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성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인생 행로가 뻗어나가는 길이 이것입니다. 곧 고난 —그리스도 교적 용어로는— 십자가; 하느님의 뜻, 사랑; 행복은 여기에서부터, 이후에도 또 영원한 것입니다.

기쁨 속에서 주님을 섬기십시오. 저는 기꺼이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이 기쁨은 저의 믿음,희망,사랑의 결과이며,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입니다. 사도인 성 바오로가 보증하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저를 바싹 따라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주님과 함께 아주 자신있게 걸어가겠습니다. 주님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이렇게 해서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주님의 도움으로 저는 주님의 도움을 받아 지극히 사랑스러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겠습니다.

제가 거듭 강조한 바 있는 한가지 충고: 명랑하십시오, 언제나 명랑하십시오. 이 충고는 자신들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생각하지 않는 저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대가 말씀하신 것처럼, 형제들이 그 방법이 쉽다는 것을 알게 되도록 도와 주기 위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힘들여 해내는 일”에서 발견되는 기쁨이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신앙인이 저에게 이렇게 써보내 왔습니다: “그대가 자기 힘으로만 해야 하게 되었을 때 그대는 당신 형제들의 도움을 똑똑하게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제가 모든 일을 ‘오직 혼자서’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 머리에 떠오를 때, 저는 자주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와 멀리 있으나 함께하는 그러한 동반자’ 곧 성인들의 거룩한 통공이 아니라면 저는 제 마음을 채워 주는 이 낙천적인 마음을 보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는 옆에서 미소를 지어줄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대들은모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멀리서 그리스도의 적들이 악마적인 시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은 ‘찡그린 얼굴’을 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는 극악무도한 계략을 지칠 줄도 모르고 사용합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좋은 사람’이 되려는 사람들 중에도 ‘슬픈 표정’으로 덕을 실천하여, 그러한 소문을 퍼트리는 데 도움을 주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대는 이런 우승꽝스러운 거짓말을 우리들의 명랑하고 행복한 삶으로 지워버리길 원하셨습니다.

주님, 저희가 이 점을 잊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그대가 희생이 풍기는 달콤한 냄새를 주위에 퍼뜨릴 때, 그대의 얼굴에서 슬픔이나 고통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느님의 자녀들은 언제나 평화와 기쁨의 씨앗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인 남녀는 주위에 넘쳐나는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침착한 기쁨, 전해지기 쉬운 기쁨, 사람을 끌어들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기쁨입니다. 다시 말해 매우 초자연적이고 전파되기 쉬워 극히 자연적인 기쁨을 유지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길로 끌어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족하십니까?”라고 질문받은 저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자각하는 사람이 마음과 의지에서 느끼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탄 시기. 그대는 이렇게 써 보냈습니다. : “마리아와 요셉에게 마음을 모아 거룩한 기대와 함께, 저도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구간에서는 큰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걷잡을 수 없는 한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저는 베들레헴에서 얼마나 행복하게 느끼게 될까요! 그리고 저도 주님과 함께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대의 말이 진실한 것이기를 바랍니다.

성실한 결심 : 인생은 그렇지 않아도 충분한 괴로움을 가져다 주는 것이니, 사람들을 위해 걷기 쉽고 사랑스러운 길을 만들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것, 하느님을 위해 영혼들을 쟁취하는 것은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면, 신자들이 줄어들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또 어리석은 과거의 반복. 그리고 후에 그대가 되돌아 왔지만 그대는 명랑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겸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후반부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 아직도 비참한 돼지먹이의 행복에 애착을 느끼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교만한 그대는 스스로의 약함에 상처받고, 용서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겸손해지면 하느님 아버지의 기쁨에 찬 환영이 반기고, 집에 되돌아온것과 새출발을 축하하는 잔치가 기다리고 있을것이라는 사실을 그대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아무런 가치도 없고,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나날의 투쟁 한복판에는 장애물과 유혹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에게 일치하고 있다면, 그들의 ‘기쁨’이 모든 곤란을 없앨 것입니다. 그것은형제들이 주님께 확고하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신은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객의 비유와 같은 장면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두려워하고, 또 누군가는 일을 핑계로 삼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꾸며낸 이야기나 엉뚱한 변명으로 얼버무리려 합니다.

그들은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지겹고, 머리가 혼란스럽고, 아무것도 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 지루해하고 괴로워 합니다. 매순간마다 하느님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기쁨에 넘치고 행복하게 사는 편이 훨씬 편한데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정말 너무나 쉽습니다: “저는 쓸모가 없고 나에게는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제대로 되는 게 없다.” 진실되지 않다는 것을 떠나서, 이러한 비관주의는 엄청난 게으름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대가 잘하는 일도 있고, 그대가 잘못하는 일도 있습니다. 전자에 의지해서 당신 자신을 기쁨과 희망으로 채우십시오. 그리고 일들이 제대로 되게 하기 위해서 —낙심하는 일 없이— 후자와 대결하십시오. 그러면 일들이 잘되어 나갈 것입니다.

신부님, 충고해주신 것처럼 저는 저의 비참함을 스스로 비웃기로 했습니다. 비참함에 굴복해서는 안되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저는 전보다 훨씬 더 행복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슬픔에 잠겨 버리면 길을 잃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대는 제게 십자가를 지고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네,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 성스러운 봉인,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확실한 보증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함께, 언제나 기쁨 가운데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대는 큰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은 불안한 종류의 행복이고 좀 조마조마합니다. 그 행복감과 함께 당신한테서 무엇인가가 희생물로 잡아뜯기는 뚜렷한 느낌이 옵니다.

잘 들으십시오.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완전한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불평이나 피해망상에 빠지지 말고 하느님께 바치는 공물로 그대 자신을 온전히 바치십시오.

그대는 빛과 색채가 가득한 마음으로 매우 기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게다가 기이하게도 예전 같으면 낙담의 동기가 되었던 것이 지금은 기쁨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 그대가 보기에 달렸습니다. 그대가 주님을 찾을 때에는, 그대의 마음은 언제나 행복에 넘쳐흐릅니다!

신앙이 없고, 자기네 실존의 공허함 때문에 슬프고 주저하며, 풍향계같이 “변하기 쉬운”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초자연적 목적을 알고, 굳게 믿기 때문에 기쁨과 확신에 넘쳐 제대로 서있는 우리들의 인생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인가!

마치 그대가 중심이나 되는 것같이 그대가 모든 것을 당신 자신을 싸고 돌게 만들기 때문에 그대는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그대는 배가 아프고,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피곤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네들이 이러쿵저러쿵 말했고···

그대는 주님 하느님에 관해서, 그리고 주님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 관해 생각해 보려고 한 적이 있습니까?

‘병사’.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을 병사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의 군대에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찾아 싸우고, 사랑과 평화를 위해 축복된 그리스도교적 전투에 지쳐, 배가 고프고, 상처투성이지만 기쁨에 넘치는 병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병사들은 가슴에 확실한 승리의 빛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 비록 상처투성이가 되더라도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온화한 마음으로 있기를 결심 했으니 알려 드립니다.”

훌륭한 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대가 그 결심을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가끔 그대는 고민합니다. 무기력한 조짐이 나타나 열의를 잃게 만들고 아무리 희망을 구하는 기도를 거듭해도 만족스럽게 극복하지 못합니다.

상관없지 않습니까. 지금이 기회이고 더 큰 은혜를 하느님께 구하며 전진할 때입니다. 몸싸움에서 졌더라도, 투쟁을 위해 그대의 기쁨을 되찾으십시오.

의욕이나 열의 부족이 검은 구름덩어리가 되어 덮쳐 왔습니다. 완전히 얽매여 있는 듯한 느낌과 함께 슬픔이 소나기처럼 쏟아졌습니다. 그대는 포위 되었다는 강한 충동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여 낙담이 파고들어 옵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 즉 오랜 세월 싸워 왔는데… 아직도 아주멀리 뒤떨어져 있다는 현실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상태를 계산에 넣어 오십니다. ‘기쁨과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를 낙관적으로 만들어주는 하느님과의 부자관계를 확신할 뿐 아니라 스스로의 약함을 인정할 필요도 있는 것입니다.

그대는 젊어졌습니다. 하느님과의 우정 덕분에 짧은 시간에 젊은이의 순박하고 행복할 때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애 같은 짓을 하지 않고, 영적 어린이로서 확신과 기쁨까지 다시 살아났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동료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만난 지 오래돼 원숙기에 접어 들면서 사라지지 않는 젊음과 기쁨이 더해진 것입니다. 나이가 어려서가 아니라 마음이 젊고 기쁨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내적생활의 실체는 영혼들을 끌어당기고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젊음을 기쁨으로 채워주시는 하느님께 매일 감사를 드리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이 부족할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 혜택에 보답하는 한 안심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승리여부는 그대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하나가 된 그대의 의지와 기력이 있다면 승리를 확신하는 사람처럼 낙관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어제의 그대는 꿈에 배신당하고 야망을 꺾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대의 생활에 파고든 지금-주님, 감사합니다-미소짓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발길 가는 곳마다 미소와 사랑과 행복을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곧 모든 것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불편함, 피로, 더위와 추위 등을 겪어도 기쁨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건 모두 진짜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이 준비 하셨거나 허락하신 것이니 말입니다.

신앙도 희망도 없는 사람이나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없어 고뇌에 찌든 사람들을 대하면서 그대는 하나의 목표를 찾았습니다. 곧 ‘그리스도’입니다.

목표를 발견한 덕분에 생활에 끊임없이 새로운 기쁨이 쏟아지고 그대는 변할 것입니다. 미처 몰랐던 아름다운 일들이 나날이 눈앞에 무한한 확장을 보이며, 그대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이 넓은 길이 얼마나 기쁨으로 가득 찬 것인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이 지상(地上)에서 그대가 행복하려면 신앙과 순결, 그리고 주님이 제시하신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꿋꿋함이 필요합니다.

거창하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깊은 기쁨을 얻고 만족하니 하느님께 감사드리십시오.

하느님과 함께라면 매일 매일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저는 한번에 “조금씩” 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날은 약간의 기막힌 내용을 알아내고, 또 다른 날에는 제가 전에 본 적이 없는 광경을 발견합니다… 이대로 계속 시간이 지나가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저는 하느님께서 저를 이렇게 안심시켜 주시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너의 행복은 나날이 더 커져갈 것으로, 그것은 네가 저 성스러운 모험 속으로, 네가 개입하게 된 저 대단한 복잡성 속으로 더욱더 깊이 빠져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는 내가 결코 너를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기쁨이란 의탁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물레방아를 돌릴 때마다 그 기쁨은 더욱 확실해 집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이토록 변함없는 기쁨을 준다니!

그대는 모든 사람이 그 기쁨을 가질 수 있도록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이고 있습니까.

지금 그대가 걱정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밑바탕으로 한 미소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낙관? 네, 항상 낙관적 이어야 합니다. 일이 잘 안 풀릴 때도 그래야 합니다. 아마 그럴 때야말로 대영광송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할 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주님한테서 피난처를 찾았고, 주님이 나쁜 일을 보내실 리 없기 때문입니다.

희망한다고 빛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은 주님이 빛을 온전히 소유하고 계시고, 그 빛 속에 살고 계시다는 것을 보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주님이야말로 빛인 것입니다.

평화와 기쁨을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다른 환경에 가져다 주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신의와 기쁨을 가져다주는 십자군이 되어, 슬퍼하는 마음과 썩은 마음을 흔들어 일으켜서 하느님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대가 어떠한 부러움의 기색마저도 뿌리째로 끊는다면, 그리고 그대가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한다면, 기쁨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친구는 느닷없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하느님을) 사랑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저는 놀라서 누가 그런 말을 했느냐고 묻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기쁨으로 빛나는 제 눈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에 찬 눈빛은 어땠을까요? 어머니의 걷잡을 수 없는 기쁨에 찬, 빛나는 눈빛과 같을 터입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송 하나이다!.’ 주님을 태중에 모시고, 곁에 모시고 생활하기 시작한 이래로 성모님의 영혼은 주님을 계속 기리고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우리도 주님과 함께 있고 주님을 놓치지 않는 기쁨을 항상 유지할 수 있기를.

다른 언어로 된 이 챕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