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

자기애를 뿌리째 뽑아 버리고 그 자리에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심으십시오. 그것이 능률과 행복의 비결입니다.

비록 그대가 주님을 따라간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이런저런 방법으로 일들을 하는 것은 언제나 ‘그대의’ 계획들에 따라, ‘그대의’ 힘에만 의존하여 해나가는 당신임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5)”.

사람들은 그대가 그대의 “권리”라고 부르는 것을 무시했는데, 그대의 권리를 저는 그대의 “거만해질 권리”라고 그대에게 번역해 드립니다. 그대는 어찌 그리도 우스꽝스러운 형상을 만들어냈나요. 그대의 공격자가 강력하였기 때문에 그대는 자신을 방어할 수 없었고 그대는 백 번이나 따귀를 맞을 정도의 모욕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당신 자신을 낮추는 것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대의 양심이 그대를 거만하고 비겁하다고 부르면서 그대를 나무랍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십시오. 왜냐하면 그대는 그대의 ‘겸손해져야할 의무’를 흘끗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항상 나, 나, 나입니다. 그대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행동하도록, 주님, 주님, 주님일 때까지는 결코 그대의 능률은 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을 중심에 두고 겉돌고 있습니다. 그러고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성급하게 또 지나칠 정도로 직업상 높은 자리에 오르는데 마음을 빼앗긴다면 '사람들을 섬긴다'는 구실과는 달리 자기애를 감추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호기를, 어떤 유리한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말함으로써 우리 행동을 정당화하기를 추구할 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 시선을 돌리십시오; 주님은 “길”이십니다. 주님께서 감춰져 계셨던 여러 해 동안에, 주님의 공생활을 앞당기는 데 “대단히 유리한” 기회들이 역시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주님께서 열두 살 되셨을 때 율법 박사들이 주님의 질문들과 주님께서 하신 대답에 놀랐을 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셨고, 그리고 주님께서는 기다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복종하셨습니다.

온 세상을 하느님께 인도하려는 그대의 그 거룩한 야망을 잃지 마십시오. 그러나 유리한 시기나 상황을 이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오르면(그것들은 탈주하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일지도 모르니까) 다음과 같이 생각해 주었으면 합니다. 즉, 주님이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는 한, 당신이 해야할 일은 순종하는 것, 별로 볼품없는 그 눈에 띄지 않는 일에 종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 자신의 시간과 길을 갖고 계십니다.

돈,가문, 계급, 지위, 지성 등에 의해 얻은 특권을 악용해 어려운 사람들에게 창피를 주는 사람들은 모두 어리석고 교만하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악마가 조종하는 실에 놀아나고 허영심이 많고 몽롱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사람을 교만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런 사람은 아무리 위엄이 넘쳐도 조만간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오만함 때문에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자만심 때문인지, 단순한 허영심 때문인지, ‘암시장'에서 작위적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려는 사람이 다수 있습니다.

지위가 낮거나 높거나- 그것이 그대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스스로 말했듯이 그대는 완전한 이용가치를 가지고 쓸모있게 되고 봉사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대로 행동하십시오.

그대는 걷어올리고 비판합니다. 마치 당신 없이는 아무 것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 듯이 보입니다.

설사 제가 그대는 오만한 폭군같이 행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해도 화내지는 마십시오.

그대의 친구 하나가 충성스럽고 관대하게 그대에게 그대 자신의 행위를 손상시키는 일들에 관해서 지적해 줍니다. 그대는 그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그 사람이 그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확신합니다. 만약에 그대의 오만에서 생겨난 그 거짓된 확신이 남아 있다면, 그대는 결코 고쳐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대를 불쌍하게 여깁니다: 그대에게는 거룩함(聖|生)을 추구하기 위한 결심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악의에 찬, 의혹을 나타내는, 정도를 벗어난, 불신에 찬, 불평하는… 이것들은 비록 그대를 괴롭힐지는 몰라도 그대가 받아 마땅한 모든 형용사들입니다.

고치십시오. 왜 다른 사람들은 언제나 나쁘고 그리고 그대는 좋아야 합니까?

그대는 외로움을 느낍니다; 모든 것이 그대를 괴롭힙니다. 그리고 그대는 불평합니다. 그것은 그대의 이기심으로 그대의 형제들한테서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대가 하느님께 가까이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언제나 공개적으로 주목받으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대는 다른 사람들보다 그대가 더 주목받기를 원합니다.

왜 그대는 늘 사람들이 말하는 모든 것에 감춰진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무척이나 신경질적임으로 인해서 그대는 언제나 은총의 활동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확신하길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은총은 자기네들의 행위를 그리스도의 이상에 맞추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말을 통해 그대에게 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언제나 마치 그대에게 의지하듯이 살아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는 동안은, 그리고 그대가 봉사하려는(당신 자신을 감추고 시야에서 없어져 버리는) 결정을 늦추는 동안에는, 그대의 형제들과 동료들과 친구들과의 교제는 끊임없는 실망과 불쾌감, 즉 교만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과시하기를 싫어하십시오. 허영을 물리치십시오. 매일, 매순간, 교만과 싸우십시오.

교만하고 비열한 인간들은, 그들의 개인주의가 대단하게 만들어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못한 천을 헤아리는 어리석은 작은 일들로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그대는 어느 누구도 여지껏 스무 살이 되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까? 그대는 그들이 나이 어릴적에 그들의 부모에 의해 제약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합니까? 그대는 그들이 당신으로서는 막히는 문제들을, 아무리 크건 작건 다 극복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그대가 지금 겪고 있는 것들과 같은 일들을 겪었고, 그들은 은총의 도움으로 성숙했습니다. 그들은 관대한 인내력으로 자신들의 이기심을 짓밟았고, 그들이 그렇게 해야 할 때는 굽혀들었고, 그들이 그렇게 해서는 안될 때에는 우쭐하거나 누구인가를 해치거나 하는 일없이 —조용하고 겸손하게— 성실성을 유지했습니다.

그대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대단히 가톨릭적입니다. 기숙사 분위기도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미사는 정오가 아닌 데다 수업도 오전 중이라 술 한두 잔을 한 후에 저녁에 늦게 공부할 수 없는 게 아쉽다고 합니다. 그대의 그 “가톨릭”은 가짜, 단순히 부르주아적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대의 나이에 그같이 생각하면 안 되는걸 모릅니까? 나태함이나 자기숭배를 버리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에, 당신 주위의 현실에 스스로를 맞추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대는 그대의 가톨릭 신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성인상(聖人像) 하나를 어느 교회에 헌납했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성인은 실재로 모든 것을 저에게 신세졌습니다.”

이것은 풍자 만화일뿐이 아닙니다. 당신도 역시 생각하도록 하심시오 —적어도 그것이 그대의 행위에서는 어떻게 보이는지— 그대는 그저 몇 개의 메달들을 패용하거나 또는 모종의 경건한 관습을 다소간 기계적으로 실천하는 것만으로 하느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사람들이 내가 하는 좋은 일들만 볼 수 있다면!…’ 하지만 그대는 남들에게 잘 보이도록, 좋은 일들을 바구니 안에 든 하찮은 물건인양 들고 다니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합니까?

“그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되도록.” 이라고 하신 예수님 계명의 둘째 부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칭찬해야 할 나 자신에게.’ 어느 책의 첫 페이지에 헌사로서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수많은 불쌍한 사람들이 일생의 마지막 장에 같은 말을 쓰게 될 것입니다.

그대와 내가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생을 마감한다면 정말 슬픈 일입니다. 진지하게 양심성찰을 합시다.

교회일이나 사람들, 형제들에 관한 일 등에 대해 결코 자신만만한 태도를 취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만만한 태도가 사회 활동에서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사람들의 이익을 지켜야 할 때입니다. 그럴 경우 그것은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아니라 조용하고 겸손하게 실행하는 신앙과 강인함이 넘치는 태도가 될 것입니다.

면전에서 다른 사람들에 관한 좋은 일들을 말하고 그들의 좋은 자질을 찬양하는 것은 분별없고, 유치하고, 어리석습니다.

이 방법으로, 모든 것이 돌려져야할 하느님으로부터 영광을 “훔치는” 위험과 함께 허영심이 조장됩니다.

그대의 선의가 언제나 겸손과 함께하는가를 확인하십시오. 왜냐하면 선의는 가끔 거의 양보할 여력이 없는 가혹한 판단과, 모종의 개인적이거나, 국가적이거나, 또는 당파의 우월감과 함께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실패를 보고도 실망하지 말고 그것에 반발하십시오.

결실이 없는 것은 - 특히 통회하고 있다면 - 실패한 결과라기보다는 교만의 결과입니다.

쓰러졌다면 이전보다 더 큰 희망을 가지고 일어나십시오. 잘못을 해도 행실을 고치기만 하면 자기를 알고 겸손해지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오직 자기애에 사로잡혀 있을 때 뿐입니다.

“우리들은 쓸모없다”라는 것은, 비관적이고 거짓된 주장입니다. 만약에 첫째가고 기본되는 요건인 ‘하느님의 도움’을 가지고 원한다면, 여러 가지 사업들을 위한 좋은 도구로써 쓸모있게 될 수 있습니다.

한 거만한 사람을 보고 하느님이 하신 엄하지만 정확한 말씀을 들었을 때 저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는 악마와 똑같은 가죽 —교만을 덮어쓰고 있다”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내 마음에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덕을 몸에 지니고 싶다는 성실한 소망이 마음에 솟아났습니다. 겸손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시선을 주님의 모친이시며 우리들의 모친이신 분께로 끌어당겼습니다: 겸손이란 자신이 무(無)임을 자각하고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다른 언어로 된 이 챕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