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전투

하느님께 선택받는 것은 거룩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또 그것을 요구합니다.

그대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면, 그대의 삶-가련한 삶-은 인류 역사에 깊고 넓은 고랑을 남길 것입니다. 뚜렷하고 기름지며 영원하고 신적인 고랑을 말입니다.

성인이 되어야 할 그대의 책무를 날마다 의식하십시오. 성인! 성인이 된다는 것은 이상한 것을 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 삶에 정진하고 책무를 끝까지 올바로 영웅적으로 이행하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거창한 일들에 관심을 쏟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은 그대의 초자연적 삶의 불꽃이 절대로 꺼지지 않도록 힘써 노력하는 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대를 부르시는 곳 어디에서나, 가장 낮은 데서나 가장 높은 데서나, 그대 자신을 끝까지 불사르며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 사랑을 행동으로, 당신의 온 생애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대는 어떤가요?

그대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영혼들을 하느님께 데려가야 한다는 부담스럽지만 복된 그 일을 반드시 의식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을 대명제로 삼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어중간한 길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비열함, 치사한 타협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대의 길을 위한 처방전은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하십시오. 참회하십시오. 그대의 의무를 사랑으로 이행하는 일을 쉬지 않고 행하십시오.

저의 하느님!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소서! 저희 하느님! 기도하는 법을 알려 주소서!

우리는 겸손으로, 항구한 기도로, 올곧은 행동과 깨끗한 생활로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청해야 합니다.

그대는 내게 그대의 영혼을 덮친 그 거룩한 열정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지요.

나는 서둘러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그런 갈망을 그대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주신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의 동행이 되기를 갈망하며 성령을 알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성령을 더욱 잘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가 내적 삶을 살도록 성령께서 그대의 영혼에 거처하심에 대해 감사드리게 될 것입니다.

제단의 거룩한 희생 제사가 참으로 그대의 내적 삶의 중심이자 뿌리가 되도록 부단히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그대의 하루 전체가 예배 행위로 바뀔 것입니다. 그대가 참여한 미사의 연장이 되고 그다음을 위한 준비가 될 것입니다. 그대의 하루 전체가 화살기도와 성체 조배, 그리고 직장 일과 가정생활의 봉헌으로 충만한 예배가 될 것입니다.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 감사드리고 지극히 순결하시고 티 없으신 동정 성모님께 찬미의 노래를 불러 드리십시오. 그분은 주님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린이처럼 대담하게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저의 지극한 사랑이신 분! 당신을 낳으신 성모님은 찬미 받으소서.’

그러면 틀림없이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시면서 그대 영혼에 더욱 큰 사랑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성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그분이 하신 기도는 어떠했을까요!

천천히 이렇게 떠올리며 관상하십시오.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씀드릴 기회를 얻었습니다.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시면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당신의 말씀과 행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놀라운 진리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래서 아이가 아버지에게 말하듯이 우리는 하느님께 아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매일 일과를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고 그리스도를 찾는 모든 영혼을 돌보기 위해 그대가 명심해야 할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주님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기도 안에서만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는 법을 배웁니다.

기도는 미사여구를 쏟아내거나 거창한 말 또는 위안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때로는 주님이나 주님 어머니의 성화(聖畫)를 잠시 바라보는 것도 기도이고, 또 때로는 청원을 드리는 일이나 선행을 실천하는 일, 그리고 충실함의 열매를 맺는 것도 기도입니다.

우리는 주 하느님의 문 앞에서 불침번을 서는 경계병처럼 또는 주인의 발 옆에 엎드린 강아지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기를 서슴지 마십시오. “주님, 충성스러운 개처럼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니 “자기를 사랑하는 이를 발로 차버리지 않는 어린 나귀처럼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대를 포함해 우리 각자는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그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저마다 직접 주님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그대의 기도가 단순히 말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행동으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겪는 모든 악을 잘라내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를 광적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분은 또한 우리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가 아무리 말해도 절대로 물리지 않을 권고입니다.

영웅적 덕행, 거룩함, 대범함은 꾸준한 영적 준비를 요구합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면 그대 자신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생명을 살고 하느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대 영혼에 깊이 각인될 때까지 그치지 않고 되풀이하고자 하는 말은 ‘신심, 신심, 신심’입니다. 그대에게 사랑이 부족하거나 없다면, 그것은 그대의 성격에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적 생활이 고갈되어서일 것입니다.

그대가 하느님의 착한 자녀라면 하루하루를 시작할 때와 마칠 때에 하느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마치 아침에 일어날 때나 밤에 잠자리에 들 때 엄마 아빠가 있어야 안심하는 어린이처럼 말입니다.

그대는 지치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때라도, 규칙적인 신심 생활에 정진해야 합니다. 인내하십시오! 지치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 그 순간들은 폭설이 쌓인 산길을 따라 표식 역할을 하는 빨간색의 긴 푯대들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요구하실 때마다 응답하려고 노력하십시오. 행동으로 그분을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지니십시오. 그 행동들은 보잘것없을지라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 생활은 그대가 날마다 신심 생활에서 노력하는 가운데 굳세어집니다. 그대는 사랑으로 신심 생활을 이행해야 합니다. 아니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가는 길은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정결한 마음 깊은 곳에서 하느님을 찾으십시오. 그대가 하느님께 충실할 때 그대의 영혼 깊은 곳에서 하느님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 친밀함을 절대로 잃지 마십시오.

예수님께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또는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를 때, 그대 안에 계시는 그분을 찾으려는 용기가 생기지 않을 때는, 지극히 정결하시고 놀라우신 마리아께 나아가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성모님, 주님께서는 성모님이 직접 성모님 손으로 하느님을 돌보고 기르시기를 원하셨으니, 당신 아드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저희 모두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그대는 매일 보잘것없는 일들을 완벽하게 행하는 영웅적 덕행이 모든 영혼에 스며들게 해야 합니다. 마치 세상 구원이 그러한 행위들 하나하나에 달린 것처럼 말입니다.

신심 생활을 통해, 그대는 하느님의 자녀이자 그리스도인이라는 그대의 조건에 적합한 덕행들을 실천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런 덕행들과 함께 그대는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큰 영적 가치들을 두루 얻게 될 것입니다. 그것들은 빛나는 보석과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동료 인간들을 섬기는 가운데 그것들을 모아 하느님 옥좌에 바쳐드립니다. 소박함, 쾌활함, 충성스러움, 평화, 자그마한 포기 행위들, 알지 못한 채 지나치는 사소한 봉사 행위들, 성실한 책무 이행, 그리고 친절함이 바로 그러한 것들입니다.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의 사랑, 그리고 그분의 사도직을 위한 일보다 여러분 자신을 위한 일을 더 만들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그대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한가운데서 가야 할 길을 분명히 보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이름 없는 사람이 되어 가장 먼 구석에서 아무도 모르게-오직 하느님과 그대만이 알게-일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종종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비록 끝에 가서는 그것이 편함을 찾는 길이라고 인정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선교사로 일한다는 생각과는 별개로, 단지 그렇게 남모르는 희생적 삶을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그대 마음에 떠오른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거룩하고 자연스러운 책무들을 수행하는 것은 그대의 소명이 아니라고 여기면서 그런 책무들에서 벗어나 수도 단체에 “숨으려” 한다면 그대는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평화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그대의 뜻을 행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대의 ‘성소’는 의무 불이행이라는 다른 이름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신성한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전투를 마주하기를 순전히 인간적으로 꺼리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될 일입니다!

거룩한 정결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우리는 모두 큰 어려움에 노출돼 있습니다. 그 위험은 영적인 생활에서나 직업 생활에서 안일함에 빠져드는 위험입니다. 그 위험은─하느님께서 혼인 성소를 주신 이들에게도 실제적인 것으로─감정 없는 노총각이 되고 이기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위험에 한 치도 양보하지 말고 필사적으로 맞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늘 이 작은 나귀 곧 우리 육신에 대해 참고 살아야 할 것이기에, 관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그리고 너그럽게 작은 고행들을 실천해야 합니다. 물론 때로는 큰 고행들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대를 지켜보시는 일을 절대로 그치지 않으십니다.

그대의 정결을 죄에 떨어지는 일이나 그런 기회를 피하는 데에 국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결은 절대로 냉소적이고 산술적인 부정일 수가 없습니다.

정결은 덕이며 그러하기에 성장하고 더 완전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대는 깨닫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그대의 처지에 맞게 절제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대는 영웅적인 덕행으로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그윽한 향기는 또한 우리의 깨끗한 삶의 향기이기도 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각자의 처지에서 저마다 가꾸어야 하는 그 정결의 향기이기도 합니다. 기뻐하며 긍정하는 거룩한 순결의 향기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견실하면서도 온화하며 품위가 있어서 부적절한 말들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들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수호천사들에게 지켜 주시도록 미리 감사를 드리십시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이름이 있습니다. 초기부터 사용되어 온 그 이름은 ‘하느님을 모시고 다니는 이’입니다.

그대는 실제로 그 놀라운 이름으로 불릴 수 있도록 그렇게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하느님을 모시는 이답게 처신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다음에 그대의 처신을 바로 하십시오.

각각의 사건이나 환경 뒤에 계시는 주님을 발견하십시오. 그러면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고 하느님께 응답하려는 더욱 큰 갈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를 기다리시면서 ‘당신을 섬기겠습니다.’라고 우리가 한 결심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자신을 죽이고 자신을 부정하며 자신을 잊고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걷고자 하는 실제적인 지향을 날마다 새롭게 하여, 우리의 이 비참함을 하느님의 내밀하고 영원한 위대함으로 바꾸십시오.

주님! 저를 온전히 당신의 것으로 삼아 주시어, 제아무리 거룩한 사랑이라도 당신의 상처 입은 성심을 통하지 않고서는 제 마음을 차지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사려 깊고 예의 바르도록 노력하십시오. 무례하지 마십시오!

사려 깊도록 노력한다는 것은 겉으로만 그런 척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성공합니다. 사랑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랑은 그래서 그대 삶의 비밀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고통을 겪으면서도 기뻐하십시오. 그대의 영혼을 강인하게 하십시오. 그대의 의지를 옹골차게 하십시오. 자기 포기에 관해서라면, 하느님의 뜻에 단단히 결부시키십시오. 그대의 삶은 효력을 낼 것입니다.

신심과 단순함에서는 어린아이가 되고, 힘과 용맹함에서는 지도자가 되십시오.

평화, 그리고 그 평화와 함께 오는 기쁨은 세상이 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늘 “평화를 이루면서”도 늘 전쟁을 일삼습니다. 자기 안에서 싸워야 한다는, 또 도움을 청하러 하느님께 가야 한다는 권고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도움을 청한다면, 그분께서는 승리하실 것이고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 사회와 세상을 위해 평화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해나간다면, 우리는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승리하는 사람이 기쁨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그대의 삶과 그대의 일이 절대로 부정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것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긍정적이며 낙관적이고 발랄하며 쾌활하고 평화롭습니다. 또 그래야 합니다.

사람들의 삶에는 정말로 필수적인 두 가지가 있습니다. 혼인에 관한 법과 교육과 관계되는 법입니다. 이 두 영역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은 확고하게 서 있어야 하며 강인하고 공정하게 싸워야 합니다. 전 인류를 위해서 말입니다.

기쁨이란 싸움 중에도 간직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선입니다. 기쁨은 평화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전쟁에서 승리한 결실이며, 성경에서 보듯이 인간의 이 지상 생활은 전투입니다.

우리의 이 신성한 싸움은 불가사의하게 평화를 심는 일입니다.

이 싸움을 멈추는 사람은 교회에, 그분의 초자연적으로 시작하신 일에, 그분의 형제들에게 그리고 모든 영혼에 해악을 끼칩니다.

그대 자신을 성찰하십시오. 그대는 그대의 영적 투쟁에 하느님을 위한 더욱 활기찬 사랑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까? 나는 그대를 위하여 그리고 모든 이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대도 똑같이 하십시오.

예수님, 만일 제 안에 어떤 것이 당신을 언짢게 해드린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을 뿌리째 뽑아내 버리도록 말입니다.

내적 생활에는 적이 있습니다. 보잘것없고 어리석어 보이지만 불행히도 그 효과는 대단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양심 성찰의 노력을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수덕(修德) 생활에서, 양심 성찰은 사랑의 필요성에, 분별의 필요성에 응하는 것입니다.

그대 안에 하느님의 영에 어울리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을 곧장 제거하십시오.

사도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유다만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혹시 그도 한때는 기적을 행하였는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떠나 그릇된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의 영에 걸맞지 않은 것을 과감하고 용기 있게 끊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의 하느님, 제가 언제쯤 참으로 회심하게 될까요?

나이가 든 다음에 성인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실수가 될 것입니다.

지금 바로 시작하십시오. 진정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면서. 그대의 일과 일상의 의무들을 이행함으로써 말입니다.

성인이 되기 위해 나이 들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착각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을지 그대는 절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섬세한 감수성을 허락하시어 소죄가 얼마나 나쁜지를 깨닫도록 해달라고 청하십시오. 소죄가 그대 영혼의 철저하고 근본적인 원수임을 인식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피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망설이지 말고 그대의 삶을 차분하게 돌아보면서 용서를 청하십시오. 확고하고 단호한 결의로 그대가 힘들어하는 구체적인 이런저런 결점들을 개선해 나가도록 하십시오.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고질화한 저 악습들이 당연히 이행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지향들로 가득한 것은 참으로 거룩한 일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칭찬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마십시오. 그대는 현실을 살아가는 영혼이 되어야 합니다. 그 선한 지향들을 실현하려면 확고하게 결의를 굳혀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나의 아들이여, 그대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에 힘입어서 말입니다.

그대는 열정에 타올라 내게 이렇게 물었지요. “주님께 대한 저의 사랑을 유지하고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의 아들이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리십시오. 그리고 그 자체로는 좋지만, 그대가 그대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십시오. 그대는 항구하게 그리고 행동으로 이렇게 되풀이하십시오. “주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나이다.”

성인! 하느님의 자녀라면 지나치도록 덕을 실천해야 합니다. ‘지나침’이라는 표현을 여기서 써도 괜찮다면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마치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듯이, 그 사람 안에 반영된 자신의 모습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목표를 매우 높게 잡아야만 다른 사람들이 중간 정도로라도 도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대 마음속에 악에 기울어지는 성향을 보게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악에 기울어지는 성향은 평생 그대 곁에 있을 것입니다. 이 짐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이 성향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모든 수단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사, 신심 생활, 거룩한 일이 그것입니다.

인내하며 그 수단들을 활용하십시오. 낙담하지 말고 거듭거듭 시작할 준비를 늘 하십시오.

주님, 저 자신에게서 저를 구해 주십시오.

규칙적으로 또 체계적으로 기도하지 않는 사도는 반드시 미지근해지고…그다음에는 사도이기를 그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지금부터 제가 다른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더는 “내”가 되지 않게 하시고, 주님께서 제게 바라시는 “그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당신께서 저에게 요청하시는 그 어느 것도 거부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기도하는 법을 알게 해주십시오. 고난을 겪는 법을 알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영광 외에는 어떤 것도 염려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언제나 당신의 현존을 느끼게 해주십시오.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저의 예수님, 항구한 친교 안에서 당신을 갈망하게 해주십시오. 성령께서는 제게 불을 놓으십시오.

주님께서 그대에게 말씀하셨지요. “너는 나의 것”이라고.

지극히 아름다우시고 지극히 지혜로우시며 지극히 빛나시며 지극히 선하신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그대가 당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그대가 그분께 응답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그대의 삶에서 성 바오로가 언급한 그 무게에 짓눌린다고 느끼더라도 놀라서는 안 됩니다. 성 바오로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대는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어머니께 의탁하십시오. 그분은 또한 그대의 어머니이십니다. 이분들은 절대로 그대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영적 지도에서 듣는 조언을 마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듣는 조언처럼 받아들이십시오.

그대는 나날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길을 제시해 달라고 요청했지요. 마음을 열고 무엇보다 먼저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은 것을 털어놓으라고 나는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마귀는 늘 패배할 것입니다.

그대 영혼을 활짝 여십시오. 확실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말입니다. 그러면 하느님 사랑의 광채가 그대 영혼의 마지막 구석까지 도달해 비출 것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말 못 하게 하는 마귀가 그대 영혼에 들어온다면, 그 마귀는 온갖 것을 망쳐 놓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대가 그 마귀를 즉각 제거해 버린다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입니다. 그대는 기쁘게 해나갈 것이고 모든 것이 좋아질 것입니다.

영적 지도를 받을 때는 (언제나 예의를 갖추면서) “야만스러울 정도로 솔직하도록” 굳게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 솔직함은 즉각적이어야 합니다.

그대의 영적 지도자를 사랑하고 그분에게서 도움을 찾으십시오. 영적 지도를 받을 때는 치유를 갈망하면서 아주 솔직하게 그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대 마음이 부패했으면 부패한 그대로를 보이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부패를 절대로 제거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그대가 겉으로만 그 상처를 깨끗하게 해주는 사람에게 간다면, 그대는 겁쟁이입니다. 진실을 감추고 가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에게 해가 될 따름입니다.

진실을 말하기를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때로는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침묵을 지키는 편이 낫다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그렇지만, 게을러서, 편한 게 좋아서, 또는 겁이 나서 침묵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진리이신 분이 사람들 가운데 오신 지 2000년이 지났어도 세상은 거짓을 바탕으로 번성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해야 할 일입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선포하고 진리를 듣는 데에 익숙해질 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더 분별 있게 될 것입니다.

신앙 문제에서 물러서는 것은 그릇된 사랑이 될 것입니다. 악마적이고 현혹하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성 바오로가 요구하듯이, 우리는 신앙에 굳건해야 합니다.

이것은 광신주의가 아니라 우리의 신앙을 아주 단순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를 싫어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부수적인 문제에서 양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문제들에선 양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등잔의 기름을 나누어 줄 수는 없습니다. 신랑이 오셔서 등잔불이 꺼져버린 것을 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교리를 받아들이는 데에 꼭 필요한 조건은 겸손과 순종입니다.

교황님의 말씀을 믿음과 겸손으로 내면 깊이 그리고 실제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하십시오.

그대는 나날이 더욱 큰 애정으로 교황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그분을 위해 기도하며 고행하십시오. 교황님은 교회의 주춧돌이시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성화 임무와 통치 임무를 시대를 초월하여 세상 마지막 날까지 수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신 교황님께 그대는 또한 그대의 가장 깊은 사랑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한 공경과 가장 완전한 복종과 가장 따뜻한 애정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사랑과 권위의 서열에 있어서 하느님과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이신 어머니 성모님 다음으로 교황 성하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대는 교황님과 주교님들을 짓누르는 그 무거운 짐을 날마다 생각하여 참된 애정으로 그분들을 존경하며 기도로 그분들을 돕기를 바랍니다.

성모님께 대한 그대의 사랑은 더욱 활기차야 하고 더욱 초자연적이어야 합니다.

단지 청하기 위해서만 동정 마리아께 가지 마십시오. 드리기 위해서도 가야 합니다. 그대의 애정을 드리십시오. 그분의 거룩하신 아드님에 대한 그대의 사랑을 드리십시오. 그리고 다른 이들에 대한 봉사 행위로써 그분께 그대의 애정을 보여드리십시오. 그들 또한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범이십니다. 그분을 본받읍시다.

거룩한 교회를 그리고 전 인류를 섬김으로써 그분을 본받읍시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강생의 장면을 관상할 때 그대의 마음속에 “겸손하게 실천”하려는 결심이 강화될 것입니다. 그분께서 얼마나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의 가련한 본성을 취하시는지를 보십시오.

바로 그렇기에 날마다 그대는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즉각 반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허락하시고자 하시는 모욕이나 창피를 받아들이도록-그리고 원하도록-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대의 삶을 자연스럽게 살아가십시오. 이 점을 강조합니다. 그대의 행위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드러나도록 하십시오. 정상적인 거울이 이미지를 일그러지게 하거나 우스꽝스럽게 보이도록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반영하듯이 말입니다. 만일 거울처럼 그대가 정상적이라면, 그대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반영하게 될 것이고 그 생명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대가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오로지 그대 개인의 안락함만을 생각한다면, 다른 모든 사람, 심지어 세상 자체마저도 그대를 중심으로 놓고 본다면, 그대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거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여길 아무런 권리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각자를 위해 당신의 영혼, 당신의 온 생명을 주셨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대는 ‘지적인 겸손’을 그대 삶의 금언으로 삼도록 노력하십시오.

지적인 겸손에 관해 곰곰 생각해 보십시오. ‘지적인 오만’이 얼토당토않다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요? 교회 학자인 저 성인은 이를 잘 설명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께서 어린이가 되시는 것을 보면서도 아직도 이 세상에서 위대해 보이기를 원한다면, 이는 가증스러운 무질서입니다.”

그대 옆에 그 누군가가 다가오거든 그가 누구든지 간에 하느님의 자녀로서 또 하느님의 자녀로 살면서 그대가 경험하는 그 기쁨을 자연스럽게 전하는 길을 찾으십시오.

거룩하신 스승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봉사 사명은 훌륭하고 아름다운 사명입니다. 그렇기에 자기 절제가 따르는 이 선한 정신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활동에 배어 있어야 하는 자유로운 사랑과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습니다.

그대는 누구에게도 결코 무자비하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을 두고 그대의 자비를 입기에 합당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그대 역시 자비를 입기에 합당치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대는 세상에 태어나기에 합당치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기에 합당치 않으며 하느님의 아들이 되기에 합당치 않고 가족을 두기에 합당치 않으며….

형제를 바로잡는 일에 태만하지 마십시오. 형제를 바로잡는 일은 초자연적 사랑의 명백한 표징입니다. 그대는 그 일이 어렵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모르는 척하기가 더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 처신이 더 쉽지만, 그것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대는 그 태만에 대한 셈을 하느님께 치러야 할 것입니다.

형제를 바로잡아야 할 때는 그대가 하는 말의 내용과 방식에서 대단히 자비롭게 그리고 사랑으로 바로잡으십시오. 그 순간 그대는 하느님의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곧 그리스도의 자비롭고 온화한 사랑을 사방에 전파할 때, 서로 지탱해 주는 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넘어지려고 하는 사람은 이 형제적 힘을 통해 하느님께 충실하도록 자신을 지탱하고 격려해주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누구에게나 매력을 주는 성화의 길을 닦으려고 열망하면서 고행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세밀하게 실천하십시오. 때로는 미소 한 번이 회개의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내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대는 하루하루 기쁘고 분별 있게 그리고 너그러이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고 그들이 더욱 기쁜 삶을 누리도록 성가신 일을 마다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참다운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대는 어디에서나 내면의 삶에서 나오는 ‘좋은 유머’ 곧 쾌활함을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대화가 그대를 중심으로 맴돌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고행입니다. 그대는 이것을 실천하십시오.

양심 성찰을 위한 좋은 방법을 알려 드리지요.

오늘 내게 하느님의 손길로부터 왔거나, 동료들의 처신에서 비롯했거나 혹은 나의 나약함에서 온 어려운 일들을 속죄의 정신으로 받아들였는가?

수많이 그분을 상하게 해드렸다고 느끼는 그 슬픔을 우리 주님께 속죄로 바쳐드렸는가? 덕행의 길에서 거의 진보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내적인 지독한 당혹함과 치욕에서 나오는 부끄러움을 그분께 바쳐드렸는가?

습관적이고 관례로 하는 고행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늘 똑같은 고행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고행의 정신은 변함없고 습관적이고 관례적이어야 합니다.

그대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 그분의 옷차림을 하고 그분과 같아지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신앙을 활기차게 하십시오. 희생과 봉사로 가득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방해가 되는 온갖 것을 제거해 버리십시오.

성덕은 이완과 수축이 자유로운 근육과 같이 유연함을 지닙니다. 성인이 되고자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고행을 실천하면서도, 힘들다고 여기는 다른 어떤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느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닌 한, 그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편한 마음으로 감사드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다르게 행동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넝마 인형처럼 경직되고 생기 없게 될 위험을 무릅쓰게 될 것입니다.

성덕은 골판지처럼 뻣뻣하지 않습니다. 성덕은 미소 지을 줄 압니다. 양보할 줄 압니다. 그리고 희망할 줄 압니다. 성덕은 삶입니다. 초자연적인 삶입니다.

어머니! 저를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당신 아드님을 찾아내 꼭 만나 뵙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저의 전 존재로 그분을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저를 잊지 마소서, 성모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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