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박

이 세상의 비참한 상태를, 명민한 머리로 생각해 그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풍요와 비교한 다음,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에 결정적인 이름을 붙인다면, 제 의견으로는, 단 하나입니다.즉, 어리석음, 어리석음, 어리석음입니다.

저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수를 저지를 뿐만 아니라, 더 심한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슬퍼해야 할 일이지만, 그대는 토대가 되는 징검다리처럼 아무도 보지 못하고 건물을 지탱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되고 싶다고 합니다.

그거야말로 사악한 인간이 하는 짓 아니겠습니까?

활동적이기는 하나 실천하지 않는 나쁜 그리스도인들이 있기 때문에 충격을 받지 마십시오. 사도가 말하기를, 주님께서는, “사람마다에게 그의 일들에 따라서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대에게는 당신 것에 대해서, 저에게는 저의 것에 대해서.

만약에 당신과 제가 먼저 우선 잘 행동하기로 결심한다면, 이 세상에 남겨진 악당가운데 둘이 적어지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그대가 경박해지는 것에 대해 싸우지 않는다면, 그대의 머리는 넝마가게 같아질 것입니다: 그대는 단지 불가능한 이상들과, 거짓된 희망들과, 그리고··· 묵은 쓰레기를 저장하고 있게 될 뿐일 것입니다.

그대는 대단한 독립심의 소유자입니다. 만약에 그대가 이것을 초자연적 방법으로 활용한다면, 그것은 그대를 위대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도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은 단지 그대를 대단히 자유스럽고 안이하게 만들고 있을 뿐입니다.

그대는 모든 일을 아주 가볍게 받아 들여서 나로 하여금 다음의 옛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이런 외치는 소리가 납니다. “사자가 오고 있다!” 그런데 박물학자는 대답하였습니다. 왜 저에게 말하는가? 나는 나비를 잡는다.”

무서운 사람은 무식하면서도 동시에 지치지 않고 일하는 자입니다.

그대가 늙고 쇠잔할 때까지도 그대는 계속 더 잘 훈련되기를 원하도록 주의하십시오.

이것은 경박하고 이기적인 사람의 핑계입니다. “나는 아무 일에도 나 자신을 개입시키기를 원치 않는다.”

그대는 선과 악 어느 쪽도 바라지 않습니다. 또 그래서 양쪽 다리를 질질 끌고 계속 다니면서 그대의 길을 잘못 잡았고 그대의 생활을 공허로 채웠습니다.

우리들에게 극단주의를 경계하면서. 현명한 말씀은 이르기를, “덕은 중용에서 발견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충고를 당신 자신의 안락과, 타산과, 미지근함과, 안이함과, 이상주의의 결핍과, 범용으로 전환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마십시오.

다음의 성서의 말씀을 묵상하삽시오.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내겠다(묵시 3:

15‐16)”

그대는 결코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지 않습니다. 그대는 언제나 우발적인 일들에 관심을 갖습니다. 성서의 말씀을 되풀이하게 해 주십시오. 그대는 오직 “바람 속에서 말했을(예레 5:

13)” 뿐입니다.

강론을 들은 후에 자신들에게 그 가르침을 적용하는 대신, 그것은 모씨에게 대단히 잘 맞을 것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시켜 재판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중상모략이라고 해도 악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그들의 말에 따르면 중상모략이란 무식한 사람이 모르거나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기 위해 세우는 가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중의 악입니다. 즉, 무지와 거짓말입니다.

그렇게 무책임하게 말하지 마십시오. 그대가 첫번째 돌을 던지자마자 다른 사람들은 —이름없이— 본격적인 돌싸움을 시작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까?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그 불만스러운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는 사람이 그대입니까? 그렇다면 그대는 나쁠 뿐만 아니라 바보입니다.

어떤 불행이나 과오가 일어났을 때, “나는 그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불충분한 만족입니다.

그것은 그대가 그대의 이웃의 곤란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그 일이 그대의 힘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대는 마땅히 구제책을 강구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혼란을 심는 방법이 많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마치 일반적인 규칙인양 예외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혼란을 심기에) 충분합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라고 그대는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더욱 슬퍼집니다.확신이 별로 강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는 도중에 멈추거나 변명하거나 합니다. 행동적인 가톨릭 신앙이 형성되어 있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그대는 경솔과 무지와 열등감에 져서 그렇게 터무니없는 소문을 아주 단순하게 믿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애처로운 결과가 아니었다면 웃음거리가 되는 것으로 끝났을 텐데 말입니다.

우둔하거나, 비양심적이거나, 위선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자기네들과 꼭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진짜로 가엾습니다— 그들은 마치 자기네들인양 남들을 다룹니다.

당신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까지 시간낭비를 시키면 더더욱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그대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에게 돌아가야 할 영광을 그대가 점점 더 많이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확실한 이상과 목표를 가지고 이 세상의 인생을 헤쳐 나갈 길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성숙성과 침착성이 결여 되어 있습니다. 복되신 동정녀께 어떠한 분심도 없이, 전심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라고 청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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