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권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네, 우리는 이 세상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그렇게 하도록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즉 '하느님이 그토록 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세계야말로 그리스도가 되찾아 주신 평화를 얻기 위해 우리가 싸움을 벌이는 전쟁터, 즉 애덕의 아름다운 싸움을 계속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련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정복하는 것을 인정해주십니다.

더할 나위 없이 겸손한 주님은 스스로는 이 세상의 정복을 가능하게 하는 데 있어서 우리에게 가장 쉽고 편안한 것, 즉 행동과 승리를 양보해 주신 것입니다.

세계…'세계는 우리의 것입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 당신은 자기 자신의 여문 옥수수 사이를 걷는 농부의 전적인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는 지배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금은 희망의 시기이고, 저는 이 보물에 의지해 살고 있습니다. 신부님,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라고 그대는 말했습니다

그렇다면…이 세상 전체와 우정이나 예술, 과학, 철학, 신학, 스포츠, 자연, 교양, 영혼 등 강인한 힘으로 당신을 매혹시키는 인간적으로 가치 있는 모든 것을 그 희망, 즉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에 기대십시오.

세상이 끊임없이 뿌리는 이 막연한 기분 좋은 매혹. 색과 향기로 당신을 끌어당기는 길가의 꽃들, 하늘을 나는 새들, 만들어진 모든 것들.

가엾은 아이여,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이 세상 무엇 하나 당신을 끌어들이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떤 희생을 주님께 바칠 생각이었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소명을 받았으니 하느님 안에 있으면서 세상일에 종사해야 합니다. 다만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돌려주는 데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세상 끝날 듯 아욕을 추구하기 때문에 결국은 열심히 슬픈 삶을 사는 사람이 많은 이 세상에서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니 거짓말 같습니다.

당신은 그런 슬픈 사람들 틈에 끼지 않기 위해서라도 매 순간 마음을 고쳐야 합니다.

세상은 차갑습니다. 잠든 것 같습니다. 당신은 종종 전망대에서 방화마(放火魔) 같은 눈을 하고 그 세계를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주여, 사람들을 깨어나게 하소서.

그 답답함을 좋은 쪽으로 가져가십시오. 그러기 위해 목숨을 다 태워버린다는 생각으로 노력하면 이 세상 구석구석까지 불붙이게 될 것이고, 이 세상 모두가 보는 길이 바뀌리라는 것을확신하면 좋겠습니다.

제가 늘 당신에게 요구하는 충성, 즉 하느님과 사람들에 대한 봉사란 경박한 열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길에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 바꾸어 말하면, 어디에나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깨닫는 일입니다.

하느님 좋은 자녀가 되고 싶으면 매우 인간적이 되어야 합니다. 다만 천박하고 속된 사람이 돼서는 안 됩니다.

'사회인으로서의 의무를 단단히 다한다. 그런 다음 스스로의 권리를 요구하고, 그것을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유용하게 사용한다.’ 이런 조용한 동작으로 인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요구하기는 어렵습니다.

확실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효과적입니까.

좋은 가톨릭 신자인 것과 충실한 사회를 섬기는 것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와 국가가 하느님이 부여한 소명을 완수함에 있어 각각의 권위를 정당하게 행사해도 양자가 충돌할 리 없습니다.

이와 반대를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 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야 말로 거짓 자유를 빌미로 ‘친절하게도’, 가톨릭 신자는 카타콤(지하무덤)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문화와 경제, 일과 휴식, 가족생활과 사회생활 등 현대적 삶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유에 의해 지배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계급의 선입견을 향유할 수 없는데, 그것은 그가 모든 사람의 문제들에 흥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문제들을 우리들의 구원자이신 분의 정의와 사랑을 가지고 해결하도록 돕기를 시도합니다.

“주님은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라고 그가 썼을 때 그 사도는 이미 그 점을 지적해냈습니다. 저는 그의 말을 이렇게 옮기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의 인종, 곧 하느님의 자녀라는 인종이 있을 뿐이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영혼들이 최대한 빨리 하느님을 잃고 이어서 이 세상을 잃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짓밟고 이 세상을 착취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 이중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루 종일 불쾌한 마음으로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걱정거리입니다.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유일한 도피처인 잠마저 오래가지 않을거라며 잠들기 전부터 걱정합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고 다시 하루가 시작되는데 짜증이 나고 실망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남겨진 것은 영원한 행복으로 가기 전의 첫걸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임을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기쁨을 누리며 걸음을 계속하는 자만이 그 행복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슬픔에 잠긴 삶의 방식과 기쁨에 찬 삶의 방법의 차이, 소심과 담대함의 차이, 신중하고 교활하고 ‘위선적인 태도’와 겉과 속이 다르지 않는 태도의 차이, 다시 말하면 속된 사람과 하느님 자녀들의 차이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줍시다.

그대가 피해야 할 근본적인 실수를 하나 알려주겠습니다. 즉, 당신이 사는 시대나 환경의-존귀하고 정당한-습관과 요청을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성스러운 도덕에 맞추도록 인도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존귀하고 정당한’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다른 것과 분명히 구별한 점에 주목해 주었으면 한합니다. 고귀하지도 정당하지도 않은 일에는 시민권이 없는, 즉 시민이 받아들일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일상의 행동에 있어서도 생각에 있어서도 삶과 종교를 떼어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과 땅은 저 먼 지평선쯤에서 한몸을 이루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이 정말 한 몸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인 그대 마음 속입니다. 이걸 잊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교활한 박해를 받아 공공장소에서 추방당하는 것은 물론 특히 교육 문화 가족생활에 개입하는 것이 방해될 때 수수방관할 일은 아닙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권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권리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 그 권리를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행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물건이나 기술,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등과 관련된 일을 각 분야의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거나 신앙의 빛이 없는 사람에게 맡기면 초자연적 삶에 큰 장애가 됩니다. 교회에 적의를 나타내, 교회의 출입을 인정하지 않는 분야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연구자, 문학자, 과학자, 정치가, 노동자인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것들을 모두 성화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씀한 것 같이 전 우주는 하느님 자녀들의 해방을 기다리면서 노동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전 세계를 수도원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짓을 하면 대혼란에 빠집니다. 그렇다고 교회를 세상 어느 당파의 하나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거야말로 배신행위입니다.

독재적인 사고를 하면서 하느님이 인간의 자유로운 재량에 맡겨진 일들에 대해 사람들의 자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거룩함(聖性)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암자나 호젓한 산에 피신해 있을 필요가 있다고 누가 말했나요?” 그것은 가정을 가진 한 선량한 남자가 놀라움 속에서 자신에게 물은 말이었는데, 그리고는 그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거룩해질 사람들이 아니고 다만 암자나, 혹은 산일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께서 분명하게 우리들 하나하나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 주신 것을 잊어버린 듯합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거룩하신 것같이 거룩하여져라.”

저는 한 가지만 더 말해 두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성인(聖人)이 되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합당한 적절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조국을 사랑하십시오. 애국심은 그리스도교적인 덕이다. 그러나 애국심이 민족주의에 빠지면 다른 나라와 다른 나라 국민을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를 결여한 냉담한 눈, 경멸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이건 죄입니다.

애국심이란 범죄를 정당화하거나 다른 국민의 권리를 무시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여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다인, 할례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 타국인, 야만인, 노예, 자유인 따위의 구별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전부로서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십니다.”

이 말들은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유효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민족, 종족, 계급, 나라··· 등의 차이는 없습니다. 우리들 하나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고, 우리는 서로 간에 우애있게 처신해야 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 아주 분명하게 깨달은 것이지만, 이것은 언제라도 유효한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그리스도교 신앙과 도덕에서 벗어난 사회에서는 복음서의 영원한 진리를 새로운 방법으로 실행하고 전파해야 한다는 것. 하느님의 자녀들은 사회와 세계의 한복판에서 스스로 덕을 실행하고 그로 인해 어두운 곳에 빛나는 불빛처럼 세상의 어둠을 비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진리와 정신이 각 시대의 여러 가지 필요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영속되는 가톨릭교회가 보증하는 바입니다.

그리스도의 자취를 걷기 위해서라지만 오늘날의 사도(使徒)는 개혁을 지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물며 자신을 둘러싼 역사적 상황을 못 본 체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는 초대 그리스도인처럼 행동하고 주위에 생명을 불어 넣어주면 됩니다.

그대는 이 세상 한복판에 살고 그리고 그대는 자기네들이 좋다 또는 나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접촉하며 살고 있는 바로 다른 하나의 시민입니다. 그대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가 그리스도인으로 누리는 기쁨을 나누기를 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예언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한가지 법률을 즉각 받아들이는 방법을 이용하셨다는 것이 당신 머리에 떠오른 적이 있습니까?

그대가 다른 사람들과 우호적으로 살게 될 행동 방법을 사랑하고 존경하십시오. 의무에 대한 그대의 충직한 복종이, 다른 사람들이 성스러운 사랑의 열매인 그리스도인의 성실성을 발견하고 하느님을 찾아내는 방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도 마십시오.

모든 이스라엘 주민은 등록해야 한다고 명령한 칙령이 아우구스토 황제로부터 반포되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베들레헴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주님은 자신에 관한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해 법률에 경의를 표하고 법률을 꼼꼼하게 수행하는 기회를 사용하셨다는 것을 생각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올바른 사회생활에 필요한 규범을 사랑하고 존중하십시오.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면 그 태도를 본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실한 삶을 알게 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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