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함

속이 좁은 사람, 성숙하지 못한 사람, 통찰력 없는 사람,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교적인 초자연적 수평선을 바라볼 수 없는 사람, 이런 사람은 되지 맙시다.

하느님과 담대함.

담대한 것은 무분별하거나 경솔하게 무모한 것도 아닙니다 .

담대한 것은 영혼의 삶에 필요한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인 용기(불굴의 정신)입니다.

그대는 열광이나 열정에 이끌려 그런 것이 아니라 심사숙고한 후에 결심했습니다. 바라기는 했지만 감정적인 것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원하신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바친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대는 아무런 심각한 의문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대는 가끔은 넘쳐 흐르기도 하는,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기쁨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그 담대한 사랑의 행동에 보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서 아주 널리 알려진 속담을 하나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세계는 하느님의 것이지만, 그것을 용감한 사람에게 빌려 주신다.” 저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대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저는 사도답지 않습니다… 겁이 많습니다.

그대가 겁에 질려 있는 것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무엇을 꾸물거리고 있습니까?

그대는 곤란에 봉착하여 위축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신중하고 절도 있는 객관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잊었습니까? 그대는 언제나 그 말들을 경멸하지 않았던가요. 그것들은 겁쟁이나 허약함, 안락함과 같은 뜻이라면서.

무서워한다? 그것은 나쁜 짓을 한 사람이 하는 짓입니다. 그대에게는 결코 해당 되지 않습니다.

두려움만 없다면 사도가 되었을 그리스도인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우리를 버렸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느님을 위해 무엇을 해드렸다는 것일까요.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도움만 있다면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다고 열중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두려움이 그대를 붙듭니까?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이 있다면-이것이야말로 소중한 건데- 성인이 될 수도 있는데

어떤 선한 일을 실행하지 않은 데 대해 그대의 양심이 그대를 괴롭히는 것을 느낄 때에는, 그것은 주님께서 그 일이 행해지지 않고 넘어가기를 원치 않으셨다는 신호입니다.

꼭 그렇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대는 하느님의 은혜로 그대가 그 일을 해 낼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잊지 않도록 합시다. 성스러운 하느님의 뜻을 완수함에 있어, 곤란이 해일처럼 사방에서 밀려오겠지만, 그 해일은 머지않아 끌려가는 것이라는 것을.

사도직이라고 하는 사업을 펼침에 있어서 맞닥뜨리는 ‘노(No)’는, 최종적인 ‘대답’이 아닙니다. ‘노력’을 거듭하십시오.

그대는 너무 ‘조심스럽고’, 혹은 너무 ‘초자연적'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대는 유난히 똑똑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내거나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그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마 그대만큼 ‘영리’ 하지않거나, 혹은 그대 이상으로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하느님께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만, 그렇지만’이라며 시끄럽게 문제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입니다.

매우 신중하고 용의주도한 방법이 있지만,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소심해지는 것입니다.

확신을 가지십시오. 하느님을 위해 일한다면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은 없으며, 일을 그만둘 만큼 실망하는 일도 없습니다. 설령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패는 없습니다.

그대는 신앙을 가졌지만 충분히 활동하지 않습니다. 신앙심이 있기는 하지만 그대는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 싸우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침착함. 담대함.

이런 미덕들로 겁쟁이들, 배신자들을 혼란스럽게 하십시오.

쉬는 날 없이 싸우겠다고 그대는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대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저에게 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적으로 봐도 문제가 모두 해결되고 장애물도 없는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그대가 많은 것들을 변화시켜야하기 때문입니다!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그 초자연적 사업에 뛰어들어 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지 못하거나 일을 잘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그대는 말합니다. 만약에 그대가 하느님에 관해서 더 생각한다면 그러한 핑계들은 없어질 텐데…

몇몇 선량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두려움, 하느님과 교회의 적이 그 두려움 의지해서 지내고 있다고 때때로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면 저는 너무 부끄러워집니다.

대화를 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말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허름한 집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저의’ 방 안의 대들보 세는 것이 하늘의 별을 세는 것보다 낫거든요.”

이런 사람은 많습니다. 자신의 작은 것을 버리고 하늘에 눈을 돌릴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더 높이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질 때가 아닙니까?

거룩한 파종(씨뿌림)에 앞장서는 행운을 얻은 사람이, 초자연적, 인간적인 기쁨을 맛보고 있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도시 전체와 그 주변을 감동케 하는 유일한 자가 된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라고 크게 만족하고 자주 말하고 있었습니다.

더 많은 수단을 손에 넣을 때까지, 더 많은 사람이 올 때까지,라고 생각하고 기다리지 맙시다. 사람들은 오늘, 지금 그대를 필요로 하고 있으니까.

기도할 때는 담대해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은 비관적인 그대를 낙관적인 사람으로, 겁쟁이를 담대한 사람으로, 허약한 정신의 소유자에서 신앙인 즉, 사도로 바꿔놓으실 것입니다.

그대를 굴복시켰던 어려움, 답파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산맥으로 보이던 어려움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바람과 물에게 조용해지라고 명령하셨을 때처럼, 그 문제들은 기적적으로 해결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그대는 의심하고 있다니,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을 그토록 많이 돕지 마삽시오!”라고 내 친구 하나가 농담조로 말했으나 무척 겁에 질린 소리였습니다.

저는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아주 조금밖에 “주님을 돕지” 않는다고

많은 남녀가 그토록 소심하고 그토록 거짓된 신중함을 가진 것을 보면 꼭 한 번 그들에게 묻고 싶어집니다. 신앙과 신뢰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 위한 것일 뿐, 실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대는 자신이 꽤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내면을 보면 움츠러들게 되는데 위쪽을 보면 자신감이 생기고 활기가 생기고 밝아집니다.

걱정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잘 알게 된 것의 표시이며, 이것이야말로 소중한 점이지만, 하느님을 한층 더 잘 알아가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아시겠습니까? 하느님과 함께 행동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왜 놀라워합니까.

납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진정으로 신뢰한다면 일은 쉽게 진행됩니다. 오히려 예상했던 것 이상의 일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그대를 통해 일하실 수 있도록 성스러운 담대함을 실행하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세요. 성모님은 겸손의 길을 걷는 그대를 동행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머리로 생각하면 무리라고 생각되는 일에도, 하늘과 땅을 하나로 만드는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로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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