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

그대가 어떤 사람을 위해 호의를 베풀거나 봉사를 해 주는 것이 어렵게 느껴질 때에는, 그 사람 또는 그녀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과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서로 사랑하기를 요구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뿐만 아니라 이 복음의 명령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매일 노력하십시오. 겉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간단한 일이니 결심을 하고 매순간 네 행동을 그 요구에 맞추십시오.

“사람들이 몹시 분주하게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 그리스도의 이름만은 설교되고 있지만,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이 드문 현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로서 예수님과 일치하여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야할 그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가서 여러 나라 백성 모두에게, 모든 시대에 걸쳐 가르침을 전파하라고 주님께서 분부하셨는데 말입니다.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공통의 사명과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 사람들은 결속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행복이라는 ‘유일한 목적’이 별로 값어치가 없어보입니다.

그대에게 우정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작은 무리의 목자로서의 자각을 갖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이전에 저버렸던 사람들을 지금 다시 모아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섬기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였습니다.

단순히 수동적인 태도로만 유지해서는 안됩니다. 당신 친구의 진정한 친구가 되는, 즉 도움의 손길을 뻗쳐야 합니다. 우선 당신의 행실의 모범을 따르고, 이어서 당신의 권유와 친밀감을 더하는 영향력으로 말입니다.

그대가 의외로 발견한 우애와 우정의 정신이 그대에게 열성과 함께 채워졌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갈망하면서 꿈꾸어 왔었지만 경험해 본적이 없었던 그 무엇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우리들 모든 개개인을 위해 남김없이 우리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준 그 사랑스러운 우리들의 형제인. 그리스도의 형제들임을 사람들이 잊었기 때문입니다.

뜻밖에 발견한 우애와 우정의 정신에 당신은 푹 빠졌습니다. 당연한 얘기입니다, 꿈에 그리면서도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당신이 그것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형제라는 것, 즉 타인을 위해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우리의 다정한 형제, 그리스도의 형제임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당신은 알고 싶은 모든 것을 가르쳐 주는 진정한 선생님, 진정한 친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책략을 부려 그들의 지식을 ‘훔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힘든 고생과 고통 끝에 얻었지만, 당신은 더 편한 방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대가 저 사람, 이 사람,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일을 해 줄 차례입니다.

똑바로 묵상하고 결과에 따라 행동하십시오. 그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당신이 그들을 ‘정말’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생각을 바꿀 겁니다. 당신 하기 나름입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야 합니다. 가시밖에 나지 않는 장미나무를 본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을 할까요?

미지근한 사람을 뜨겁게 하려면 열의라는 불로 감싸줘야 합니다.

“나의 상태를 한탄하지 마라, 너희들을 그토록 슬프게 하는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 달라”, 이렇게 외치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 대한 형제애의 의무를 생각하면, 당연히, 그대는 눈치 채지 못하도록, “작은 일들을 위한 사도직”을 실행할 것입니다. 즉 그들의 길이 쾌적하게 되도록 그들을 섬기기를 원할 것입니다.

‘모욕 일람’을 소중히 가지고 있다니, 이 얼마나 마음이 좁은 사람입니까. 그런 불쾌한 사람과는 도저히 같이 생활할 수가 없습니다. ‘항상 실행해야 할’ 보살핌이나 봉사 등의 수를 기록하지 않는 것과 같이, 진정한 애덕을 갖추고 있다면, 타인의 건방진 언행을 메모 하거나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입니다.

그대는 대단한 노력이 요구되는 생활계획을 실행합니다: 그대는 일찍 일어나고, 기도하고, 성사를 자주 보고, 공부나 일을 많이 하고, 술취하지 않고 정욕을 극복하였지만, 무엇인가 빠져있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이 점을 하느님과의 대화에서 생각하십시오: 거룩함(聖性)이나, 또는 그것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은 사랑의 충만이기 때문에, 그대는 반드시 하느님에 대한 그대의 사랑과 주님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위한 그대의 사랑을 다시 보아야합니다. 그때에는, 영혼 속에 감춰져있는, 여지껏 싸워보기조차 하지 않았던 대단한 결함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대는 착한 아들, 착한형제, 착한동반자, 착한친구, 착한 동료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신의 거룩함’만을 사랑하니까 질투가 많습니다.

그대는 많은 ‘개인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희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자기 자신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을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살지 않는 셈입니다. 한마디로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욕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 그대는 자신을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대는 모범이나 봉사라는 좋은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 그대는 나쁜 친구가 아닙니까?

그대는 먼저 남을 나쁘게 취급합니다. 그리고 누가 반응하기도 전에 "자, 서로 사랑하자" 고함을 지릅니다.

두 번째부터 시작하면 첫 태도를 취하지 않을 텐데요

그의 어머니가 그에 관해서 “그 녀석을 네 친구들에게 소개하여라. 그렇게 하면 그 녀석은 틀림없이 그 친구들이 너와 싸우게 만들 것이다”라고 말할 사람같이 불화를 심는 사람일랑 되지 마십시오.

“그 친구가 그대에게 보여준 형제애는 그리스도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은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심하게 헐뜯은 사람이 있습니다. 친한 친구라도 믿지 않는 게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형제’는 먼저 중상자를 조용히 하는 고귀한 행동을 하고, 그 후에 성실하게 그 사람의 이름을 그대에게 말해야 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형제’가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없다면 그대를 아무도 신뢰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애덕이 없게 만들 것이며, 결국 그대를 외톨이로 만들 뿐입니다.

당신은 요만큼도 초자연적인 시각을 갖지 못합니다. 남들을 보면 꼭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다거나 낮다거나 이런 생각밖에 안하고,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고, 그것을 위해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도량이 좁습니다. 자주 기도하지만 가짜 믿음이어서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한데서 떠나 저 영원한 불속으로 들어가거라··· 왜냐하면 나는 굶주렸고··· 저는 목말랐고··· 나는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너는 나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았다.”

온전히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이웃과의 교제에 있어서 이기주의나 무관심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우정이 있다면 비록 나누거나 받아들일 수는 없을지라도, 친구의 신념을 이해하려고 진심으로 노력할 것입니다.

우정의 길에 잡초가 자라나게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의리 있게 지내십시오.

우정에 관해 굳은 결심 하나. 설사 그것이 누구일지라도 내 이웃에 대한 오늘까지의 생각이나 말과 행동을 바꾸자. 즉, 반드시 애덕을 실행하여 결코 무관심하지 않도록 하자.

당신의 사랑은 당신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적응하고 맞춰지고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일 것. 이것이야말로 서로 참고 견딜 뿐 아니라 그것을 훨씬 뛰어넘기 위한 조건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친구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마찬가지로 영웅적인 행위가 요구될 때도, 일상 생활에서도 서로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앙이 없는 사람을 거룩한 교회로 불러들이려 해도 예수님을 따르겠다던 우리가 서로 어색하게 대한다면, 그것은 무리한 권유가 아닙니까.

사람을 끌어당기는 상냥한 대접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늘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사도직은 생기 없는 폐쇄적 모임 속에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대의 우정과 가르침이 있다면-다시 말하면- 애덕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기 위해 비가톨릭 신자들을 동원해 그들의 진지한 협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가 조직한 모임에 참석한 후에, 그 노동자가 열중해서 말하고 있던 것을 메모했습니다. 이곳에서 들은 것 같은 고결함이나 정직, 상냥함이나 관대함 등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감탄한 그 사람은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좌익과 우익의 물질주의에 비교하면, 이것은 참된 혁명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확립해 주신 형제애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없을 테니 열심히 노력해서 그 가르침이 힘을 잃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가끔 그대는, 정신이 산만하거나 또는 넋을 잃곤 한다고 말하거나, 또는 무미건조하고 수줍은 것이 그대의 성격이라고 변명합니다. 심지어 그래서 함께 사는 사람들조차 깊게 알지 못한다고 덧 붙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설마 그런 변명으로 만족하는건 아니겠지요?

일상 생활의 사소한 모든 것을 초자연적인 눈으로 보라고 그대에게 권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덧붙였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면 하루 종일 여러 번 그럴 기회가 있을 거라고요.

애덕을 실천한다는 것은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이지, 사람들이 하느님을 향해 가는 길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지, 남이 그대와 똑같이 생각하고 그대에게 동참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을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병행하여 나아가는 길로서, 각각 자기 고유의 길을 걸어 신에 이르는 것이지요. 따라서 길을 비교해서 누가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는지 궁금해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 중요한 것은 모두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니까.

그대는 말하기를 그 사람은 결점으로 가득차 있다고 합니다.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람들은 천국에서만 발견된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당신도 결점들이 있지마는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그대를 참아 주고 그리고, 그보다도 더해서, 그대에게 감사합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굳건하게 가지셨던 사랑을 가지고 그대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들이 적지 않은 단점들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서 배우십시오.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그대는 불평합니다. 그저사람은 이해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언제쯤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조금 더 노력할 생각입니까?

그래요. 인정합시다. 확실히 그 사람의 행동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열하고 비난할 만한 태도를 취했고, 무릇 품위가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아무리 경멸을 받아도 당연하다, 라고 당신은 덧붙였습니다.

거듭 말하겠습니다, 그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찬성은 할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의 보잘것 없는 생활도 성스러운 것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목숨을 속죄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주님이 경멸하지 않으셨던 생명을 당신이 경멸해도 되는 것입니까.

그대가 우정을 이유로 남의 비열한 행위에 공범자가 되어버렸다면 값어치도 없는 서글픈 동료가 된 셈입니다.

원래 가혹하게 정해진 것이 없는 인생은 때때로 참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훨씬 더 초자연적이 되고 하느님의 손이 보여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면 인간적이 되고 주위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사면을 부여할 수 있는가, 이는 권위자의 권한에 비례합니다. 단순한 판사라면 설령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해도 유죄 판결을 받고 죄를 인정한 범인에겐 형을 집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 나라의 원수라면 때로는 사면이나 대사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통회한 사람을 항상 용서하십니다.

“여러분을 통해 하느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주님은 저의 어리석은 행동과 모욕적인 행위를 잊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맞이해 주셨습니다.” 이는 통회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20세기 돌아온 탕자가 형제들에게 쓴 말입니다.

그대의 작은 걱정과 꿈은 값싸고 숫자도 적지만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꽤나 고생한 후에야 그것들을 물리치고, 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대의 꿈과 관심의 대상은 형제자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웃 가운데에서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백배!” 그대는 며칠 전에 주님의 그 약속을 기억해냈습니다.

저는 그대에게 확언하거니와, 사도직에서 그대의 동반자들 사이에 살아있는 우애 속에서 그대는 그 일백배를 발견할 것입니다.

형제간에 진정한 사랑이 있으면 얼마나 두려움과 위험이 사라질까요? 입 밖에 내면 깨끗함이 없어질 것 같기 때문에, 일부러 말을 꺼내지 않지만, 어쨌든, 그것은 하나 하나의 작은 행동 안에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전폭적인 믿음을 가지고 매일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세요.마음에도 생활에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어머님 마음속에 있는 보물을 나누어 갖게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머니 슬하에 달려들어 도움을 애원하고 전구를 청하고도 버림받았다 함을 일찍이 듣지 못하였나이다.”라고 우리가 큰 소리로 외치는 그대로 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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