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말

여러 가지 언어의 재능을 갖는 것은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는 방법을 아는 것으로 —그것은 사도가 될 사람 누구에게나 필요불가결한 조건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주 하느님께 매일 주님의 아들과 딸들 하나하나에게 여러 가지 언어의 재능을 허락하시도록 청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불필요하게 해치거나 또는 애덕을 파괴하는 느닷없는 거부 따위에 의지하는 일 없이, 아니오라고 말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그대는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 앞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대는 제가 최근에 유행하는 경향을 고려하지 않고 똑같은 긴요한 일들을 똑같은 방법으로 되풀이하는 것을 반대합니까? 보십시오, 직선은 수세기 동안 똑같은 방법으로 정의되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간명한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정의들은 더 모호하고 복잡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 관해서 그리고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들에 관해서 우호적으로 말하는 습관을 들이고, 특히 그대가 하느님의 사업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 관해서 말할 때 그렇게 하십시오.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나 침묵을 지키십시오. 날카롭거나 또는 짜증나게 하는 비판은 뒷공론이나 비방을 초래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더욱 전폭적으로 바친 한 청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제가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덜 이야기하고, 병자를 심방하고 마루바닥에서 잠자는 것입니다.”

그것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사제들에 관해서는 오직 그들을 칭찬하기 위해서만 말해야 합니다.

나를 포함해 모든 사제가 이 점을 깊이 생각하고 매일 처신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거짓말하는 데는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과묵, 음모, 비방···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비겁한 자의 무기입니다.

당신 자신으로 하여금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말하는 첫번째 말이나 마지막 말에 의해 인상을 받도록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존경과 관심을 가지고 들으십시오. 사람들에게 상응하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러나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그대의 판단을 심사숙고하십시오.

사람들은 뒤에서 험담하고 "이런 소문을 들었어"라고 말을 하게 만드는 것도 그 사람들입니다. 네, 확실히 미천한 방법입니다.그러나 평안을 잃지 않습니다. 당신이 옳은 뜻을 가지고 일하는 한 그들의 혀가 해롭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멍청하고, 이 얼마나 무식한 패거리인가. 형제에 대해, 특히 하느님에 대해 충성심이 결여되어 있는 것, 실로 심하지 않습니까.

반박할 권리를 잘못 해석하고 험담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면 복음서의 권유에 따라 형제적 설유를 활용하십시오.

그런 어려움이나 구설수에 속썩이지 맙시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업에서 일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길을 가면 먼지가 날리는 법입니다.

당신을 곤란하게 하고 상처입히는 것을 스스로를 정화시키고 가꾸는 데 활용하십시오

험담하는 것은 극히 인간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반박합니다.

단 한 명의 악의적인 말이나 경박한 말이 여론이 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남을 욕하는 유행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그 험담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 자칫 응축돼 먹구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격을 받는 것이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구름은 풍성한 결실을 가져다주는 비로 바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모욕하고 중상해 할 때 하느님은 그를 높여 주십니다.

그대는 그것을 믿기를 원치 않았지만, 그대는 손해를 감수하며 증거에 굴복해야 했습니다. 그대가 단순하게 그리고 건전한 가톨릭적 의미로 만든 그 진술들이 신앙의 적들에 의해 악의로 뒤틀려져 버렸습니다.

“우리들은 비둘기같이 온순하고 뱀같이 슬기로워야 한다”는 것은 진실입니다. 장소가 아닌 데서나 옳지 않은 때에는 말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의 고귀한 행동을 흉내낼 수 없거나 흉내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은밀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그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 관해서 나쁘게 말하는 것은 질투의 딸입니다. 그리고 질투는 불모(不毛)가 피난처를 구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대는 불모증에 직면하고 있으니 그대가 사물을 보는 방법을 검토해 보십시오. 만약에 그대가 일을 계속하고, 역시 일을 하면서 결과를 얻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대하면서 괴로워지지 않는다면, 그때에는 당신 노력의 불모성은 단지 겉모양에서나 그럴뿐일 것입니다. 때가 되면 그대는 그 수확을 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거나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으면 헛되이 보낸다고 생각합니다.

험담하는 사람은 소악마에 홀린 사람이라고 가끔 생각합니다. 악마는 사악한 마음으로 하느님 혹은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을 비판하도록 만들기 마련이니까.

“그들은 엄청 겁나는 일들을 하고 있다”라고 그대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합니다.

그대는 그들을 개인적으로 압니까? 그렇지 않다구요? 그렇다면 어떻게 그대가 모르는 것에 관해서 말할 수 있습니까?

뒷전에서 험담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나는 그 관련자에게 일러 줄 것이오” 또는 “나는 그에게 그 일에 관해서 말할 것이오”.

현대의 저자가 이렇게 썼습니다. “험담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은 비인간적이고, 그것은 저질스러운 사람임을 드러내며, 그것은 교육을 받지 못한 표시이니, 그것은 감정의 세련이 결핍되었음을 보여 주고,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치가 없는 짓이다”.

그대는 언제나 불평하는 짓과 비판하는 짓과 험담하는 짓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대는 무슨 일이건 형제들 사이에 불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절대적으로 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대가 커다란 직권을 갖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의 침묵을 그대에게 찬성한다는 표시로 해석한다면 정말 경솔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제안을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제안을 받으면 마음이 상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대는 스스로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중상을 받았을 때 취해야 할 태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순간부터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십시오. 이어서 사랑하는 것, 즉 애덕에 어긋나는 일이 하나도 없도록 항상 사랑의 마음으로 보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격이 어머니 교회에 대한 것이라면 용감하게 변호해야 합니다. 침착하되 단호한 태도와 용기로 가득 찬 고결한 마음으로 길을 더럽히거나 방해받는 일이 없도록 싸워야 합니다. 이는 개인적으로 모욕을 당하고도 사랑의 마음으로 용서, 그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응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걸어야 할 길입니다.

실컷 비방을 당한 어떤 사람이 한번은 말하기를 그는 가장 작은 마을이 수도이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가엾은 사람인 그는 그곳에서도 꼭 같으리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과 당신 이웃에 대한 사랑을 위해서는, 그같은 작은 마을의 결함에 빠져들지 마십시오. 그것은 너무나 그리스도인답지 않습니다. 성경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얼마나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가를 보라.” 이 말을 모든 경우에 그대와 나에게 적용하여 말할 수 있습니까?

사도직의 사업에 대한 비판은 통상 다음의 두 가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 일이 어떤 사람들에 의해 극히 복잡한 구성으로 제시되는 경우와,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편하고 쉽다고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종당에 그러한 “객관성”은 적절한 분량의 쓸데 적은 소리가 투입된 편협성으로 졸아듭니다. 고민하지는 마십시오. 그러나 그들에게 화내지 말고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대는 그대의 신앙이 요구하는 것들에 대한 이해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나, 최소한 존중해 줄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 충실한 친구에 대해 나쁘게 말한 사람들이야말로 그대가 좀 더 착하게 행동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대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모종의 표현은 이미 상처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상처 입힙니다. 그래서 머리와 마음으로 주님의 뒤를 밟고 있다면 비판을 맑게 받아들이고 걸음을 빨리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는 우리들의 성모님께 면류관을 씌워 드렸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나하나의 쓸데없는 말의 결산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말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성모님께 청하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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