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계, 순종

순순히 따르세요. 다만, 머리를 써서 사랑을 담아, 책임을 져라. 라고 해도, 지도하는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직에 있어서는, 그대에게 무엇인가를 하도록 요구하는 사람이 누구이건 간에 그의 인간적인 자질에 대해서나, 혹은 그가 그대에게 요구하는 방법에 대해서 개의하지 말고 순종하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전연 덕행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종류의 십자가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에는 보석이나 진주나 에메랄드가 박혀 있고, 어떤 것들은 옻칠이 되어 있거나 상아로 만들어져 있거나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우리 주님의 것같이 나무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모두 같은 존경을 받기에 합당합니다. 왜냐하면 성십자가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희생을 우리들에게 일러 줍니다. 주님께서 주저함없이 성십자가의 나무를 사랑스럽게 껴안으셨음을 잊는 일없이. 이 생각을 그대의 순종에 적용하십시오. 거기에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속죄를 얻어 내셨습니다.

오직 순종한 후에만, 그것은 지향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표시이므로, 그대는 요구된 조건들을 가지고 형제애적인 보정(補正)을 하십시오. 그리고 문제가 되고 있는 의무의 수행을 통해서 통합을 보강하기를 바랍니다.

그대의 입술과, 그대의 심장과, 그대의 마음을 가지고 순종하십시오. 인간을 따르는 것이아니라 하느님을따르는것이다.

그대가 하도록 요구받은 일이 무엇이든 정말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또는 그대에게 요구한 사람이 누구이든 정말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순종을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근심들은 곧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밖의 것들은 그리 빨리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우리가 성실하다면, 우리에게 제안된 것에 순종하고 그것을 실행한다면 해결됩니다.

주님께서는, 배의 오른손 쪽에서 끌어올린 —다른 것들이 아닌— 저 일백 오십 세 마리의 물고기를 잡는 것같은 정확한 사도직을 당신한테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대는 저에게 묻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사람을 낚는 어부임을 알고, 많은 친구들과 접촉을 하면서 살 수 있고, 저의 특수한 사도직을 행사해야 할 상대에 대해서는 식별이 가능한데도, 여전히 아무도 잡지 못하니 어떻게 된 노릇입니까? 사랑의 결핍입니까? 제가 내적생활이 결핍되어 있습니까?

저 다른 기적적인 어로(漁勝)의 경우에, 베드로의 입술에서 나온 대답을 들으십시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강해져서, 그대의 그 게으름을 없애 버리십시오!

그토록 많은 쓸데없는 사려(思慮)없이 순종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도록 요구받았을 때 슬픈 내색을 하거나 꺼려하는 것은 대단한 잘못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렇게 느끼는 것은 잘못이 아닐뿐만 아니라 확실히 위대한 승리를 위한, 영웅적인 덕행을 완성시키기 위한 기회가 될 수 있기도 합니다.

제가 이것을 고안해 내지는 않았습니다. 복음서에 어떤 아버지가 자기의 두 아들에게 같은 일을 하라고 요구한 일이 들어 있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예수께서는 어려움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하는 아들을 기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규율이 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에 기뻐하십니다.

불순종 행위의 대부분은 그대가 하도록 요구된 것이 무엇인가를 듣는 방법을 모르는 데서 오는데, 그것이 끝에 가서는 겸손의 결핍이나 봉사하는 데 흥미가 결핍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대는 완벽하게 순종하기를 원하십니까? 좋습니다, 그러시다면 당신 이 그 범위와 그대에게 지정된 것의 정신을 이해하도록 조심스럽게 들으십시오. 그리고 만약에 그대가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물으십시오.

그대가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그대는 언제 알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그대의 생활 계획을 실천하는 대신 그대가 그대의 시간을 낭비한다면, 그대는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대는 일분 일분을 일과 공부와 신앙개선과 내적생활로 채워야 합니다.

성교회는 전례의 집전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신앙의 신비들이 갖는 아름다움을 깨닫게 하고 우리를 이끌어서 그 신비들을 더 사랑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전례는 세속적인 것으로 나타날지 모르지만 연극적으로 되는 일없이 우리는 모종의 깊은 존경의 태도를 가지고 행동해야 하거니와, 그 존경의 태도는 바로 우리 지도자를 향한 외적인 의식일 것이며, 주님의 입술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우리에게 알려집니다.

지도하는 사람은 공동의 선을 고려한 후에 영적인 면과 사회적 면을 불문하고 어떤 규범이든 반드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명령, 권위, 규율··· 만약에 그들이 조금이나마 듣는다면, 냉소적인 웃음을 띠고 자기네들의 자유를 방어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후에 가서 우리가 그들의 잘못된 방법들을 존경하거나 적응해야 한다고 속이는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품위없는 항의로, 그들의 행위는 나머지 사람들의 진정한 자유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그렇게 받아 들여질 수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영적 사업을 지도하는 사람들은 모든 인간적인 사물에 관심을 갖고 그것들을 초자연적 상태로 올려서 거룩하게 만들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에 그것들이 거룩하게 만들어질 수 없다면, 속지 마십시오: 그러한 “인간적인” 사물들은 인간적이 아니고, 그것들은 “동물적”이며, 이성적인 동물에게는 부적합합니다.

권위란, 윗사람이 '호통', '호통', '순서'로 그 사람이 자기 밑에 있는 사람을 호통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이런 권위의 만화 같은 기준이 통한다면 누가 봐도 애덕과 예의에 어긋날 게 뻔하고 밑에 있는 사람은 책임자로부터 멀어질 뿐입니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섬기기는커녕 이용하고만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집도 제대로 다스리지도 못하면서 남의 집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대는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단지 권위자의 자리에 놓여졌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안다고 정말로 생각합니까?

조심해서 들으십시오: 훌륭한 지배자는 다른 사람들한테서 배울 수 있다는 것과,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양심의 자유는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런 자유를 인정하면 양심의 명령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도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 한심한 잘못 덕분에 나라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해가 발생했는지 모릅니다.

내적인 명령에 따를 의무라는 뜻에서의 양심의 자유라면 물론 인정됩니다. 다만 제대로 된 양심의 교육을 받은 뒤라면 말입니다.

다스리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굴욕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대가 정부의 한 직책을 차지하고 있는 것같이 어떤 다스리는 지위에 있기에 말합니다. “이 점을 묵상하십시오: 가장 강하고 가장 능률적인 도구들은, 만약에 그것들이 올바르게 사용되지 않는다면 홈이 나고 닳아서 쓸모없게 됩니다.”

단 한 사람이 통치와 관련된 결정을 내릴 때, 그러한 결정은 반드시 또는 대부분의 경우 문제의 일부분 만을 받아들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훈련을 받고, 아무리 훌륭한 재능이 있어도, 그대와 함께 지도할 사람들의 생각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무명의 비난은 듣지 마십시오: 그것은 악당들이 행하는 방법입니다.

능숙하게 통치하기 위한 규준. 그것은 인간이라는 소재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나아질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 그리고 결코 깔보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날이 아랫사람에 대한 깊은 배려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은 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보살핌을 받고 이해받는다고 느낄 때, 그것이 통치라는 직업으로 당신이 섬기는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위가 있는 지위를 차지한 일부 인사들이 착수한 일을 연구하지 않고 가볍게 판단을 말하고 판단을 내리고 하는 사례를 본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지오.

그들은 그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나 일들에 관해서, 불충실의 결과인 모종의 선입견을 허용하면서까지 가혹한 성명을 냅니다.

권위가 전제적 권위주의가 되고,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역사적 계속성이 상실되어 통치하는 인간이 사망 혹은 고령이 되고, 통치의 미경험자가 그대로 장년이 됩니다.그렇게 되면 미경험으로 흥분한 젊은이들이 지배권을 원합니다. 그 결과 얼마나 신을 모욕하는 일이 일어납니까? 이 책임은 권위를 남용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부정적이고 의심 많은 지도자는 횡포를 부립니다.

통치하는 입장에 있는 당신은 올바르고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어느 쪽인가 하면, 잘 안 되는 일이나 실패를 - 그리고, 때로는 그것만을 - 보는 사람이 있지만, 그런 경향은 피하십시오.

기쁨에 가득차고 그리고 주님께서는 모두에게 바로 그들 자신의 결함들과의 싸움으로 성스러워지는 능력을 허락하셨음을 확신하십시오.

새로운 것만 추구하면 통치에 혼란이 생깁니다.

새로운 규칙이 필요하다고 당신은 말합니다. 지금 있는 것과는 다른 신경이나 혈액순환 계통이 있으면 우리 몸이 더 좋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일부 인사들은 집단행동에 열중하고, 통일성을 특색없는 획일성으로 바꾸고, 자유를 몰락시키는 데 어찌도 그리 단호한가요.

그들은 신체 각 부분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다양성이 나타나는 그러한 인간의 몸의 대단한 통일성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한 듯합니다. 하나하나는 그 자체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체의 전반적인 건강에 기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모두가 같아지거나 또는 정확히 같은 길을 따라 똑같이 걸어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일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단, 과장된 준비는 하지 말고. 그것은, 실제로 일을 ‘하는’것 자체가 준비가 되기 때문입니다.또 당연히 불완전한 구석이 있을 것임을 미리 각오해야 합니다. 최선은 선의 적이니까. (최선을 바라다가 선한 것을 헛되게 할 수 있으니까.) (서양속담)

조직만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착한 목자는 양을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두렵게 만드는 것은 나쁜 통치자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마지막으로 미움받고 고립되더라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통치한다는 것은 인내심과 애정으로 사람들을 서서히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좋은 관리(管理)라면, 사람들에게 충분히 묻지 않는 과오에 빠져들지 않고, 필요할 때에는 유연해지는 방법을 압니다.

“그들이 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지 않은 동안은!”하고 저 가엾은 사람이 강한 적들에 의해 그의 사적인 생활에서와 그리고 세속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야망에서, 그가 거의 다 파멸되었을 때 용감하게 말했습니다.

이 일을 묵상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그들이 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지 않는 동안은!”

모든 시민이 정규군의 부분을 이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전시에는 모두가 참여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오

10:34)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게릴라였어요. 산 속을 돌아다니며 마음이 내키고 있을 때 총을 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병적에 들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조직된 규율있는 군대 쪽이 전쟁에 이기기 쉽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고고한 게릴라 분위기에서는 마을 전체를 함락시키거나 세계를 점령할 수 없습니다. 아주 고리타분한 총을 버리고, 지금은 최신 무장을 하고 있어요. 그 대신 산속에 누워 혼자 전쟁에서 이기는 꿈을 꿀 수 없게 됐죠.”

우리의 어머니, 성스러운 교회는 그 얼마나 훌륭한 규율과 일치하고 있습니까!

저는 많은 반항적인 가톨릭 신자들에게 말하고 싶거니와, 만약에 규율과 합법적인 권위에 따른 복종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들이 하나의 당파, 하나의 작은 파벌, 불화와 반항자들과 뜬소문을 심는 자들, 어리석은 사적인 입씨름의 주동자, 자질구레한 시기와 어려움의 그물을 짜는 자들이 된다면, 그들은 자기네들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산들바람은 폭풍과는 같지 않습니다. 누구나 최초의 것에 대항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놀이이고, 투쟁의 우스꽝스러운 흉내입니다.

약간의 어려움과 부족, 그리고 곤궁함 등은 기꺼이 참고 있다가 '이제는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증거로 십자가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대는 내적인 기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엾게도 폭풍이 닥치면 온 몸을 흔들어 백 년을 헤아리는 나무조차 쓰러지지 않을까 겁이 났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마음속의 두려움이 아니라, 밖에서 오는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신뢰의 마음을 깊이 가지십시오.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일치하는 한, 폭풍은 당신의 신앙과 사랑을 앗아가거나 길에서 내팽개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대는 아주 쉽게 생활의 계획을 끝내지 않은 채 내버려 두거나, 그렇지 않으면 일들을 너무 나쁘게 해서 전연 하지 않은 것보다 더 나빠집니다. 그것이 그대의 방식에 대해 매일 더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을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을 의미하는 그 길입니까?

한가지 권리, 즉 그대의 의무를 완수하는 그것 이상은 갖지 않기를 열망하십시오.

짐이 무겁습니까? 아닙니다. 천번이고 아닙니다! 그대가 자유스럽게 받아들인 저 의무들은 그대를 당신 정욕의 흙더미 위로 높이 올려 주는 날개들입니다.

새들이 그들의 날개 무게를 느낍니까? 만약에 그대가 그것들을 잘라서 저울에 올려 놓으면 그대는 그것들이 얼마나 무거운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날개가 떨어져 나간다면 새가 날 수 있습니까? 새는 그 날개들이 필요하고 그것들의 무게를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새를 다른 생물들 위로 올려 주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날개들 역시 무겁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대가 그것들을 갖지 못 한다면 그대는 더없이 더러운 흙탕 속으로 빠져 들어갈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 규율은 그것이 깨끗하고 성실한 사랑과 함께 지켜질 때에는 전연 무겁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설사 그것이 그대에게 큰 부담이 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대를 사랑받으신 분께 결합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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