난을 겪기, 사랑하기, 믿기. 이는 놀라운 길입니다.

그대가 아플 때 그대의 고통을 사랑으로 봉헌하십시오. 그러면 그 고통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피어오르는 분향으로 변하고, 그대를 거룩하게 해줄 것입니다.

그대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그대가 원하는 일이나 성취하는 일에서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온실에 있는 화초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한가운데서 살면서 불어 닥치는 그 모든 바람과 더위와 추위와 비와 폭풍에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하느님과 그분의 교회에 충실해야 합니다.

비록 모욕받기를 원한다 해도, 모욕을 당하면 큰 상처를 받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을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무시당한 것이 그대에게 그토록 큰 상처를 남겼군요. 이것은 그대 자신이 누구인가를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부당하게 비난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평온하고 기쁘게 우리 행위를 성찰해야 합니다. 그래서 설사 우리 행동에 하자가 없다 하더라도, 사랑이 요구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동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더욱더 성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하고 싶은 대로 말할 때 우리는 그들의 말을 ‘참행복’의 말씀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어디서 누가 말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허리케인이 가장 높게 치솟은 소나무를 강타하듯이 사악함의 강풍은 뛰어난 사람들에게 덮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음모들,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제멋대로 하는 해석들, 비겁한 이들의 웅얼거림…. 불행하게도 여러 상황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자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까지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시편의 다음 구절을 천천히 묵상하십시오. “나의 하느님, 저는 제 형제들에게 남이 되었고 제 어머니의 소생들에게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당신 집에 대한 저의 열정이 저를 불태우고 당신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제 위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을 계속하십시오.

거룩한 십자가의 희생으로 험담을 감수하지 않는 한, 비록 모두가 좋은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안에서 절대로 선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침묵과 희망에서 너희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당신께 속한 이들에게 보증하시는 말씀입니다. 침묵하고 신뢰하십시오. 침묵과 희망은 인간적으로 해결할 길이 없는 역경에 직면해서 쓸 수 있는 두 가지 기본적인 무기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수난과 죽음을 바라보십시오. 불평하지 않고 고통을 견디어내는 것은 사랑의 척도이기도 합니다.

온전히 하느님 것이 되기를 원하고 또 하느님 때문에 전 인류에게 속하기를 원한 어떤 영혼의 기도입니다. “주님, 이 죄인 안에서 활동하시어 저의 지향을 바로잡고 정화하고 단련시켜 주시기를 청합니다.”

높은 학식과 성덕을 겸비한 저 사람이 양보할 것과 물러서지 말아야 할 것에 대처하는 의연함이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 사람은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 드리지 않는 모든 것에 동의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대의 삶에서 그대를 괴롭혔거나 괴롭히려고 했던 이들이 그대의 영혼에 준 선을 생각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원수라고 부릅니다. 성인들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며 이런 일에서도 원수가 거의 없거나 원수를 둔 적이 거의 없는 그대는 그들을 ‘은인’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들을 하느님께 맡겨드림으로써 그대는 그들을 동정하게 될 것입니다.

내 말을 잘 들으십시오. 사람들이 그대를 학대하고 불명예스럽게 할 때, 그대가 모든 이를 위한 쓰레기통 같아서 화가 난 수많은 사람이 그대에게 침을 뱉을 때, 그대는 행복합니다.

힘듭니다. 대단히 힘듭니다. 감실에 다가가서 자신을 세상의 허접쓰레기로, 가련한 벌레로 보면서 진심으로 “주님, 주님께 제 명예가 필요하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명예를 바라겠습니까?” 하고 말할 때까지는 힘이 듭니다.

하느님의 자녀라 하더라도, 그때까지는, 곧 발가벗김을 당하고 굴복하기까지는, 고행과 고통에 바탕을 둔 사랑에 굴복하기까지는 행복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선한 것과 반대되는 것은? 악마의 짓입니다.

그대가 평온을 잃고 불안하게 되면, 이성적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럴 때 물에 빠져 평온을 잃고 불안해하는 베드로에게 하시는 스승님의 말씀이 다시 들려옵니다. “왜 의심하였느냐?”

질서는 그대의 삶에 조화를, 그대에게 인내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대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줄 것이며 그대의 처신을 진지하게 해줄 것입니다.

내가 이 글을 베껴 쓰는 것은 그 글이 그대의 영혼에 평화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제적 형편은 어느 때보다 팍팍합니다. 그렇지만 평화를 잃지 않습니다. 나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이 문제를 한꺼번에 전부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합니다.”

“주님, 당신의 너그러운 손길로 보살펴주시도록 저의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어머니이신 당신의 어머니께서는 카나에서 하셨던 것처럼 지금 당신께 말씀하십니다. ‘…이 없구나.’ 예수님, 저는 당신을 믿고 당신을 바라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저들을 위해서입니다.”

저는 당신의 뜻을 사랑합니다. 뛰어난 부인인 거룩한 가난을 사랑합니다.

저는 지극히 의롭고 지극히 사랑스러우며 지극히 자애로운 당신의 뜻과 조금이라도 떨어진 것이면 무엇이나 늘 혐오합니다.

청빈 정신, 지상 재화로부터 초탈하는 정신은 사도직에서 효과를 거두게 합니다.

나자렛은 신앙의 길이요, 초탈의 길입니다. 그곳에서 창조주께서는 마치 천상 아버지께 예속되시듯이 피조물에 예속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랑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교정하실 때나 우리에게 시련을 겪도록 허락하실 때조차도 말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추십시오. 그러면 어떠한 모순도 모순이 아니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한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당신께 요구하시도록 해드리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십시오. 우리 신앙이 가르치고 요구하는 바를 가지고 그대가 생애 전체에 걸쳐 건설해야 할 목표를 망설이지 말고 설정하십시오.

그리하면 그대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심지어 비방을 당하면서도, 행복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행복은 그대에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할 것이며, 그들에게 그대가 누리는 초자연적 기쁨을 함께 누리게 해줄 것입니다.

시련이 오면, 그 시련이 그대를 위한 하느님 아버지의 자애로운 사랑의 증거임을 확신하십시오.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인생이 용광로, 고통의 불로 타오르는 용광로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곳, 그 용광로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스승이 밟은 그곳을 두려움 없이 밟는 이들은 비록 그 여정이 힘들더라도 기쁨을 발견한다고 말입니다.

참회로써 그대의 정신을 굳세게 하십시오. 그러면 어려움이 올 때 그대는 절대로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쯤 그대는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려고 작심할 것인가요!

예수님의 발자취를 항구히 인내하며 따르려면, 그대는 언제나 자유로워야 하며 언제나 그런 의지를 지녀야 하며 언제나 그대 자신의 자유를 연마해야 합니다.

그대는 개선의 여지가 있는 하나하나마다 서로 다른 많은 목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워합니다.

그것들은 길 안에 있는 다른 길들로서, 그대가 판에 박힌 길을 피하도록 도와주며 그대를 주님께 더 가까이 데려다줍니다.

관대해지십시오. 가장 높은 곳을 목표로 삼으십시오.

겸손하게 일하십시오. 말하자면 먼저 하느님의 축복에 의지하십시오. 하느님의 축복은 그대를 실패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좋은 뜻을 지니십시오. 또 그대가 가지고 있는 활동 계획을 따르십시오. 그대가 처한 어려움도 고려하시기를! 그대가 거룩하지 않다는 것도 어려움 가운데 하나임을 늘 잊지 마십시오.

더 나아지고자 그대가 날마다 분투한다면, 그대는 좋은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대는 주님께 열린 마음으로 이렇게 기도하곤 했다고 내게 말했지요. “저는 저의 비참함을 생각합니다. 당신의 은총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비참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의 응답이 부족한 탓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당신께서 제게 요구하시는 일을 하기 위한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신문을 보면 자질이 뛰어나고 존경받는 이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들은 재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재력, 언변, 글쓰기 그리고 당신의 나라를 수호하기 위한 조직적 활동에서도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저 자신을 살펴보면 아무것도 아님을 압니다. 무식하고 가난합니다. 한마디로, 너무나 보잘것없습니다. 그렇기에 당신께서 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저는 그지없이 혼란스럽고 창피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 예수님, 제가 얼마나 기꺼이 저의 야망을 당신 발아래 내려다 놓았는지를 당신께서는 아십니다. 믿음과 사랑을 지니기. 사랑하기, 믿기, 고난을 겪기. 이런 일들에서 저는 풍요롭고 지혜로워지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무한한 자비로 제가 훨씬 더 풍요롭고 지혜롭도록 안배하셨습니다. 저의 모든 명예와 영예는 주님 지극히 의롭고 사랑이 넘치는 당신의 뜻을 이루는 데 바치기를 원합니다.”

그때 나는 그대에게 이 기도를 단지 좋은 지향으로만 놔두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도록 초대합니다. 우리 어깨로 전 인류의 무게를 느끼도록, 또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른 계획, 명확하면서도 사랑에 찬 그 계획을 우리 각자가 처한 상황과 하는 일에 맞춰서 이행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분은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위대한 광인(狂人)이십니다. 그분처럼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보다 더 위대한 광기가 있습니까?

무력한 아기가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미친 짓이었을 것입니다. 많은 악인의 마음이 누그러졌을 것이고, 감히 그분을 해하려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분께는 이것이 충분치 않았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더욱 낮추시기를, 자신을 더욱 넉넉히 내어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음식이 되셨습니다. 빵이 되셨습니다.

거룩한 광인!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대하는지요? 저는 또 어떻고요?

예수님, 당신 사랑의 광기가 제 마음을 앗아갑니다. 당신은 작고 무력합니다. 당신을 받아 모시는 이들이 커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대의 삶은 본질상 온전히 성체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감실을 감옥이라고, 사랑의 감옥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2000년 동안 그분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를 위해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해 기꺼이 갇혀 계십니다.

만일 일생에 단 한 번만 성체를 모실 수 있다면 주님을 모시기 위한 준비를 어떻게 할 것인지 그대는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하느님께 쉽게 다가갈 수 있음을 우리는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분을 잘 모시도록 준비함으로써 감사드려야 합니다.

주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이제부터는 미사를 거행하거나 미사에 참여할 때, 성체를 분배하거나 받아 모실 때,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큰 믿음으로, 불타는 사랑으로 하겠다고.

그리고 지난날 소홀히 했던 것에 대해 뉘우칩시오.

날마다 성체를 받아 모시려는 그대의 간절한 바람을 나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고 느끼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리스도가 강력히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거룩한 미사에 참여할 때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사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미사는 그런 것입니다! 제단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그대를 위해 다시 바치십니다.

주님을 모실 때는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당신 안에 희망을 둡니다. 당신을 경배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의 믿음을 키워주십시오. 저의 약함을 지탱해 주십시오. 당신은 피조물들의 약함을 치유해 주시고자 성체 안에 무력하게 머무르셨습니다.”

우리는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깊이 새겨 우리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교회의 지혜로 규정된 예식들의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주의해서 지키는 것보다 거룩한 희생 제사에 대한 우리의 큰 관심과 사랑을 더 잘 드러내는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사랑에 더하여, 우리는 내적으로만이 아니라 외적으로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어야 할 필요를 느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제단의 넓은 공간에서 거룩한 순종의 리듬과 조화에 맞춰 활동해야 합니다. 거룩한 순종은 그리스도 신부(인 교회)의 뜻에 맞추는 것,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뜻에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례에서 주님을 모실 때, 지상의 위대한 분을 모시듯이 모셔야 합니다. 아니 그보다 더 잘 모셔야 합니다. 장식을 달고 불을 밝히고 새 옷을 입고….

만일 얼마나 깨끗하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곧 어떻게 장식하고 어떻게 불을 밝혀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대의 오관 하나하나를 깨끗이 하고 그대가 지닌 능력 하나하나를 장식하며 그대의 영혼 전체에 불을 밝혀야 한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성체를 중심에 모시는 영혼이 되십시오!

그대의 생각과 희망이 지향하는 중심이 감실이라면, 아들이여, 그대의 성덕과 사도직이 얼마나 풍성한 열매를 맺겠습니까!

거룩한 예배에 사용되는 성물들은 예술적인 가치를 지녀야 합니다. 예술을 위해 예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위해 예술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몸이 아니면 마음으로라도 감실 앞에 꾸준히 나아가십시오. 안전하고 평온함을 느끼기 위해서이지만 또한 사랑받는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또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사도직을 따르는 신자들을 위해 어떤 사제가 했던 말을 베껴 씁니다. “제대 위 성광 안에 현시된 성체를 바라볼 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분의 온화함이 얼마나 큰지를 생각하십시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멀리서 일하면서도 동시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바로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게 일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지상의 모든 사람의 마음을 합친 것보다도 무한히 뛰어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께서는 우리 곁에 머무르시어 우리가 당신의 지극히 거룩한 인성과 늘 합치되도록 우리 곁에 머무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충실하도록 우리를 돕고 위로하고 굳세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훌륭한 지향을 행동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도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듯이 “하느님 나라는 말이 아니라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을 꾸준히 돕는 실천은 희생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

항상 교회와 함께 모든 것을 생각하십시오! 이를 위해 필요한 영적 훈련과 교리적 양성을 받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그대는 현세 일을 선택할 때 올바로 판단을 내릴 수 있고 또 잘못임을 깨달았을 때 신속하고 겸손하게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는 덕스러운 일은 개인의 자유를 행사하는 대단히 인간적이면서도 대단히 초자연적인 방식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널리 알리는 일이 시급합니다.

양성을 받아서 명확한 개념과 온전한 그리스도교 메시지로 무장하십시오. 그리하면 나중에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대를 비추어 주실 것이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공부와 일이라는 활용할 수 있는 확실한 인간적 수단이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대를 비추어 주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오류는 지성을 흐리게 할 뿐만 아니라 의지를 분열시킵니다.

반대로 진리는 사랑을 메마르게 하는 당파적 영으로부터 그대를 자유롭게 해줄 것입니다.

그대는 아침 인사도 거의 하지 않는 동료와 함께 지내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그래서 무척 힘들어합니다.

인내하고 그를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 동료도 그대와 마찬가지로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그를 위해 더 기도하십시오.

그대 자신의 삶이 형편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천사가 아니라고 놀랄 수 있습니까?

거룩한 정결의 삶을 살도록 사랑으로 깨어 있으십시오. 타오르는 화염보다는 불씨 하나를 끄기가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고행하고 극기하고, 단식하는 모든 인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만, 저의 하느님! 당신 없이는 그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지요!

그대는 주변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영적이고 인간적인 양성에―‘성인들의 통공’이 거기까지 미치기에―어느 때나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늘 명심하십시오. 곧, 일할 때나 휴식할 때, 기뻐할 때나 걱정할 때, 집안일을 할 때나 거리 한복판에 있을 때도 하느님의 자녀가 기도하듯이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그대 영혼의 평화가 드러납니다. 그대가 고난을 겪고 울부짖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 때, 그대는 미소를 짓습니다.

거룩한 강요와 맹목적인 폭력 또는 보복은 다릅니다.

스승님은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적어도 어둠의 자녀들이 그들의 행동에 쏟는 것과 같은 노력과 집요함을 가지고 빛의 자녀들이 좋은 일을 한다면!”

불평하지 마십시오. 대신에 넘치도록 풍부한 선 속에서 악이 질식하도록 일하십시오.

사도직의 초자연적 효과를 저해하는 자선은 가짜 자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기댈 수 있는 확실하고 강한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해서나 우리 영예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예와 영광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삽니다. 이것이 우리를 움직이는 동인이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래로 우리의 어머니인 이 교회는 끊임없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예전에는 박해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종종 교활한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교회는 계속해서 공격을 받습니다.

책임 있는 가톨릭 신자로서 나날을 살아야 할 우리의 책무가 얼마나 막중한지요!

그대의 삶을 위해 이 처방을 사용하십시오. “나는 나 자신의 삶에 관해서는 괘념치 않는다. 나는 나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남은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일하십시오. 그리고 섬기십시오!

우리 어머니이신 성 마리아의 비할 데 없는 선하심을 규정하는 특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드러운 배려로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는 다함 없는 사랑,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있는 것이 행복하기에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림.

바로 이 때문에, 마리아의 몸짓은 제아무리 조그마한 몸짓이라도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에게서 배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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