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

위선을 배양하는 사람은 반드시 불쾌하고 원한에 찬 희생의 삶을 살게 됩니다.

헤로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서 그 아기를 잘 찾아 보시오. 나도 가서 경배할 터이니 찾거든 알려 주시오.” 그러한 제안에 직면해서는, 겉으로 보기에 선의의 사람이라고도 보이는 사람들의 ‘보호’ 나 또는 ‘좋은 일들의 약속’을 피하게 해 주십사고 성령께 청합시다.

동방 박사들이 그랬듯이, 우리가 진실을 찾고 성실하게 말한다면 우리는 성령의 비추어 주심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대가 일들을 분명하게 말하기 때문예 항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아마도 그들은 불안한 양심을 가지고 살고 있고, 그래서 그들은 그런 양심을 그 방법으로 덮어 가리울 필요가 있는 것이겠지오.

그들이 변화하는 것을 돕기 위해, 그대는 계속 같은 방법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대가 계속 당신 이웃의 의도를 나쁜 믿음으로 해석하는 동안에는, 그대는 사람들이 당신과 함께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 개혁이 필요하다고 당신은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당신 자신을 개혁하십시오. 당신에게는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미 개혁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아무리 당신이 쇄신입니다, 개혁입니다 한들 믿을 일이 아닙니다.

너무나 위선적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정확히 그들 자신의 입술에서 나온 말을 되풀이할 때 분개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쩔 수 없을 만큼 참견으로 이웃 사람의 생활에 코를 박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당한 의지가 강한 사람을 만나 기선을 제압당하자 모욕을 당한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탄식해 보입니다.

당신의 그리고 많은 이들의 철면피한 태도와 비뚤어진 양심도 이쯤 되면 끝입니다.

단 한 수로, 그대는 참된 의견의 “올바른 의견을 말하는 성실한 사람이라고 하는 평판”과 "반대 의견이 가지는 비열한 이점”이라는 양쪽 모두를 한 손에 넣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식은 어느 나라 말로도 표리부동(表裏不同)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얼마나 선량합니까! 그들은 오직 찬양할 가치일 뿐인 일을 “변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자기는 박해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박해자의 묵은 전략입니다. 통속적인 지혜는 바로 이것을 통해서 모든 것을 죽 보아왔습니다. 옛 스페인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들이 돌을 던지고나서 자기 자신들을 붕대로 감는다.”

설마하면서도 유감스럽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타인을 중상해, 정의에 반하면서, 그 후에, 애덕입니다, 성실입니다라고 지껄여대며, 중상의 희생자에게 자신의 변호를 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이외의 가톨릭 신자를 나쁘게 다루면서 입으로는 에큐메니즘(교회일치운동)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에큐메니즘만큼 슬픈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이나 혹은 일들에 자신들의 일그러진 렌즈를 통해 초점을 맞추고서, 심술궂은 뻔뻔스러움으로 비판을 가하거나 또는 감히 자신들의 충고를 제공할 때 그들은 객관성에 대한 무척이나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확고한 결심을 하십시다: 우리가 바로잡아 주거나 또는 충고를 해 줄 때 하느님 앞에서 말하고, 그리고 우리가 한 말을 우리들 자신의 행동에 적용합시다.

언제라도 한탄할 것임에 틀림없으니까, 상대가 누구든 중상으로 공격하는 방법은 하지 말기 바랍니다. 하물며 교훈을 주기 위해서와 같은 동기를 구실로 삼는 것은 당치도 않습니다. 그런 동기를 내더라도 도덕적으로 나쁜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대에게 충고를 부탁하는 사람이 신앙 형성과 올바른 가르침에 대해 믿을 만한 다른 사람에게도 의견을 듣는 것을 알고 불쾌하거나 신뢰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편견이 없는 사람도 아니고 뜻이 바른 사람도 아닙니다.

그대는 진정으로 사람들의 선과 진리를 주장하는 것 이외에 다른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데 왜 모욕감을 느낍니까?

요셉에게까지도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신비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이 교훈은 우리가 경솔하게 이야기하는데 익숙해지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슬픔을 칭찬이나 동정을 구하는 일없이 올바르게 이끄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느님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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