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할 수 있습니다!

생길 수 있는 어려움에 대해 그대에게 알려 주고 싶습니다. 피곤함과 낙담이라는 유혹입니다. 삶, 그대의 옛날 삶이 어떠했는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지 않습니까? 목표도 없고 목적도 없고 자극도 없는 정처 없는 삶이었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빛으로 또 그대 자신의 헌신으로 삶의 새로운 방향을 찾았고 그대는 기쁨으로 가득 찼지요?

그대는 새 삶을 옛날 삶과 바꿀 만큼 어리석게 굴지 마십시오.

이유야 어떻든 계속 나아갈 수 없다고 느낀다면 하느님께 의탁하며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당신을 신뢰합니다. 당신께 의탁합니다. 나약한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신뢰에 차서 거듭 말씀드리십시오. “보십시오, 주님. 제가 얼마나 더러운 걸레인지요. 제 삶이 너무나 비참한 것 같습니다. 저는 당신의 자녀라고 불릴 가치가 없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주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거듭거듭 말씀드리십시오.

오래지 않아서 그대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또 이런 말씀도 들을 것입니다. “일어나 걸어라!”

그대는 여전히 망설이면서 내게 이렇게 말했지요. “주님께서 언제 제게 더 많이 요청하고 계시는지를 저는 잘 압니다.”

나는 그때 그대가 다만 그분과 하나 되기만을 얼마나 원했는지를 그대에게 일깨워 주고 싶은 생각뿐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대는 계속 움츠러드는가요?

“날마다 나 자신에게 조금씩 죽기”라고 그대가 한 결심을 어떻게든 이행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기쁨 그리고 초자연적이며 인간적인 낙천주의는 육체적 피곤함과 고통과 눈물 속에서도 누릴 수 있습니다(우리에게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내면생활이나 사도직 활동에서 오는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과 낙천적인 생각을 지닐 수 있습니다.

참 하느님이시고 참사람이신 그분, 그리고 천상에서 온갖 행복을 누리신 그분은 피로와 피곤, 눈물과 고난 등등을 체험하심으로써 초자연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대에게 기도하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대는 이를 분명히 압니다.

그런데도 그대의 반응은 얼마나 빈약한지요. 그대에게는 온갖 것이 힘듭니다. 그대는 너무 게을러서 걸음마를 배우지 못하는 아기와 같습니다. 하지만 그대의 경우에는 단순히 게으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두려움이며, 또한 아량의 부족이기도 합니다.

자주 이렇게 반복하십시오. “예수님, 제 영혼이 당신께서 요청하시는 것과 다른 고상한 야망을 추구하는 것 사이에서 망설이게 된다면, 이제부터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당신의 길을 택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저를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하느님과 합일을 추구하고 그대 자신을 저 확실한 희망의 덕으로 채우십시오. 제아무리 깜깜한 밤이라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비의 빛으로 그대를 비추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저의 비참함이 저를 짓누르지만, 저를 굴복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속죄할 것입니다. 사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지요. “성 바오로처럼 저는 저의 약함이 좋게 활용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신뢰하는 이들을 저버리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그렇게 계속하십시오. 분명히 말하거니와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대는 성공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의 비참함과 단점들을 극복할 것입니다.

효과적인 목표를 세우고자 “믿습니다”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하고 말씀을 드리기에 적합한 시기는 언제든지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찬미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거룩하신 삼위일체께 대한 각별한 신심을 지니도록 하십시오. ‘천주 성부를 믿나이다. 천주 성자를 믿나이다. 천주 성령을 믿나이다. 천주 성부를 바라나이다. 천주 성자를 바라나이다. 천주 성령을 바라나이다. 천주 성부를 사랑하나이다. 천주 성자를 사랑하나이다. 천주 성령을 사랑하나이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를 믿고 바라고 사랑하나이다.’

이런 신심은 초자연적 영신 수련의 하나로 필요합니다. 이 신심은, 말만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생명을 얻는, 초자연적 결실을 풍성하게 누리는 체계, 방법, 절차, 유일한 길은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의 충고를 따르는 것입니다. “모두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

기도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저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마음은 모든 선한 사람의 마음을 합친 것보다 더욱 민감합니다. 착한 (그런대로 착한)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아무런 만족이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사랑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면, 또 자기를 사랑하는 그 사람이 유일하게 원하는 것이 멀리서나마 사랑받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그 사람은 그와 같은 사랑에 곧 응답할 것입니다.

만일 ‘사랑받으시는 그분’이 전능하셔서 무엇이나 다 하실 수 있다면, 그분은 그 피조물(그 비참하고 가련한 영혼)의 충실한 사랑에 마침내 항복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 피조물이 필요로 하는 아름다움과 지혜와 초인적 힘을 주시어, 당신을 경배하는 그 피조물의 가난한 마음을 보시는 예수님의 눈이 더러워지지 않게 해주실 것입니다.

아들이여, 사랑하십시오. 사랑하고 바라십시오.

그대가 희생으로 사랑을 심는다면, 또한 사랑을 거두어들일 것입니다.

아들이여, 그대는 모든 사람이 그분을 사랑하게 하려는 갈망으로 불타오르지 않습니까?

어린이 예수님이며 청소년 예수님. 주님, 저는 당신을 이렇게 보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더 용기를 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저는 당신을 아주 어리고 무력한 꼬마로 보기를 좋아합니다. 당신이 저를 필요로 하신다고 느끼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도실에 들어갈 때마다 다시 한번 어린 꼬마가 되어 주님께 다른 누구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말씀드린답니다.

성체를 자주 경건하게 모시는 이들의 행동에, 또 그에 앞서 그 영혼에 성찬례가 얼마나 놀라운 효력을 지니는지요!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이 아주 뛰어나다 하더라도, 빵 한 조각 때문에 그 사람들이 당신에게 열광하여 환호했다면, 당신께서 저희에게 주신 그 많은 은사에 대해, 특별히 성찬례 안에서 남김없이 저희에게 주시는 데 대해 저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요?

착한 아들이여, 어떻게 지상의 연인들이 사랑하는 이가 준 꽃과 편지와 추억에 입 맞추는지를 보십시오.

그런데 그대는, 어떻게 늘 그대 곁에 그분이 계신다는 것을 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분을 모실 수 있다는 것을 잊을 수 있습니까?

기도실에 자주 얼굴을 들이밀고 예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저를 당신 품에 맡겨드린다고.

그대가 가진 모든 것, 곧 그대의 비참함을 그분 발아래 두십시오.

이렇게 하면, 그대가 하지 못한 수많은 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절대로 평화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저자가 바친 이 기도를 결연하게 바치십시오. “주님, 당신은 저의 피난처이시고 저의 힘이시니, 저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장담하건대 하느님께서는 그대가 유혹을 당할 때, 심지어 넘어질 때라도 “한낮의 마귀”가 파놓은 함정으로부터 그대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연륜이 들고 덕이 성숙해지면 하느님만이 그대의 성채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살면서 마지못해 한 봉사가 좋게 평가받는다고 생각합니까? 명백히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결론지어도 될 것입니다. ‘(봉사를) 하지 않은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대는 마뜩하지 않은 표정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대는 자신의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기쁨으로 그분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의심이, 멋지게 위장한 유혹들이 그대에게 엄습합니다.

이것은 마귀가 그대를 원수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은 절대로 그대를 보호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그대는 말합니다. 나는 그대의 그 말이 좋습니다. 계속 분투하십시오!

개인적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에 관해 이기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평온해 보이지만, 하느님의 원수는 잠을 자지 않습니다.

예수 성심 또한 깨어 지켜보십니다! 여기에 저의 희망이 있습니다.

성성(聖性)은 분투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결함이 있는 것을 알고 그 결함들을 피하고자 영웅적으로 노력하는 데에 있습니다.

강조합니다만, 성성은 이러한 결함들을 극복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함들을 안고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미 그대에게 말했듯이, 우리는 오만해질 것입니다.

주님, 감사드립니다.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유혹을 허락하심으로써 당신 은총의 아름다움과 강인함으로 저희가 승리자가 되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주님, 감사드립니다. 그 유혹들로 인하여 저희가 겸손한 자 되게 하시니!

저의 주님,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가엾은 당신 아들이 빠져들게 될 바닥없는 심연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저의 어머니. 저는 또한 당신의 아들입니다.

하느님의 도움 없이 그대는 순결한 삶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겸손을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어머니이자 당신의 어머니이신 분을 통하여 당신께 도움을 청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대 마음의 고독함 속에서 바로 지금 성모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시끄럽게 소리 내지 말고 말씀드리십시오. “저의 어머니, 저의 이 가련한 마음이 때때로 반란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도와주신다면….” 성모님은 과연 그대를 도와주시어 마음을 정결하게 유지하고 하느님께서 추구하라고 부르신 그 길을 따르게 해주실 것입니다. 동정 마리아께서는 늘 그대가 하느님 뜻을 더 쉽게 이행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거룩한 순결을 보존하고 정결한 삶을 살기 위하여 그대는 날마다 사랑하며 고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때로는 거세게 엄습하는 가련한 육신의 충동을 느낄 때마다, 그대의 십자고상에 입맞춤하십시오. 비록 사랑 없는 행위처럼 여겨지더라도 굳은 의지로써 수없이 입맞춤하십시오.

큰 도움이 필요한 복음서의 그 사람처럼, 날마다 주님 앞에 나서서 천천히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보게 해주십시오. 주님께서 제게 기대하시는 것을 보게 해주시고 당신께 충실하여 분투하게 해주십시오.”

저의 하느님, 당신이 착한 목자이시고 저희는 당신 양 떼의 양들임을 알 때, 항구하며 인내하기가 얼마나 쉬운지요!

착한 목자는 자기 양 하나하나를 위해서 자신의 온 생명을 바친다는 것을 우리는 아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대는 기도하면서 성인이 되고자 하는 결심을 다졌습니다. 그대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주님, 반드시 이룰 것입니다. 저 자신을 확신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당신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말을 이해합니다.

은총에 기대지 않고 그대 혼자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길을 끊어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은총으로 그대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대는 그리스도에게서 배워서 그분의 삶을 모범으로 따르고 싶습니까? 거룩한 복음서를 펴서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또 그대와 나누시는 대화에 귀 기울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좋은지를 아주 잘 아십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뜻을 사랑하며 언제나 사랑할 것입니다. 그분은 ‘꼭두각시들’을 잘 조종하시니, 내가 청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무엇이나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이 집요하게 방해 공작을 펴더라도 말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겸손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저 불쌍한 여인은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 옷자락에 손을 댈 수 있다면 내가 낫겠는데.’

그 여인이 보인 겸손은 그녀 신앙의 결과이자 또한 표징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짐을 지우실 때는 짊어지고 갈 힘도 함께 주실 것입니다.

그대는 양심 성찰을 할 때 하느님을 더 잘 알고 그대 자신도 더 잘 알도록 해달라고 성령께 청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그대는 날마다 회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적 지도. 그대가 어느 정도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지 또 드리고 싶어 하는지를 검증하고자 누가 그대의 영혼을 뒤흔들 때 초자연적 감각을 지니고 거룩한 철면피가 되어 대항하지 마십시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놀라운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는 솔직한 마음을 반영하는 말로 천사에게 질문합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보면서, 한 가지 분명한 규칙을 확인합니다. 평화를 간직하고 또 평화롭게 살기 위해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의 영적 지도자들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아주 솔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철부지 아이는 자기 손가락에 박힌 가시를 꺼내기 위해 엄마가 바늘을 찔러 넣을 때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고불고 법석을 떨지만 사리 분별이 있는 아이는 아마도 연약한 육신으로 인해 눈물을 글썽이겠지만 좋은 엄마를 고맙게 여기며 바라봅니다. 엄마는 아들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상처가 더 심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니까요.

예수님, 제가 사리 분별이 있는 아이처럼 되게 해주십시오.

어린 그대, 작은 당나귀. 주님께서 오물투성이가 되어 시커멓게 된 그대의 잔등을 사랑으로 깨끗이 씻어 주시고 융단으로 된 안장을 채워주시며 빛나는 보석으로 치장해 주셨다면, 가련한 당나귀, 그대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대가 잘못하면 저 아름다운 안장을 땅바닥에 처박을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대 스스로는 그 안장을 다시 채울 수 없다는 것을.

하느님의 자녀라는 데서 평안을 얻으십시오. 하느님은 한없이 온화하시고 사랑이 무한하신 아버지, 그대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을 자주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혼자 있을 때 말씀드리십시오.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아주 많이 사랑한다고, 아버지의 아들인 것이 자랑스럽고 힘이 난다고.

기쁨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데서 오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특별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받아 주시고 도와주시며 용서하신다는 것을 아는 데서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 점을 항상 잘 기억하십시오. 비록 때로는 모든 것이 망가지는 것 같아도 아무것도 망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전투에서 패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표시하는 최상의 길은 그분의 자녀라는 사실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불쌍한 사람이 갑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대는 이 지상에서 오로지 그대의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을, 모든 것에서 그분의 영광만을 염려합니다.

꼬마 친구여, 그분께 말씀드리십시오. 예수님, 제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저를 사랑하시는 것을 제가 알기에, 문제 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모든 게 잘 되고 있습니다.

“저는 성모님께 많은 것을 청했습니다.” 그대는 내게 이렇게 확언하고 나서는 다음과 같이 바로잡았습니다.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저는 성모님께 많은 것을 드러냈습니다.”

“내게 힘을 주시는 그분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분과 함께라면 실패란 있을 수 없으며, 이런 확신은 우리에게 승리자의 정신으로 일을 대하게 하는 거룩한 ‘우월감’을 갖게 해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캔버스 화폭 앞에서 저 예술가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고 싶은 깊은 갈망으로 외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주님, 당신을 위해 그리고 싶습니다. 서른여덟 개의 심장을,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서른여덟 명의 천사를, 당신의 천상 하늘을 장식하는 서른여덟 개의 기적을, 당신 망토에 서른여덟 개의 태양을, 서른여덟 개의 불꽃을, 서른여덟 개의 사랑을, 서른여덟 개의 광기를, 서른여덟 개의 기쁨을….”

그런 다음에 이 화가는 겸손하게 인정했습니다. 그것은 상상이며 바람일 따름이라고요. 실제로 그가 그리는 것은 눈을 기쁘게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괴롭게 하는 미완성의 그림 서른여덟 편입니다.

우리에게는 천사들이 우리 말에 복종하도록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거룩한 천사들이 언제나 우리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대를 인도하시도록 해드리십시오. 그분께서는 아마도 그대의 게으름까지 포함해 온갖 역경을 활용하여 그대를 ‘당신의 길’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께서 그대의 일을 이루신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두려워 말고 집요하게 간청하십시오. 복음서에서 읽은, 빵을 많게 하신 장면을 떠올리십시오. 그분께서 얼마나 넓은 마음으로 사도들에게 말씀하시는지를 주목하십시오. 빵이 몇 개나 있느냐? 다섯 개?… 얼마나 많은 것을 청하느냐? 그리고 그분께서는 주십니다. 여섯 개, 백 개, 수천 개…. 왜?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지혜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아시고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가 바라는 것 훨씬 이상으로 나아가실 수 있으시며 또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빈약한 정신이 식별할 수 있는 것 훨씬 이상으로 보시며 무한히 너그러우십니다.

하느님을 위해 일할 때 ‘우월감’을 지녀야 한다고 나는 그대에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월감은 교만의 표시가 아닌가요? 그대가 내게 물었지요. 아닙니다. 그것은 겸손의 결과입니다. 저를 이렇게 말하도록 하는 겸손입니다. 주님, 당신은 계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닐 따름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완전함을 지니십니다. 능력, 힘, 사랑, 영광, 지혜, 권위, 존엄…. 아빠의 강한 품에 안기는, 또 사랑하는 엄마의 무릎에 앉는 아기처럼 제가 주님과 결합한다면, 저는 당신 신성의 따뜻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당신 지혜의 빛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저의 핏줄을 통하여 흐르는 당신의 힘을 감지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대가 하느님의 현존 속에 머문다면, 귀청을 때리는 거센 폭풍우 위로 태양이 언제나 그대를 밝게 비출 것입니다. 또 포효하는 거친 파도 저 아래로 평화와 고요함이 그대의 영혼을 지배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에게는 하루하루가 쇄신의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은총의 도움으로 종착지에 도달하리라는 것을 확실히 하면서 말입니다. 그 종착지는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대가 시작하고 다시 시작한다면, 그대는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에게 승리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그대가 분투한다면,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대는 정복할 것입니다. 그대가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란 없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으로 가십시오. 아기 예수님께 가십시오. 춤추며 다가가십시오. 다정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가슴에 꼭 끌어안으십시오.

나는 유치하고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행위로 드러납니다. 그대는 친밀한 영혼으로 참으로 아기 예수님을 꼭 얼싸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어린아이임을 아시도록 해야 합니다. 쪼그마하고 천진한 어린아이들이 계단을 오르기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하는지요. 마치 시간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어떻게 해서든 올라갑니다. 그런데 또 다른 계단이 있군요. 두 손과 두 무릎으로 기고 온몸으로 기를 쓰면서 다시 성공합니다. 계단이 하나 더 있네요. 다시 시작합니다. 얼마나 힘겹게 노력하는지! 이제 몇 계단만 더 가면 됩니다. 그런데 뒤뚱거리던 꼬마가 비틀하더니 저런, 떨어집니다. 곳곳에 부딪히고, 눈물범벅이 되어 저 가엾은 꼬마는 출발합니다. 다시 올라가려고 시도합니다.

예수님, 저희도 혼자일 때는 그 꼬마와 똑같습니다. 그 단순한 꼬마의 크고 착한 벗처럼 당신의 사랑 넘치는 팔로 저희를 안아 올려 주십시오. 저희가 꼭대기에 도달할 때까지 저희를 떠나지 마십시오. 그러면, 오, 그러면! 저희는 당신의 자비로우신 사랑에 어떻게 응답할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당돌하게 감미로우신 주님이신 당신께 말씀드릴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 이후로 저만큼 당신을 사랑한 영혼은 결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정말로 미친 이는 더러 있었습니다.

어린이같이 작은 일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나는 그대에게 충고했습니다. 그 일이 판에 박힌 행위에서 나오지 않은 한 결실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봅니다. 영적인 유년기의 길을 따르고 있는 한 영혼이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 나무로 만든 성모님 상을 안고서는 감동한다고 가정합시다.

우리의 지성은 이와 같은 행동에 대해 쓸데없는 짓이라고 거부할 것입니다. 하지만 은총에 감화된 겸손한 영혼이라면 참으로 사랑에서 이처럼 행동하곤 한다는 것을 아주 잘 이해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어린아이인 모든 사람이 지니는 강한 의지는 지성이 굴복하기를 요구하며 또 굴복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만일 저 어린아이 같은 영혼이 밤마다 계속해서 성모님 상을 끌어안는다면 하느님 보시기에 풍부한 결실을 거둘 어린아이 같은 작은 사랑의 행위가 날마다 거듭되는 것입니다.

그대가 참으로 어린아이가 되어 어린아이의 길을 따른다면, 하느님에게 이끌려 그 길을 따른다면, 그대는 무적이 될 것입니다.

한 꼬마의 신뢰에 찬 청원입니다. “주님, 당신을 가장 기쁘게 해드린 이들이 했던 것처럼 그렇게 뉘우치게 해주십시오.”

꼬마여, 누가 또는 뭔가가 그대와 하느님 사이에 끼어든다면, 그대는 꼬마이기를 그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께 아무것도 청하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하는 데에 집중하면서 예수님이 미처 모르고 계시기나 한 것처럼 말씀드릴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기 아버지에게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꼬마여,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저는 오로지 예수님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영적 꼬마처럼 바치는 그대의 기도에서, 그대가 주님께 드리는 말씀이 얼마나 철없는지! 자신의 위대한 벗에게 그 벗의 사랑을 전적으로 확신하며 말하는 꼬마의 확신으로, 그대는 주님을 신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해주십시오!”

그대는 하는 일마다 그르쳤음을 떠올리며 진심으로 인정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신께서 놀라실 일이 아니지요. 저로서는 뭐든 옳게 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를 위해 당신께서 해주십시오. 그러면 그 일이 얼마나 잘 되는지 보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담대하게 계속 말씀드리십시오. “당신 영을 온통 제게 쏟아부어 주시어 그 영에 취하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제가 당신의 거룩하신 뜻을 행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행하고 싶습니다. 제가 만일 행하지 않는다면 당신께서 저를 도우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저를 도와주고 계십니다.”

그대 자신이 작고 가진 것이 없고 나약하다는 것을 아는 게 급선무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천상 어머니의 무릎에 뛰어들어 화살기도를 바치고 애정 어린 시선을 간직하며 마리아 신심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대가 지녀야 하는 자녀다운 정신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마리아께서는 그대를 지켜보아 주실 것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그대의 길에 항구하며 인내하십시오. 행복하게 낙천적으로 항구하며 인내하십시오. 주님께서 모든 장애물을 열심히 치워주고 계십니다.

내 말을 잘 들으십시오. 그대가 분투한다면 성인이 되리라고 나는 절대적으로 확신합니다!

주님께서 첫 사도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낡은 배 옆에서 찢어진 그물을 손질하느라 바빴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즉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그리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도들을 본받고 싶어 하면서도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때때로 생깁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는 집착이 있고 우리의 삶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봉헌하고자 하면서도 이를 기꺼이 끊어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대의 마음을 철저히 성찰하기를 원치 않습니까? 주님의 것을 제외한 어떠한 것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분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도 그렇고 나도 그렇습니다.

주님께 성덕과 사도직에 대한 갈망을 신실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드러내 보이십시오. 그러면 그대 영혼의 빈약한 그릇이 부서지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 그릇이 부서진다면, 새로운 은총으로 복원되어 그대의 성덕과 사도직을 위해 계속 봉사할 것입니다.

그대의 기도는 위선자들의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 자녀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위선자들은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예수님에게서 들을 것입니다.

그대의 기도, “주님, 주님” 하는 그대의 외침은 하늘나라로 향하는 여정 내내 수많은 방식으로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려는 열망과 또 효과적인 노력과도 결부돼야 합니다.

어린 그대여,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오, 예수님, 저는 마귀가 영혼들을 사로잡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대가 하느님 사랑의 부르심을 받아 그분을 따르도록 선택받았다면 그대는 그분께 응답을 드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 이에 못지않게 그대의 형제들을 성덕으로 인도하고 바른길로 가도록 도와줄 의무도 있습니다.

삶의 여정이 힘들수록 분발하십시오. 그대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약속에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 것이 많은 부분 그대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기쁘지 않습니까?

기쁨으로 충만해지십시오. 그리고 그대의 결정을 자유로이 갱신하십시오. “주님, 저도 원합니다. 저의 보잘것없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그대를 그대가 처한 환경에서 빼내 주시지 않습니다. 세상으로부터, 그대의 생활 여건으로부터, 그대의 고상한 인간적 포부로부터 그리고 그대의 직장으로부터도 그대를 빼내 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대가 바로 그곳에서 성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그대의 이마를 땅에 박고는 그대가 빗자루로 쓸어 담은 쓰레기보다 얼마나 더 지저분하고 천한지를 (사실이 그러니까) 생각하십시오.

이런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대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대는 언제 결단을 내릴 작정입니까?

그대 주변의 많은 사람이 단순히 인간적인 이유로 희생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 가련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고는 어쩌면 오로지 교만이나 고집에서 또는 나중에 좀 더 안락하게 지내기 위해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들은 온갖 것을 기꺼이 포기합니다.

하지만 그대에게는 자신을 희생할 많은 동기가 있습니다. 그대가 지고 있는 감미로운 짐은 교회와 그대의 가정과 그대의 동료들과 친구들입니다. 그대는 그 짐에 관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대는 합당한 책임감을 지니고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오, 주님! 성인들, 현자들, 부유한 사람들과 명망가들이 저토록 많은데도 왜 저를 찾으셨는지요? 저는 아무것도 아닌데요.”

그대의 말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그대를 찾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십시오. 그대의 수고와 사랑으로 감사드리십시오.

예수님, 동방 박사들이 별을 따라나섰듯이, 당신의 거룩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이가 동방 박사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을 따라 그들의 길에 항구하며 인내하게 하소서. 동방 박사들은 헤로데의 충고를 일축했습니다. 그런 충고는 언제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당신 구속의 열매가 풍성하게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더더욱, 늘 한층 더욱 풍성하게! 헤아릴 수 없이 풍성하게! 자라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저희를 당신의 복되신 어머니의 착한 자녀가 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행복하게 되는 비결을 알고 싶습니까? 다른 이들에게 그대 자신을 내어주고 섬기되 그들이 그대에게 고마워하기를 전혀 기대하지 마십시오.

만일 그대가 사랑과 섬김의 정신으로, 사제가 아니어도 사제의 마음으로 하느님을 위해 살고 활동한다면, 그대의 모든 행위는 진정한 초자연적 의미를 띨 것입니다. 그대의 삶 전체가 모든 은총의 원천에 합치되어 유지될 것입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영혼들의 거대한 파노라마를 보면서, 또 놀랍고도 두려운 막중한 책임 앞에서, 그대는 때로는 나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저와 함께하시겠다고요? 보잘것없는 저와 함께요?”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서를 펼쳐 예수님께서 태생 소경을 어떻게 치유하시는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분은 땅의 먼지로 된 진흙과 침을 사용하십니다. 하지만 이것이 두 눈에 빛을 가져다주는 묘약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대와 나입니다. 우리의 약함과 쓸모없음을 온전히 의식하면서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선의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우리 자신에게도 빛을 주는 묘약이 될 수 있고 힘을 줄 수 있습니다.

사도직을 수행하는 한 영혼이 그분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 무엇이 필요한지 당신은 아십니다.… 저는 저 자신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우리 주 하느님께서는, 그대가 ‘항구한 인내’로 기도에 정진한다면, 그대가 더욱 효과를 내는 데에, 또 세상에 그분의 나라를 전파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대는 계속 성실해야 합니다. 청하고, 청하고, 청하고…. 그대는 정말로 그렇게 처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주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이 이 지상에서 가장 정직한 여정을 가면서 이해와 용서, 조화와 사랑과 평화의 씨앗을 뿌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대는 어떻습니까?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구속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고 그대는 공동 구속자이며 또 공동 구속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 신자가 된다는 것은 고립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의 불로 그들을 밝혀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저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자 황후이기를 그치시는 것을 저는 조금도 원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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