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다시 전투를

성 바오로의 권고를 따르십시오. “지금이 일할 때입니다.” 안으로는 그대의 영혼을 도야하고 밖으로는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일할 때입니다. 그대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대는 뉘우치면서 내게 말했습니다. “저 자신이 비참하기 그지없습니다! 너무나 어리석고 욕심으로 가득 차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한 일이라곤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 여기서 시작입니다. 시작이요. 언제나 방금 시작이지요. 그렇지만 날마다 마음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의 그런 노력을 축복해 주시기를!

신부님, 신부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지요. “저는 많은 오류를 범했습니다. 너무 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압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아시고 고려하시는 주 하느님께서는 다만 그대가 겸손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아 날마다 당신을 더욱 잘 섬기도록 분투하기를 바라실 따름입니다. 더욱 내적인 삶을 통해서, 끊임없는 기도와 신심 행위를 통해서 또 그대의 일을 성화하는 데 적합한 수단을 활용함으로써 말입니다.

그대가 당나귀의 덕들을 얻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대가 그 덕들을 이루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압니다. 당나귀는 겸손하고 열심히 일하며 고집스럽게 인내하며 성실하며 발걸음이 확실하며 강합니다. 주인이 좋으면 고마워하며 고분고분합니다.

당나귀의 좋은 자질에 관해 계속 생각하고 당나귀가 쓸모 있는 일을 하려면 어떻게 자기를 부리는 이의 뜻에 맞춰야 하는지를 잘 살펴보십시오. 당나귀 혼자서는…바닥에 뒹굴고 구유로 달려가 울기 시작하는 것 이상은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대도 나와 함께 예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오, 예수님! 당신은 저를 당신의 당나귀로 만드셨습니다.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그러면 저는 항상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 당신의 은총으로 저를 단단히 잡아매시고 이끌어주십시오. 당신께서는 저의 고삐를 잡고 인도하셨나이다.… 제가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저는 세세 대대로 당신을 사랑하겠나이다!

(저자는 시편 73장 22절 이하를 원용하고 있다-옮긴이)

지극히 사소한 고행이 그대에게는 큰 비극처럼 보입니다. 때때로 예수님께서는 그대의 괴팍한 버릇들과 보잘것없는 것들도 활용하십니다. 그대가 고행을 통해 필요한 덕을 쌓도록 말입니다.

저의 예수님, 당신의 사랑에 응답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토록 연약합니다.

당신의 은총으로,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성가실 만큼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말하지만, 영성 생활은 항구하게 시작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시작한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대가 잘못을 뉘우칠 때마다―물론 그대는 날마다 많이 뉘우쳐야 합니다만―그대는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하느님께 새로운 사랑을 드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섬기려면 지금 하는 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예술가는 자신의 손에서 탄생하는 그림이나 조각품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가 이구동성으로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하더라도 그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나는 그 이상을 하고 싶어.’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합니다.

게다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기에, 우리에게서 최상의 응답을 받으실 권리가 있으십니다. 우리는 그분께 맞춰드려야 합니다.

그대는 믿음이 부족합니다. 사랑도 부족합니다. 그러니 즉시 더 자주 예수님께 가서 이것저것 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지체하지 말고 그분을 외쳐 부르십시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그리스도께서 그대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눈먼 소경이 길가에서 줄기차게 외치자 주님께서 멈추셨을 때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저 좋은 친구가 이런 글을 써 보내왔습니다. “주님께 저의 크나큰 잘못들을 용서해 주십사고 수많이 청했습니다. 십자고상에 입맞춤하면서 사랑한다고 말씀드렸고, 요즈음 그분의 자부적(慈父的) 섭리에 대해 감사드렸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과 같이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만)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완벽하다’라는 말을 제 입으로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함께 저는 한 치의 의혹도 없이 온전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죄 많은, 그러나 사랑스러운 피조물에 하신 하느님의 답변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저의 모든 희망이 당신께 있사옵니다.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나는 서둘러 답장을 썼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좋으신 아버지처럼 처신하십니다. 그리고 당신 사랑의 증거를 끊임없이 보여주십니다. 그대의 모든 희망을 주님께 두십시오. 그리고 계속 분투하십시오.”

오, 예수님! 맞습니다. 저는 항상 이 모양입니다. 이렇게 ‘가련한 저’를 위해서 당신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제가 잘 응답했더라면 당신께서는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이 진실이 그대를 무한히 너그러운 사람이 되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우십시오. 그리고 아픔과 사랑으로 견디어내십시오. 주님과 주님의 복되신 어머니는 그대에게서 달리 예우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때로는 마음이 내키지 않아 마지못해 입술로만 기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행동을 계속하십시오. 잠들지 마십시오! 잠들게 되면, 일이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을 때 역경이 덮쳐 그대를 끌고 갈 것입니다.

그대는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예수님, 제가 쓸모 있는 어떤 것을 해야 한다면, 당신께서 저를 위해 해주셔야 합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제가 늘 지금처럼 비참하게 쓰러지는 것이 당신 뜻이라 하더라도 저는 그 뜻을 사랑합니다. 당신께서 기어코 일으켜 주실 테니까 말입니다.”

저의 하느님, 저를 두들겨 패서라도 저를 성인이 되게 해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에 방해물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응답하고 싶습니다. 관대해지고 싶습니다. … 하지만 제가 원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요?

그대는 근심에 잠겨 있습니다. 사랑해야 하지만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사가 그대를 귀찮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수는 그대의 나쁜 성깔이 드러나도록 온갖 짓을 합니다.

나는 이해합니다. 그대가 아주 수치스럽게 느낀다는 것을. 그렇기에 그대는 지체하지 말고 대처해야 합니다.

‘성인 한 사람을 견디어내려면 성인 두 사람이 필요하다’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면, 그것은 참다운 성덕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성인을 두고 비꼬는 말에 불과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오도록 안간힘을 씁니다. 그래서 마귀가 그대를 지배하도록 허용한다면, 선한 사람들은 그대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들은 사탄의 친구들이나 사탄에게 사로잡힌 이들과는 결별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말씀드릴 때, 비록 그대의 말이 온통 빈말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교적 완덕에 이르도록 더 투신하게 해 달라고, 더욱 확고하게 진보하게 해달라고 청하십시오. 그대가 더욱 불타오르도록 해달라고 청하십시오.

그대는 언제나 어떤 환경에서나 그리스도인답게 살겠다는 확고한 결의를 ‘바로 지금’ 새롭게 하십시오.

은총의 길에 장애물을 두지 마십시오. 누룩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자 분투해야 한다는 것을 그대는 깨달아야 합니다.

천천히 신실한 마음으로 말씀드리십시오. “지금 시작입니다” 하고.

만일 불행하게도 주님의 오른손이 일으켜 주시는 변화를 그대 안에서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낙담하지 마십시오. 비천하기에 그대는 이렇게 소리칠 수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저의 예수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행하고 싶습니다. 사랑 지극한 당신의 뜻을.”

그대의 관심이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대의 첫 번째 관심은 그대 자신, 그대의 내적 삶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대에게 제안하신 저 고행이 얼마나 힘겹겠습니까! 찬찬히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그 속죄 행위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이 열망이 어떤 영혼의 지성과 마음과 입술에 새로운 빛으로 거듭 와 닿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가 혼잣말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야 할 그 길을 아주 잘 알았습니다. 자신을 거스르는 길, 자신을 부정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간절하게 탄원했습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골고타를 생각하면 우리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아파하지 않을 수 없으며, 다시는 그분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겠다는 더욱 성숙하고 깊은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돌이나 나무를 조각할 때처럼, 우리는 날마다 회개의 정신으로, 또 작은 고행들로써 우리 삶의 모난 부분들을 조금씩 더 다듬고 결점들을 없애야 합니다. 고행에는 능동적인 고행과 수동적인 고행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능동적 고행은 작은 꽃들을 모으듯이 하루 동안 자발적으로 찾아서 하는 고행입니다. 수동적 고행은 외부에서 오는 것인데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지만 부족한 것은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그대가 그대의 전부를 너그러이 그리고 기쁘게 내놓는다면, 그대는 얼마나 놀랍게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두 팔을 활짝 벌리신 채 그대에게 끊임없이 사랑의 적선을 청하십니다.

그대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께 다가가십시오. 골고타 정상에서 윤곽을 드러낸 저 십자가에 다가가십시오.

하지만 신실한 마음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표상인 저 내적 평정을 지니고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신 분이 겪으신 그 수난의 사건들이 그대의 영혼을 관통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거룩하신 수난 때에 지니신 바로 그 감정으로 고행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고행은 모든 사도직을 위한, 각 사도직의 완전한 실행을 위한 필수 전제입니다.

참회의 정신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인생 여정에서 날마다 발견하는 수많은 사소한 것들, 곧 행동, 포기, 희생, 봉사 같은 것들을 이용하여 그것들을 사랑과 회개의 행위, 고행으로 바꾸어 마지막 날에 꽃다발로, 하느님께 바치는 아름다운 꽃다발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최상의 희생정신은, 열정적으로 시작한 일이거나 아니면 언덕을 올라가는 힘겨운 일이거나 간에, 시작한 일에 항구하게 인내하는 것입니다.

고행에 대한 그대 계획을 영적 지도자가 조절하는 대로 따르십시오.

하지만 고행을 조절하는 것이 언제나 고행을 줄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영적 지도자가 적합하다고 보면 늘릴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지 간에 영적 지도자의 조언을 받아들이십시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말했듯이, 그릇된 욕정이 옷자락을 잡아 우리를 끌어내립니다. 동시에 우리 마음 안에는 훌륭하고 고상하고 순수한 갈망들이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지요.

만일 그대가 주님의 은총으로 금욕한다면, 하느님의 현존을 추구하고 고행한다면, 참회하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면, 그대는 진보할 것입니다.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또 승리할 것입니다.

마음의 수호. 그 사제는 이렇게 기도하곤 했습니다. “예수님, 제 가난한 마음이 밀폐된 정원이 되게 하소서. 제 가난한 마음이 당신께서 거처하시는 낙원이 되게 하소서. 저의 수호천사가 불 칼을 가지고 그 정원을 지키게 하시어 제 안에 들어오는 온갖 애착을 사전에 그 불 칼로 정화하게 하소서. 예수님, 당신 십자가의 거룩한 인장으로 제 가난한 마음을 봉인하소서.”

각자가 자신이 처지에서 용기 있게 순수한 삶을 살아나가야 합니다. 저 위대한 사랑,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안 됩니다.’ 하고 말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성인과 성녀 사이에도 단단한 돌담이 있어야 한다.’라는 분명한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 마음과 감각을 지켜야 하며 위험에 빠지는 기회를 언제나 멀리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거룩하게 보인다 해도, 열정은 피해야 합니다.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제 하느님, 제 눈에는 모든 것이 매력적이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사랑’을 위해 매 순간 시선을 조심하겠습니다.

그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대는 주님께 받은 많은 자비에 응답할 막중한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깨어 있으면서 주의하고 확고한 사랑을 드러내십시오. 그리하면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주님께서 그대의 영혼에 새겨주신 그 독특한 사랑의 모습을 훼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대는 우리의 하느님과 진짜로 친밀한 관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분은 그대에게 아주 가까이 계시며 그대의 영혼 깊숙이 거처하십니다. 그런데 이 친밀한 관계를 키우고 깊게 하려고 노력합니까? 이 우정을 망가뜨릴 미소한 것들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용기를 내십시오. 그대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이면 제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단호하게 모두 끊어버리십시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충실하다면, 그분의 삶이 우리 각자의 삶에서, 내적 성화의 과정에서뿐 아니라 외적 행동에서도 어떻게든 재현될 것입니다.

그토록 선하신 그분께 감사드리십시오.

성인이 되고자 하는 그대의 열렬하고 원대한 갈망을 주님께 자주 말씀드리는 것은 아주 좋은 일 같습니다. 비록 그대가 자신을 결함투성이로 비참하게 여긴다 해도….

바로 그렇기에 주님께 자주 말씀드리십시오.

그대는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분명하게 인식했습니다. 그럴 리는 없지만, 그대가 절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해도, 결코 뒤돌아보는 일 없이 충실하게 그대의 길에 항구하게 정진해야 합니다.

나의 일정에 충실하기. 보통 때뿐만 아니라 특별한 날에도 영웅적으로 잘 지키며 변명하지 않기.

그대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젊은 사도 요한에 대해 거룩한 시샘으로 생각해 봤을 것입니다.

그대는 ‘하느님의 뜻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불리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날마다 필요한 조치를 하십시오.

그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착한 자녀로 살아가고자 갈망하면서 그렇게 행동할 때 젊음과 평온함과 기쁨과 항구한 평화가 온다는 것을.

그대 자신을 하느님 손에 맡겨드린다면, 그대는 밝은 지력과 굳건한 의지력을 성령께 받을 것입니다.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그대는 이미 그대의 상상으로, 그대의 지력으로 이 비유 전체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가지는 쓸모없음을 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마른 가지의 운명이 되어 사람이나 짐승에게 짓밟히거나 아니면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대는 가지입니다. 그 모든 결과를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오늘 다시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이렇게 청원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주님, 이미 용서받은 과거의 가련한 짓들로 인해, 또 미래에 가련한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저희 자신을 당신의 자비로우신 손에 맡겨드립니다. 성덕을 쌓고 사도직을 수행하고자 하는 저희의 바람을 당신께 봉헌합니다. 저희의 이런 바람은 차갑게 보이는 잿더미 속의 밑불과 같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희에게 귀 기울이심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대도 이렇게 주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대의 영혼을 열어 보일 때, 솔직해지십시오! 유치하게 꾸며대지 마십시오.

그런 다음에 순응하며 나아가십시오. 그대는 더 거룩하게 되고 더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닌 데서 위로를 찾지 마십시오. 저 사제가 쓴 글을 보십시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네 마음을 다른 벗에게 털어놓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거룩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성사들 안에서 그리고 끊임없는 수덕적 투쟁으로 우리가 받는 은총을 통해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 영혼에 거처하십니다.

아들이여, 착각은 하지 맙시다. 그대와 나, 곧 우리는 언제나, 우리 삶을 마칠 때까지 늘 싸워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게 될 것이고 평화를 주게 될 것이고 영원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파라클리토 성령께 말씀드리는 것으로 그치지 마십시오. 그분 말씀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대여! 기도할 때, 그대에게 하느님의 자녀임을 깊이 깨닫게 해줄 수 있는 저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십시오. 그대는 아버지에 대한 자녀의 사랑으로 가득 차지 않았던가요. 전에 그대가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께 갔음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을 그대는 벗으로 형제로 연인으로 경배하지 않습니까.

이 충고를 받아들인 뒤에 그대는 이 순간까지 성령께서 그대 영혼 안에 거처하시면서 그대를 성화하신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성령의 현존에 관한 진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대에게는 이 충고가 필요했습니다. 이제 그대는 그대 안에 계시는 그분의 사랑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대는 그분께 말씀을 건네고 그분의 친구가 되고 그분을 신뢰하고 싶어 합니다. 광을 내고 솎아내고 다시 불을 밝히는 그분의 일을 도와드리고 싶어 합니다.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대는 생각했지요.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를 나는 강조합니다. 그분께서는 그대에게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대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분은 온갖 것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는 원하십시오!

그분께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거룩하신 손님이시며 스승이시며 빛이시며 인도자이시며 사랑이시여, 제가 당신을 참으로 제 안에 기쁘게 모셔 들이고 당신께서 제게 가르치시는 교훈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제가 당신을 위한 열성으로 불타오르게 하시고 당신을 따르고 사랑하게 하소서.”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려면, 하느님께 곧장 날아가려면 기도와 보속이라는 튼튼하고 넉넉한 날개가 필요합니다.

구송기도를 바칠 때는 판에 박힌 듯이 반복하는 기도가 되지 않도록 막 사랑에 빠진 사람이 연인에게 말하는 것과 같은 열정으로, 그리고 주님께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는 기회인 것처럼 기도해 보십시오.

그대가 만일 성모님의 자녀라는 데에 긍지를 지닌다면, 그대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하루에, 아침부터 밤까지 동정 마리아 대한 신심을 얼마나 자주 표현하는가?’

매주 토요일과 성모님 축일 전야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보상해야 하는 여러 이유 가운데서 특별히 두 가지 이유를 저 친구는 혼잣말로 말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주일과 성모님 축일에 (보통 마을 축제로 지내는데) 사람들은 기도하는 대신에 공공연한 범죄와 추문이 되는 죄악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상해 드리기 때문입니다. 이는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보기만 하면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아마도 마귀의 영향을 받아서이기 때문이겠지만, 우리 가운데는 하느님의 착한 자녀가 되고 싶어 하면서도 주님과 성모님께 바치는 날들에 대해 마땅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이유가 여전히 아주 타당하다는 것을 그대는 깨달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배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예수님과 나누는 사랑에 찬 대화로서 비록 우리가 감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라도 절대로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저는 늘 이해해 왔습니다. 우리 삶 전체가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고, 우리는 언제나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그토록 크시기에, 그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그만큼 커야 하며, 그래서 거룩한 미사가 거행될 때는 시간이 멈춰야 (할 정도로 집중해야) 합니다.

저 가지들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자라며 열매를 맺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와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빵과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밀착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포도나무이십니다. 우리는 종일토록 그분께 애정 어린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연인들은 그렇게 합니다.

주님을 극진히 사랑하십시오. 그분을 더 잘 사랑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의식을 마음속에 지니고 키우십시오. 바로 지금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꽤 많은 이가 주님을 손안에 모시면서도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나쁘게 대하고 소홀히 대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미사 때뿐 아니라 온종일 주님을 극진히 모십시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실질적으로 만듭니다. 기도는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힘을 줍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그대의 삶 전체가 기도일 수 있고 기도여야 합니다.

개인의 거룩함은 꿈이 아니라 신적이면서도 인간적인 구체적 실제입니다. 그것은 매일 사랑의 행위에서 끊임없이 드러납니다.)

사람들 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 전체를 활기차게 하는 기도의 정신은,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간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일하기 전이나 일하면서나 일한 후에도 기도가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그분과 함께 묵상하고 살아가십시오. 자주, 날마다, 그분이 채찍질을 당하실 때 그대의 어깨를 내미십시오. 가시관을 씌우도록 그대의 머리를 내미십시오.

제 고향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랑에는 사랑으로 갚는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세세한 것도 놓치지 않습니다. 나는 수많은 사람에게서 그 점을 보았습니다. 보잘것없는 것들이 대단히 위대한 어떤 것이 됩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기워 갚고 보속하는 정신을 그대의 육신으로 드러내십시오.

내적 투쟁을 계속하기가 힘겹다면 그때가 바로 우리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대에게 유치하고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진 예전의 “내적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음을 그대는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대는 그 영웅적인 ‘사소한 것들’에 몇 달 심지어는 몇 년 동안 항구하게 인내해야 합니다. 그대는 그대의 감정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감정은 선을 깨닫는 데 너무나 더디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이행하려는 의지가 차갑게 식었을지 모르지만, 사랑으로 그 사소한 의무들을 이행하도록 하십시오.

마음이 메마르다고 느끼더라도 자발적으로 또 사랑으로 신심 생활에 인내하십시오. 게으른 학생이 학기가 끝나기만을 고대하고 구치소에 있는 경범죄자가 감옥 문이 열려 옛 생활로 돌아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대가 신심 행위나 일을 마치기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놀란다 해도 괘념하지 마십시오.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결의를 굳히고 인내할 것을 나는 강조합니다. 잠시도 멈추지 말고 신심 수단을 활용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 밀착하여 믿음을 기쁘게 실천하십시오. 진실로 그분을 사랑하십시오. 정말로, 정말로 그분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위대한 사랑 모험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날마다 사랑이 풍성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스승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당신을 섬기고 싶을 따름입니다. 제 임무를 완수하고 제 온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제 곁에 계시는 당신의 든든한 발걸음을 느끼게 해주십시오. 당신께서 저의 유일한 지주가 되어 주십시오!”

이 말씀을 천천히 그분께 말씀드리십시오. 정말로!

그대에게는 내적 생활과 교리적 양성이 필요합니다. 많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대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거룩함을 가지고 좋은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대에게 재촉합니다. 그대가 그분을 따르겠다고 말씀드린 그 순간부터 그대는 또 다른 그리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또 압니다. 그대는 소금을 소금 맛을 내는 음식과 분리하지 않듯이 그대의 동배들 곧 친척과 친구와 동료들로부터 그대 자신을 분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대의 내적 삶과 교리적 양성에는 하느님의 자녀가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맛을 내기 위해 반드시 지녀야 하는 신심과 원칙들이 포함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서 늘 그렇게 좋은 조미료가 되게 해달라고 주님께 청하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활기찬 정신으로 항상 새로운 복음의 보화를 수집해서 세상 구석구석까지 전하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대의 말과 행동으로 그분을 알리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우리의 인간 본성을 취하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기에 우리는 그분과 일치하여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사회의 일원으로서도 하늘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대는 그리스도인이기에 그대 형제들의 불안이나 필요를 외면한 채 살 수 없습니다.

사도 성 요한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새 계명을 얼마나 강조했는지요.

나는 가식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 무릎을 꿇고는, 서로 사랑하라고, 서로 도우라고, 서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라고, 서로 용서하는 법을 알라고 그대에게 청합니다.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따라서 온갖 교만을 멀리하고 동정심이 넘치고 사랑을 보이십시오. 기도와 신실한 우정으로 서로 도우십시오.

다른 이들의 좋은 점과 덕을 볼 줄 알 때만 그대는 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누군가의 잘못을 바로잡아 줄 때는 사랑으로 제때에 바로잡아 주어야 하며 그 사람이 수치감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을 바로잡아 주고 있는 그 일을 통해서 그대 자신이 배우고 개선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제외하거나 차별하지 말고 사랑하며 자비를 실천하십시오. 그것이 스승님의 제자들인 우리를 특징짓는 미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자비로 인해 그대의 신앙이 약해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비는 미덕이기를 그칠 것입니다. 또 그것이 신앙을 규정하는 분명한 선을 모호하게 해서도 안 될 것이며, 신앙을 느슨하게 해, 일부 위인들이 노리듯이, 하느님의 힘과 능력이 결여된 특징 없는 어떤 것으로 바꿔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대는 동료들과 더불어 살아야 하고 그들을 이해해야 하며 그들의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저 카스티야의 신비가(십자가의 성 요한을 가리킴-옮긴이) 말처럼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심어야 합니다. 사랑을 얻어내기 위해서.

비판해야 할 때는 명확해야 하고 도움이 되어야 하며 건설적이어야 합니다.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비판은 배신, 뒷담화, 비방, 중상이자 완전히 비열한 짓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선을 위해 필요할 때는 절대로 침묵하지 마십시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누군들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마주하면서 용감해지지 않겠습니까? 잃을 것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얻을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런데 왜 주춤거립니까?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비록 우리의 활동을 좋게 평가하지 않고 심지어 불쾌하게 반응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올바른 태도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들에게 좋은 형제, 자매가 아닙니다.

어머니인 교회에 대한 사랑과 봉사는 교회 구성원 개인들의 성덕 여하에 좌우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구성원이 그리스도인의 완덕을 이루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대는 그리스도의 배필이며 그대의 어머니인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는 순결하고 흠 없으며, 언제나 그럴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성화를 위한 노력은 다른 수많은 이들의 거룩함에만 아니라 하느님의 교회의 거룩함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 점을 분명히 확신하십시오. 그대가 참으로 원한다면 그대는 용기가 백배하여 하느님에 관한 교리가 지니는 더없이 사랑에 찬 진리를 어디에서나 증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대에게 귀 기울이시며 그대를 사랑하시고 그대에게 영광을 약속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전능하신 손으로 그대를 보호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밭은 비옥하며 주님께서 뿌리시는 씨앗은 질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가라지가 보일 때 가라지가 솟아나는 것은 사람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이 응답하지 않기 때문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잠에 떨어져 밭을 원수에게 무방비 상태로 방치한 것입니다.

불모의 땅이라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대신에 그대의 행위를 성찰하십시오.

나를 무척이나 슬프게 한 다음의 언급을 보면 그대 또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사악한 법들에 왜 저항하지 않는지 또 왜 저항해도 그렇게 효과가 없는지를 나는 아주 명확하게 봅니다. 위나 아래나 가운데나 그냥 부화뇌동하는 사람이 많아서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느님과 그분 교회의 원수들은 사탄의 끝없는 증오에 놀아나 무자비하게 활동하며 조직합니다.

‘모범적’이라 할 만큼 일관되게 그들은 간부들을 준비시키고 학교를 운영하며 지도자들을 임명하며 선동가들을 고용합니다. 드러나지 않게 그러나 대단히 효과적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사상을 퍼뜨리며 종교적 이념이라면 가리지 않고 파괴해 버리는 씨앗을 가정과 일터에 뿌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늘 진실하게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일이 무엇입니까?

게으름이나 부주의함, 결정을 늦추는 것 또는 중요한 문제들을 연구하는 일을 미적거리는 것을 평온함이라고 혼동하지 마십시오.

평온함은 부지런함과 언제나 함께합니다. 그것은 현안을 지체하지 않고 상정해 해결하는 데에 필요한 미덕입니다.

아들이여, 영혼들이 그대 안에서 찾는 그리스도께서는 어디에 계시는가요? 그대의 교만에? 다른 사람들을 위압하려는 그대의 욕망에? 저 완고함에?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까? 아닙니다!

그대에게 고유한 개성이 있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 개성을 그리스도의 성품에 맞추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형제애와 봉사 정신을 살기 위한 좋은 행동 규칙을 그대에게 제안하고자 합니다. 그대가 없어도 다른 사람들이 그대의 일을 계속해나갈 수 있도록 그대의 경험을 그들에게 너그러이 전해 주고 그대가 꼭 필요한 존재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다른 이들의 성덕, 그들의 그리스도교적 행위, 그리고 그 행위의 효과에 대한 책임은 그대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그대의 열정과는 무관합니다.

그대는 그대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대가 멈춘다면, 그대는 너무나 많은 사람을 멈추게 하거나 그들에게 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어머니인 거룩한 교회에 관해 생각하면서 어떻게 한 지체가 고난을 겪으면 몸 전체가 고난을 겪는지를 숙고하십시오.

몸은 그 지체 하나하나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각각의 지체는 몸 전체를 필요로 합니다. 내 두 손이 자기 책무를 이행하기를 중단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는 내 심장이 박동을 중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대는 이 점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대를 주목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대가 교회 삶이 의존할 수 있는 토대의 한 부분, 튼튼한 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현실을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그대의 일상 행동을 위한 많은 실제적인 결과들을 도출해낼 것입니다. 돌을 쌓아 만든 그 토대는 감추어져 있고 좀 무딜 수 있지만 연약하지 않고 단단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건물을 지탱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쓸모가 없습니다.

그대는 하느님께서 그대가 비참하다는 것을, 엄청나게 비참하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대를 구원사업의 동반자로 선택하셨다고 느낍니다. 그러니 그대는 겸손하게 자신을 모든 사람의 발치에 두어야 합니다. 곧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건물의 지지대가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토대들은 튼튼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지탱하거나 격려해야 하는 사람에게 필수 불가결한 덕은 용기입니다.

예수님께 이렇게 강하게 말씀드리십시오. “제가 그릇된 겸손으로 말미암아 중추가 되는 용기의 덕을 실천하는 것을 그만두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해주십시오. 저의 하느님, 황금에서 찌꺼기를 어떻게 가려내는지를 알게 해주십시오.”

우리 어머니, 우리의 희망이시여! 주변의 모든 것이 떨고 흔들린다 해도, 우리가 당신 곁에 계속 있는 것이 얼마나 안전하고 확실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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