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부활

그대는 회심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그분께서는 그대에게 더 많이 요청하고 계시는데 그대는 나날이 더 적게 드리고 있으니까요.

사실, 라자로와 마찬가지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움직이게 한 것은 ‘밖으로 나오너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느님 자비의 능력을 깨닫지 못한 채 아직도 죽음에 갇혀 있는 이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슬픈지요!

그대의 거룩한 기쁨을 새롭게 하십시오. 그리스도 없이 부패하고 있는 그 사람 맞은편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상의 애정은 순전히 추한 욕정은 아닐지라도 이기적인 요소들이 들어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므로 매우 거룩하게 될 수 있는 이런 애정들을 무시하지는 말되 늘 지향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대를 동정하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그것은 종종 교만이나 허영의 표징이 됩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향주덕(向主德)을 거론할 때마다, 이 덕들은 생각해야 하는 덕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실천해야 하는 덕임을 명심하십시오.

그대의 삶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엄성에 적합하지 않은, 정화되기를 원치 않는 그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그대 자신을 잘 살피고 변하십시오.

그대의 처신을 세밀히 살펴보십시오. 그대에게 잘못이 수두룩하고 그 잘못들이 그대뿐 아니라 어쩌면 그대 주변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들이여, 세균이 야수 못지않게 무섭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그대는 실험실에서 세균을 배양하듯 잘못과 오류를 키웁니다. 겸손의 결핍, 기도의 부족, 의무 이행의 부족, 자신에 대한 깨달음의 부족 등등으로 말입니다. 이런 세균들은 주변을 감염시킵니다.

그대는 날마다 양심 성찰을 잘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대는 개선하고자 하는 단호한 결심을 하게 될 것입니다. 양심 성찰은 그대의 잘못과 태만과 죄에 대해 실제로 아파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고 한없이 지혜로우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를 선택하셔야 했습니다.

그대가 어머니를 선택했어야 한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내 생각에는 우리도 필시 그분을 택했을 것이고 온갖 좋은 것들로 그분을 채워 드렸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리하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지극히 거룩하신 성 삼위에 이어 성모님이 계시는 것이지요!

신학자들은 왜 성모님이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며 또한 왜 사탄에게 정복될 수 없는 분인지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합니다. 성모님은 그러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고, 그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훌륭한 증거입니다. 가장 명확한 증거는 하느님께서 당신 어머니에게 그 첫 순간부터 모든 특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아름다우시고 순수하시며 영혼과 육신에 흠이 없으십니다.

그대는 승리를, 투쟁이 끝나기를 열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는데 왜 그럴까요?

그대는 이미 승리한 것처럼 주님께 감사드리십시오. 그리고 그대의 성급한 감정들을 그분께 바치십시오. 충실한 사람은 승리의 기쁨을 노래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면 잠잘 때조차도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대에게 하느님과의 일치가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그대는 하느님의 뜻과 겨루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대가 잘 알고 있듯이, 그것이 그대의 나약함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아주 많은 것이 그대에게는 없다는 그 사실을 사랑하십시오. 그대가 그대의 길을 출발하면서 또는 계속 가면서 만나는 장애물들을 사랑하십시오. 그대가 아주 보잘것없고 영적으로 비참하다는 것을 사랑하십시오.

그대가 가진 모든 것과 그대의 사람들에게 속하는 모든 것을 실제로 봉헌하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봉헌하십시오. 인간적으로 보면 꽤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초자연적 빛으로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때때로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지쳤고 차가워졌다고 느낍니다. 기도할 때나 다른 어떤 신심을 실천할 때, 마치 코미디를 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그 친구에게, 그리고 그대가 그 친구와 같은 처지라면 그대에게도 이렇게 대답합니다. “코미디라고요? 아들이여, 훌륭한 일입니다. 그 코미디를 하십시오! 관객은 주님이십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코미디를 하고’ 있는 그 순간에 복되신 삼위일체께서는 우리를 지긋이 바라보고 계십니다.”

우리 삶이 온통 쭉정이가 되어가고 있을 때,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사랑으로 하느님 앞에서 하는 코미디 같은 행동. 하느님을 위해 재주를 부리는 것이 얼마나 멋집니까! 오직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희생으로, 아무런 개인적 만족도 없이, 사랑을 위해 자신 몫을 하는 것이 얼마나 경이롭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사랑의 삶입니다.

이 지상의 것들을 무질서하게 사랑하는 마음은 사슬에 묶인, 또는 하느님께 날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미세한 실’에 옭아 매인 마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잠들지 말고 기도하여라.” 덧없이 스쳐 지나가는 것 때문에 하느님의 일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충격적입니까!

미지근한 사도(使徒). 그 사람은 바로 영혼들의 큰 적입니다.

미지근함의 확실한 증거는 초자연적 ‘끈덕짐’이 없다는 것, 곧 일을 계속하면서 인내하고 ‘마지막 돌’을 놓기까지 멈추지 않는 용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있지만 고결합니다. 그런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마음에 다가갈 때 그들 마음이 청동처럼 사랑의 눈물, 보속의 눈물로 녹아내립니다. 그들 마음이 불타오릅니다.

하지만 미지근한 사람들의 마음은 점토로 빚은 마음입니다. 미천한 살덩어리로 빚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부서져 버립니다. 먼지와 같습니다. 가련한 모습입니다.

나와 함께 말씀드립시다. “예수님, 저희가 미지근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미지근함은 안 됩니다!”

지극한 선과 지극한 아름다움과 지극한 위엄과 지극한 사랑스러움을 갖추시고 지극한 은총을 입으신 어머니. 이것이 그대를 사랑에 빠지게 하지 않는가요? 그런 어머니를 모시고 싶지 않은가요?

우리는 사랑에 반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메마르고 뻣뻣하고 활기 없게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 사랑 속에 푹 잠기기를 원하십니다.

이 명백히 모순된 글을 이해할 수 있는지 보십시오. 그 사람은 서른 살이 되던 해 이렇게 썼더군요. “이제 나는 젊은이가 아니다.” 그런데 마흔을 넘기고서는 다시 이렇게 적더군요. “나는 팔십에 이를 때까지 젊은이로 살 것이다. 만일 내가 그 이전에 죽게 된다면 요절했다고 믿을 터이다.”

그는 세월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원숙한 사랑으로 젊게 살아가더군요.

하느님과 사랑에 빠진 영혼이 던진 저 질문을 나는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 “제 사랑, 저의 주님, 제가 싫은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린 일이 있었는지요? 주님을 아프게 해드릴 수 있는 어떤 것이 제게 있었는지요?”

이렇게 끊임없이 사랑하는 은총을 주시도록 아버지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벗들이 그리스도를 대하는 애정과 믿음을 그대는 보았습니까? 라자로의 누이동생들이 예수님께서 멀리 계셨다고 아주 자연스럽게 원망합니다. “저희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그분을 신뢰하면서 차분하게 말씀드리십시오.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의 사랑에 찬 우정으로 주님을 대하고 첫 열두 사도가 주님을 대한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대하도록 저를 가르쳐 주십시오. 비록 열두 사도가 처음에는 어쩌면 그다지 초자연적이지 않은 이유로 따랐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사도 요한을 생각하면 얼마나 흐뭇한지요. 예수 성심의 불길에 타오르도록 하고자 힘이 들더라도 사랑으로 자신의 지성을 굴복시키는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이렇게 씁니다. “하느님을 사랑합시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빤히 아시면서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오셔서 물으십니다. 베드로에게 이렇게 물으셨듯이 말입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제는 응답해 드려야 할 때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아십니다!” 겸손하게 이렇게 덧붙이십시오. “주님을 더 사랑하도록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의 사랑을 배가시켜 주십시오.”

“사랑은 미사여구가 아닌 행동입니다” 행동, 행동 말입니다! 주님, 당신께 사랑한다는 말씀을 계속해서 자주 드리겠다고 결심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얼마나 자주 드렸던가요! 그러나 사랑한다는 이 말은 무엇보다도, 당신 은총에 힘입은 저의 행동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날마다 하는 사소한 행동들이 당신 앞에서 소리 없는 외침으로 저의 사랑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일부 가련하고 변변찮은 그리스도 신자들이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 곧 아내와 자녀와 친구에게 매일같이 표현하는 그 부드럽고 세련된 사랑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님께 보여드려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성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나 매력적이고 열정적이어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끝없이 성장해 나갑니다.

그대는 버릇없는 아이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처신해서는 안 됩니다.

그대는 강한 하느님 자녀가 돼야 합니다. 그대는 직업으로 하는 일에서, 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하느님 현존의 도움으로 평온함을 지녀야 합니다. 하느님의 현존으로 그대는 아주 세세한 일에서도 완벽할 수 있습니다.

오로지 정의만 추구한다면 사람들이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느님 사랑을 위해 행동하십시오. 하느님 사랑은 이 정의에 이웃 사랑의 향기를 더하게 해줄 것이며, 지상의 모든 사랑을 정화하고 깨끗하게 해줄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셔 들일 때 모든 것이 초자연적인 것이 됩니다.

주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십시오. 미친 듯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이 있다면 결심할 필요가 없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나의 부모님은―그대의 부모님을 생각해 보십시오―나를 사랑하기 위해 어떤 결심도 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세세한 일에서도 내게 쏟아주신 애정이 어떠했던가요!

바로 이 같은 인간의 마음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으며 또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희생이며, 사랑을 위한 희생은 기쁨입니다.

마음속으로 이 질문에 답변해 보십시오. 그대는 하루에 얼마나 자주 그대의 마음을 하느님께 두어 그대의 사랑과 활동을 그분께 표현하려고 합니까?

이것은 그대의 사랑이 지니는 강도와 질을 측정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아들이여, 그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요청하실 권리가 있으시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너는 나를 생각하고 있느냐? 나를 의식하고 있느냐? 나를 너의 의지처로 찾고 있느냐? 나를 네 삶의 빛으로, 방패로…너의 모든 것으로 추구하고 있느냐?”

그러므로 이런 결심을 새롭게 하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좋은 것을 찾을 때, 나는 ‘주님!’하고 소리쳐 부르리라. 세상 사람들이 나쁜 것을 찾을 때도, 나는 다시 ‘주님!’하고 외치리라.”

그대는 초자연적 감각을 절대로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대가 진흙으로 빚어진 그대 안에서 비열함과 악한 성향을 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대에게 의지하고 계십니다.

그대는 주위의 다른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그러나 매 순간 ‘초자연적 감각으로’ 살아가십시오.

올곧은 의향을 가지고 판단하려면, 편견을 가지지 않으면서 깨끗한 마음과 하느님의 일에 대한 열정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에 관해 생각해 보십시오.

지인들이 그들이 라디오 장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 주제를 영적인 영역으로 옮겨왔습니다. ‘우리에게는 강력한 접지 장치가 있습니다. 대단히 강력합니다. 그런데 내적 삶의 안테나를 설치하는 일은 까먹었습니다.’

하느님과 계속 접촉하는 영혼들이 별로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초자연적 안테나를 잃는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하겠습니다!

내게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고 내가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사소하고 하잘것없는 것들이 하느님보다 나의 관심을 더 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내가 하느님과 함께 있지 않을 때 나는 누구와 함께 있습니까?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이 원하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비록 요 며칠 동안 당신께 청하는 것이 있지만 그것이 저를 당신의 뜻에서 한치라도 멀어지게 한다면, 허락하지 마십시오.”

효과를 내는 비결은 근본적으로 신심, 신실한 신심에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그대는 하루 전체를 주님과 함께 보내게 될 것입니다.

할 수 있는 한 중단 없이 성령과 사랑에 찬 유순한 우정과 대화를 ‘계속’한다고 결심하십시오. 오소서, 성령이여, 제 마음에 거처하소서!

마음을 다하여 그리고 늘 더욱 큰 사랑으로, 감실 가까이에 있거나 주님을 가슴에 모시고 있을 때는 한층 더 큰 사랑으로 이렇게 반복하십시오. “당신을 멀리하지 않게 하시고 당신 성령의 불로 저를 채우소서.”

“당신 성령의 불로 저를 태우소서!” 하고 그대는 외쳤습니다. 그런 다음에 이렇게 덧붙였지요. “가련한 제 영혼은 할 수 있다면 날갯짓을 다시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쉬기까지 멈추지 말아야지요!”

그대의 이런 뜻은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나는 그대를 위로자이신 성령께 맡겨드리고자 합니다. 성령께서 그대 안에 거처하시어 그대의 행동과 말과 생각과 뜻을 주관하시고 초자연적 의미를 부여하시도록 나는 끊임없이 성령께 탄원할 것입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면서 그대는 온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주님께 간청하였습니다. 그대의 힘과 오관으로 성 십자가를 현양할 은총을 주십사 하고…. 그대는 새로운 삶을 청했습니다. 그대 사명의 진실함을 확인하는 낙인을 찍을 십자가를, 그대의 존재 전체가 의지할 십자가를 청했습니다.

우리는 지켜볼 것입니다.

고행은 마치 심장이 박동하듯이 꾸준히 계속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통제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힘겹더라도 또 힘겹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모순이 아님을 그대는 충분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생리적인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 토대는 초자연적이어서, 질병이나 모순을 뛰어넘습니다.

그 기쁨은 종소리를 울릴 때의 기쁨이나 포크 댄스를 출 때의 기쁨이 아닙니다.

참된 기쁨은 더 깊고 내면적인 어떤 것입니다. 비록 때때로 얼굴은 근엄하겠지만, 우리를 평화롭게 하고 희열에 넘치게 하는 어떤 것입니다.

나는 그대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흔히 하는 말이어서 이해는 하지만, 교만에서 생긴 여러 어려움을 ‘십자가’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 나는 유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짐들은 십자가, 참된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런 역경들에는 맞서 싸우십시오.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인장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대 자신의 그 모든 가면을 제거하십시오.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날에도, 그날의 수많은 세세한 일들은 그대가 십자가 위에 있음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십자가 위에 있음을 알게 해주는 훌륭한 한 편의 시가 됩니다.

지나가고 마는 것에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닮으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고 머리 둘 곳도 없으셨습니다.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지만, 실질적으로 초탈하게 해달라고, 느슨해지지 않고 초탈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십시오.

초탈의 한 가지 명백한 표징은 참으로 그 어떤 것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신실하게 믿음을 살아가는 사람은 현세 재화가 수단임을 알고, 그것을 관대하게 영웅적으로 사용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지상의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형제들인 우리 인간들이 벗어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복되신 동정녀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아무리 사랑해도 절대로 충분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모님을 아주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분의 성화를 걸어두고 인사드리는 것으로는, 화살기도를 바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매일 활기차게 살아가는 가운데 작은 희생을 성모님께 바치고 성모님께 대한 사랑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 인류 전체가 성모님께 그런 사랑을 보여드리기를 원합니다.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헌신과 사랑, 곧 하느님 사랑과 하느님을 통한 이웃 사랑, 이것이 그리스도인 삶의 진실입니다.

예수님, 신뢰하며 당신 팔에 안깁니다. 사랑 넘치는 당신 가슴에 제 얼굴을 파묻습니다. 당신 성심에 제 심장을 갖다 댑니다. 모든 일에서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을 저는 원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온통 불순종, 험담, 분규, 속임수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순종, 신실함, 충성, 단순함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초자연적 의미를 지닐 것이고, 이는 우리를 더욱 인간답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대는 그렇다고, 주님을 따르기로 굳게 결심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그대의 발걸음이 아니라 주님의 발걸음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 충실함의 토대가 무엇입니까?

말해 주겠습니다. 폭넓게 말해서 우리의 충실함은 하느님의 사랑에 기초합니다. 그 사랑은 이기심, 교만, 피로, 성급함… 등등의 온갖 장애를 극복하게 해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이겨냅니다. 그 사람은 온 마음으로 사랑하면서도, 아직 충분히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자애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심에 감사드리는 아라곤(스페인 동북부 지방-옮긴이) 출신의 한 수녀님이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심에 감사드리는 말을 했다는데, 그 말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나도 베껴 써 두었습니다.

“하느님은 얼마나 멋지신지요. 안 계시는 곳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모든 자녀와 마찬가지로 그대에게도 개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주님과 친밀하게 지내고 직접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익명성 속에 그대 자신을 숨기지 말고 얼굴을 맞대고 쌍방향 대화를 해야 합니다.

기도의 첫 번째 조건은 항구한 인내입니다. 두 번째 조건은 겸손이고요.

신뢰하면서 거룩한 끈기를 지니십시오. 우리가 주님께 중요한 어떤 것을 요청할 때 어쩌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여러 해 동안 간청하기를 원하실지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중단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늘 더욱 신뢰하면서 계속하십시오.

스승님께서 권고하시는 것처럼 기도할 때는 항구하게 인내하십시오. 이 출발점은 그대의 평화, 그대의 기쁨, 그대 평온함의 원천이 될 것이고. 그리하여 그대의 기도가 발휘하는 초자연적이고 인간적인 효력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리는 곳에서도 기도는 그대의 영혼 안에 형언할 수 없는 위안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마침내 그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위안을 원치 않습니다. 당신을 원합니다.”

그대의 삶은 기쁠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순경에서나 역경에서나, 일상적일 때나 특별한 경우에나 할 것 없이 끊임없는 기도, 주님과의 중단 없는 대화여야 합니다.

모든 상황에서, 그대가 아버지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는 곧장 그대의 머릿속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대는 그대의 영혼 안에서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기도와 묵상에 잠기기는 아주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대기실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기다리시는 분은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대는 이렇게만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기도하고 싶습니다. 주님과 마주 대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바로 하느님의 현존 속에 있으면서 그분과 대화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조차 충분치 않은 듯이 그분은 그대에게 시간을 내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그대에게 시간을 주십니다. 단지 10분이나 15분이 아닙니다. 여러 시간입니다! 온종일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언제나 계시는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분, 지극히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내적 삶에서도, 인간적 사랑과 마찬가지로, 항구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대는 ‘예전에 발견했지만, 다시 새롭게 발견할 때까지’(원문에서는 ‘새로운 지중해를 발견할 때까지’라고 표현한다. 대서양으로 이어지는 지중해는 세 개의 대륙으로 둘러싸인 큰 바다여서 그 의미를 풀어서 위와 같이 번역했다-옮긴이) 계속해서 같은 주제를 자주 묵상해야 합니다.

“왜 이것을 전에는 분명하게 알지 못했을까?” 하고 그대는 놀라움으로 물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때때로 돌과 같아서 물을 한 방울도 흡수하지 않은 채 그대로 돌 위로 스쳐 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같은 일을 거듭해서 숙고해야 합니다.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단의 거룩한 희생 제사에서 사제는 하느님의 몸과 또 그분의 피가 담긴 성작을 잡아 지상의 모든 것보다 높이 들어 이렇게 말합니다. “저의 사랑이신 분을 통하여, 저의 사랑이신 분과 함께, 저의 사랑이신 분 안에서.”

여러분은 사제의 이 행위에 함께하십시오. 나아가 이것이 그대의 삶이 되게 하십시오.

그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후에 사람들이 당신을 왕으로 모시려고 하자 피하셨다고 전합니다.

주님, 저희가 성체성사의 기적에 참여하게 해 주십시오. 피하지 마시고 저희와 함께 사십시오. 당신을 보고, 만지며, 느끼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늘 당신과 함께하고 싶게 해 주십시오. 저희의 삶과 일에서 당신을 왕으로 모시게 해 주십시오.

삼위일체, 곧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아들이신 하느님과 성령이신 하느님과 말씀하십시오. 그리고 복되신 삼위일체께 이르기 위해 성모님을 통하십시오.

지금 예수님께 그대 자신을 내어드리지 않고 있다면 그대는 살아 있는 신앙을 지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늘 더욱 사랑하기 위해 그분을 찾아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연애하는 것과 같아 서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 알지 못한다면 정말로 서로 사랑하게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사랑의 삶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당신 아버지의 명예가 훼손당하시는 것을 보셨을 때 스승님의 거룩한 진노를 곰곰이 새겨보십시오.

그대에게 얼마나 큰 교훈입니까! 하느님의 일이 함부로 취급될 때 무관심하거나 겁쟁이처럼 행동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인성과 사랑에 빠지십시오.

그대는 그분께서 우리처럼 되기를 원하셨다는 것이 기쁘지 않습니까? 당신의 선하심을 이렇게 놀랍게 드러내신 예수님께 감사하십시오.

대림이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날마다 성찬례에서 그대의 영혼에 오시기를―새롭게 갈망하는 데에 얼마나 좋은 시기입니까! 교회는 우리를 격려합니다. “그분께서 곧 오십니다!” 하고.

성탄입니다. 성탄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어서 가세, 어서 가세.” 그분께 가십시다. 그분께서 태어나셨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를 어떻게 보살피는지를 찬찬히 살펴본 후에 그대에게 이렇게 권하고자 합니다.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멈추지 말고 바라보십시오.”

비록 받아들이기가 고통스럽다 해도―그리고 우리의 이 고통을 증가시켜 주시도록 나는 하느님께 청합니다―그대와 내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죄가 망치질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성 요셉. 성 가정의 가장이신 성 요셉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성 요셉을 공경해야 할 이유가 또 그분의 생애에서 배워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보십시오. 그분은 믿음이 강하셨고 고된 노동으로 예수 마리아의 성 가정을 부양하셨습니다. 그분은 배우자인 동정 마리아의 순결을 지켜 주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동정 마리아를 당신의 어머니로 또 자신을 성 마리아의 배필로 선택하셨을 때 하느님의 자유를 존중하셨습니다. 사랑하셨습니다!

성 요셉, 지극히 정결하시고 지극히 순수하신 우리의 아버지시며 주군이신 분. 당신은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으시고 씻기시고 보듬어드리기에 합당하신 분. 저희가 하느님을 알게 되고 순결하게 되고 한 사람의 다른 그리스도가 되도록 가르쳐 주소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처럼 행하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처럼 가르치도록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이 땅에서 거룩한 길들을, 감춰져 있으면서도 밝게 빛나는 길들을 열도록 도와주십시오. 그 길을 인류에게 보여주시어 현세 생활을 통해서 끊임없이 탁월한 영적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성 요셉을 많이 사랑하십시오. 온 마음으로 성 요셉을 사랑하십시오. 그분은 예수님과 함께 성모님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가장 가까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어머니 다음으로 하느님을 지극히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성 요셉은 그대의 사랑을 받으실 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아는 것이 그대에게 좋을 것입니다. 그분은 내적 삶의 스승이시며 주님 앞에서 또 하느님의 어머니 앞에서 큰 힘을 지니시기 때문입니다.

동정 성모님. 이 여왕보다, 이 귀부인보다, 이 어머니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더 잘 가르칠 수 있는 분이 누구랴!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딸이며 아들이신 하느님의 어머니이며 성령이신 하느님의 배필이시며 동시에 우리 어머니이시니.

가서 직접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십시오.

그대에게 사랑이 있다면, 비록 힘이 든다 해도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일들을 할 줄 알고 그 일들이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그대는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 바오로는 사랑의 실천을 위한 멋진 처방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법을 완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대의 삶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같은 본성을 취하시고 날마다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 의로운 이와 죄인, 젊은이와 늙은이, 이방인과 유다인을 가리지 않고 접촉하며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을 좋게 보는 사람들에게, 또 당신 말씀을 왜곡하고 당신을 단죄할 구실을 찾고만 있는 이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는 우리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처신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영혼들을 사랑하면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며 참아주고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한 수많은 결함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랑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진리를 수호하는 놀라운 사랑을 지녀야 합니다.

그대에게 ‘좋은 모범’에 관해 말할 때, 나는 또한 그대가 세상을 평화와 사랑으로 채워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또 변호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자주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정성을 다해 사랑하려고 노력하는가?

우리는 사람들이 부드럽게 밟고 지나가는 카펫이 돼야 한다고 내가 강론했을 때, 나는 단지 멋진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어렵습니다. 성덕이 어려운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 일은 쉽습니다. 성덕은 모두가 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점을 강조합니다.

저마다 자기 것만 챙기는 이기심과 무관심이 극심한 가운데, 탁자 위를 쌩쌩 달려가던 강하고 튼튼한 작은 목각 당나귀들이 떠오릅니다. 한 마리는 한쪽 다리가 없었지만 다른 당나귀들에 의지해 계속 달려갔습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수호하고 보전하는 데 있어서 사랑과 공존의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증오와 적개심이 종식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하느님의 자녀에게서 우정과 사랑이 이루는 것은 단 한 가지, 따스함을 주는 하느님의 빛입니다.

형제적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는 것은 복음의 핵심으로 초자연적 애정과 신뢰의 증거입니다.

그대는 누가 바로잡아 줄 때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대와 함께 사는 사람들을 바로잡아 주는 일을 멈추지 마십시오.

바로잡아 주는 것이 필요하고 또 그대가 그러고 싶어서 바로잡아 줄 때는 그 사람에게 아픔을 주고 그대 자신도 아프다는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물러서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대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에게 가까이 다가가십시오. 그대는 늘 하느님과 일치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복되신 어머니 곁에 머무름으로써 하느님과 일치하도록 노력하십시오.

내 말을 잘 들으십시오. 세상에 몸담고 있다는 것과 세상에 속해 있다는 것이 세속적이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대는 어디에서나 불을 지피는 숯불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아니면 적어도 주변 사람들의 영적 기온을 높이도록 노력해 그들을 진정으로 그리스도인 삶을 살게끔 인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맡기신 당신의 일들이 기도와 고행을 토대로 추진되기를 원하십니다.

시민으로서, 가톨릭 신자인 시민으로서 우리의 모든 활동의 토대는 강력한 내적 삶입니다. 그 삶은 자신들의 여정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진정으로 하느님과의 중단 없는 대화로 삼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대가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그 사람의 영혼을 보아야 합니다. 그대가 도와주어야 하는 영혼, 그대가 이해해야 하는 영혼, 그대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영혼, 그대가 구원해야 하는 영혼입니다.

그대는 혼자 가려고 고집합니다. 자신이 뜻하는 바를 행하려고 오로지 자신의 판단에만 의존하려고 고집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대는 그 결과 ‘아무런 결실도 없음’을 봅니다.

아들이여, 그대가 그대의 판단을 굽히지 않으면, 오만하면, ‘그대의’ 일에만 전념하면, 그대는 밤이 새도록―그대의 한평생이 긴 하룻밤일 것인데―그물을 던지지만, 결국 텅 빈 그물로 새벽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일상의 일들에 전적으로 성실하게 임하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초대받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느님의 사랑에 깊이 빠지는 기회임이 분명합니다.

그대는 그리스도인이고 언제나 그리스도인이어야 하기에 그대의 입에서는 감동을 주고 격려가 될, 그리고 그대의 헌신적인 삶의 태도를 보여줄 강력한 초자연적 말이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려 한다고 변명하면서 바로잡아 주는 수고를 회피하는 책임자들에게는 편안함을 대단히 좋아하는 그리고 때로는 엄청나게 무책임한 태도가 이면에 감춰져 있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현세에서는 약간의 불편함을 덜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태만한 행위로 영원한 행복, 그들 자신의 영원한 행복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영원한 행복을 놓고 도박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태만한 행위들은 정말 죄가 됩니다.

성인은 많은 사람에게는 삶에 ‘거북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성인의 열성이 절대로 쓰라린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성인이라면 바로잡아 줄 때 절대로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됩니다. 성인의 모범이 이웃의 얼굴을 후려치는 도덕적 오만함이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젊은 저 사제는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비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예수님께 말씀드리곤 했습니다. 하고.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이곤 했지요. “스승님, 스승님의 분명한 가르침을 저희 영혼에 심어주시어 저희의 삶과 일에서 절대로 간과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그 가르침을 전할 있게 해 주십시오.”

그대 또한 주님께 그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믿음의 진리들을 희석하거나 모호하게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제시하려는 용기를 늘 지니십시오. 그것이 겸손이며 하느님께 대한 봉사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늘’ 교황님의 권위를 지켜드리고 교도권 앞에서 자신의 견해를 ‘늘’ 바로 잡을 태세가 돼 있어야 합니다.

무척 오래전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경솔하게 사제들이 늙으면 은퇴하거나 은퇴 연금을 받을 수 있는지를 내게 묻더군요. 내가 답변을 하지 않자 그는 무례한 질문을 집요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적절하고 간결하다고 생각한 답변이 떠올랐습니다. “사제직은 직업이 아니라 사도직입니다.” 하고 나는 말했지요.

이것이 바로 내가 사제직에 관해 느끼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적어놓고 싶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이 차이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말입니다.

가톨릭 정신을 지닌다는 것은 특정한 지역 교회만이 아니라 전체 교회를 염려하고 그 무게를 느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확대되어 관대한 청원을 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그대는 우리의 저 친구의 외침(화살기도)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 친구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자모이신 성교회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취급받는 것을 보는 것이 저를 아프게 합니다!”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가 나를 짓누릅니다.” 하고 성 바오로는 썼습니다. 그리고 사도의 이 한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성 교회의 발아래 모든 것을 갖다 놓고, 생계는 물론 명예와 목숨까지 바쳐서라도 교회를 충실히 사랑해야 하는 책임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일깨웁니다. 물론 그대에게도!

겁내지 마십시오. 교회를 방해하려고 하는 저들의 침묵의 공모에 그대는 할 수 있는 한 맞서 싸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중단시킵니다. 다른 이들은 행실로 가르치는 이들의 좋은 모범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려고 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좋은 가르침을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리고…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이 교회의 말을 듣는 것을 견디어내지 못합니다.

거듭 말합니다만, 겁내지 마십시오. 그렇지만 교도권의 가르침을 대변하는 그대의 과업에 싫증을 내어서도 안 됩니다.

날마다 더욱 ‘로마’ 가톨릭이 되어, 참되고 유일한 교회의 자녀들이 누리는 저 복된 지위를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것입니다.

동정 마리아 신심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하느님 가족의 일원으로 행동하는 데에 필요한 초자연적 자극을 불러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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