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신앙으로 살아간다면 전대미문의 혁명이 일어날 것입니다.속죄의 효과가 올라갈지 어떨지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달려 있는 것입니다.이 점을 확실히 묵상하십시오.

당신에게 하느님이 내린 의무뿐임을 알면 그때야말로 책임감을 충분히 느낄 것입니다. 당신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일은 하느님이 도맡아 하십니다.

날마다 사람들을 생각하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헌신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어려운 순간에 그대를 도와 줄 생각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나의 성실성이 많아질수록 저는 그 점에서 다른 사람들의 성장에 더 잘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간에 지지받는 것을 느끼는 일은 얼마나 좋은지요.

‘공론가(空論家)’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큰 이상을 하루하루의 영웅적이고 열매 있는 현실로 바꿔야 합니다.

진정 우리들은 오래된 것들을 존중해야 하고 그것들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것들에서 배우고, 또 그 지나간 경험들을 명심하십시오. 그러나 과장하지는 말 것이니, 모든 것은 각각 그 자체의 시간과 장소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지금 허리가 꽉조이는 웃옷과 착달라붙는 바지 차림을 하거나 우리들의 머리에 분칠한 가발을 씁니까?

난처해하지 마십시오. 무책임한 행동은 좋은 정신의 결핍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많은 경우 형편없는 신앙형성이나 또는 지성의 결핍을 나타냅니다.

교사와 지도자는 자기네들의 의무를 책임있게 수행함으로써 그러한 틈들을 메우도록 기대해야 합니다.

만약에 그대가 그러한 위치에 있다면 그대는 당신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당신은 ‘스님’처럼 사는 것으로 만족하거나, 아니면 그런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위험이 많이 있습니다. 즉, 잘 정돈된 집에서 살며, 탈 없이, 행복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나자렛의 가족을 희화화하는 것입니다. 행복과 질서를 지니신 예수님은 그 보물을 모든 시대의 남녀에게 전해주기 위해 행차하신 것입니다.

인류가 예수를 알기를 갈망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을 구하고, 일이나 공부등의 동료의 한사람 한사람을 성화하는 책임을 완수하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당신에게 주신 주된 사명입니다.

그대는 다음의 일이 모두 그대에게 의존하고 있는 듯이 행동해야 하니 곧, 당신 일터에서의 분위기는 힘드는 일, 명랑성, 하느님의 현존 및 초자연적 외모 가운데 하나안가의 여부를 말입니다.

왜 그대는 그토록 무관심합니까? 만약에 그대가 약간 어려운 활동 중인 한 모임을 만난다면, 그대는 그들에 대해 흥미를 잃습니다. 아마도 그대가 그들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그들이 어렵게 되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패배를 인정하고 그들이 그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그대의 사도직의 이상을 끌어내리는 무거운 짐같이 생각합니다.

그대는 그대의 기도와 고된 수행(修行)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봉사할 것이겠지만, 그대가 그들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대가 그들에게 당신 말을 듣기를 기대하겠습니까?

그대는 그대가 그들에게 하나씩 차례로 말해 주기로 결정하는 날, 간직되어 있는 많은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다 만약에 그대가 바뀌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느날에 가서는 그대를 손가락질하고 이렇게 아주 옳게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일하는 분위기, 즉 근면함, 기쁨, 하느님의 현존함, 초자연적인 시각이 넘치는 분위기 조성이 오직 한 사람 당신만을 위해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행동하십시오.

전 당신의 냉담과 무관심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내버려 둬서 그랬을 수도 있는데, 좀 다루기 어려운 동료 그룹과 마주쳤을 때, 당신은 모른 척 하면서 위험을 피합니다. 그들을 사도직의 꿈을 방해하고 당신을 이해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입니다.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입니다. 기도와 희생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섬긴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그들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으니까.

한 사람, 또 한 사람, 또 한 사람을 일대일로 대할 결심을 했다면 그 결과를 보고 크게 놀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그들이 당신을 가리키며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해도 당연한 것 아닙니까.

거룩한 일들은, 그것들을 거룩한 방법으로 보고 매일 행한다면, 단순한 “일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하신 모든 일은 인간적이고, 그리고 성스럽습니다.

다른 사람처럼 평범한 신앙으로 단지 살기만 하는 생활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당신은 말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당신은 개인적인 신앙, 즉 책임감이 수반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께서는 그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대가 그것을 책임있게 활용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러한 자질이 주어졌으니, 다른 모든 것을 제외하고서라도 영혼들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대가 안이하고 느리고 게으른 태도를 취할 여지가 없습니다.

큰 문제를 안고 있는 당신에게 한 마디하겠습니다. 문제 제기의 방법이 맞다면, 즉 침착하고 초자연적인 책임 있는 시각을 보인다면 언제나 해결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엄마, 즉 좋은 엄마라면 아이를 안을 때 아이를 다치지 않도록 핀이나 바늘을 몸에 지니고 다니지 않도록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대할 때 가능한 한 부드러운 태도, 그리고 강력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초병이여, 밤이 얼마나 깊었는가?”

그대가 일주일에 한번씩 돌아보는 날을 갖는 습관을 들이게 되기를 바라거니와, 그 돌아보는 날 그대의 자기봉헌과 세세한 것들에 대해서 방심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게 하고, 좀 더 기도하고 또 당신 자신을 좀 더 희생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성교회는 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거대한 군대 같다는 것을 인식하심시오. 그리고 그대는 그 군대 내에서 공격과, 적과의 교전과, 반격이 있는 일선 한군데를 방어하고 있습니다. 내 말을 알아듣습니까?

하느님께로 더 가까워지려는 이 각오는 그대를 이끌어서 그대의 날들을, 차례차례로, 당직의 나날들로 전환케할 것입니다.

'잃어버린' 소명이나 끊임없는 은총의 부름을 무시하는 태도 뒤에 하느님의 허용적인 의지를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성실히 돌아보면 그것으로 면제되거나 참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겉을 보면 하느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찾으셨는데 응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조국을 사랑한다면 - 나는 그렇다고 확신하는데 - 임박한 위험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지원병으로 서슴없이 징병에 응모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썼듯이 위급할 때는 누구나 도움이 됩니다. 남자도, 여자도, 노인도, 장년도, 소년도. 단지 장애인과 어린이만 제외됩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 지원병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매일 총동원령이 내려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지명해서 부르셨습니다. 당신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것, 즉 당신의 마음, 의지, 지성, 전 존재를 하느님에게 모두 쏟아붓고 싸우도록 요구하고 계십니다.

제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들었으면 합니다. 깨끗한 생활, 그리고 특히 성모님의 보호가 있다면 육신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대는 부름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마음이나 의지 또는 지성이 병들어 있다고 변명할 정도로 겁이 많습니까? 보조적인 역할로 좋다고 할 것입니까?

주님은 앞장서는 도구로써 당신을 원하고 있고, 이미 그렇게 되었는데도 지금에 와서 등을 돌리는 일이 있으면 배신자가 되어, 실로 가엾은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만약에 시간이 단순히 황금이라면, 그대는 아마도 그것을 탕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은 생명이고, 그리고 그대는 그대가 얼마나 남겨 놓았는지를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한번의 나무라심도 없이, 사랑에 찬 모습으로 그의 마음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이 쓰러져 버리고 나면, 같은 눈으로 우리들을 보십니다. 우리들 역시 베드로가 했던 것같이, 주님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십니다”라고 말하고 우리들의 생활을 고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타인을 짓밟는 사람에 대해서도, 애덕이라는 이름 아래, 세밀함과 이해를 가지고 대한다, 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저는 하느님께 기도드립니다. 이 세세함과 이해가 악이 저질러지게 내버려두면서, 인간적인 존경을 위한 그리고 자기네들 자신의 편함을 찾기 위한 위장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그렇다면 이 세세함과 이해는 단순히 하느님께 죄를 범하는 공범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개심(改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타락이라는 대가를 치를 수는 없습니다.

양 속에서 늑대를 기르는 짓을 하면 어떤 운명이 양을 기다리고 있는지 금방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또 그리스도인의 정신에 있어서 용렬한 사람들은 그들이 권력이 있을 때 우둔한 자들로 둘러싸입니다. 그들은 이 방법으로 그들이 결코 지배력을 잃지 않을 그자들의 허영에 의해 거짓되게 권고를 받습니다.

그러나 민감한 사람들은 지식을 지닌 동시에 깨끗한 생활을 하는 학식있는 사람들로 둘러싸이고, 그들의 도움으로 정말로 지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들은 이 일에 있어서는 그들의 겸손에 의해 기만당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을 위대하게 만드는 데는 그들 자신이 위대해져야 하는 때문입니다.

시험해 보지 않은 사람을 단지 어떻게 되나를 보기 위해서 지휘하는 부서에 임명하는 일은 신중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권당첨에 대중의 이익을 거는 것과 같습니다.

그대에게 권력의 자리가 주어졌을 때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아주 바보스러운 짓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대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실 것에 대해서 근심해야 하며, 그리고는 반드시 그 다음으로 때로는 그 이상으로 그대는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는가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에 관해 고백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에 관해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입니다(마태오

10, 32‐33).”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당신이 일을 함에 있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해낸 개인적인 일은 남들과 공유하지 않는 한 그 개인과 함께 소멸됩니다.

통치(관리)를 훌륭하게 달성하기 위한 근본적인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책임을 분담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편하기 위해서나 책임회피를 위해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거듭 말하지만, 책임을 분담해 각각에게 맡긴 일의 보고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고, 필요하다면 사람들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가 문제들을 다루고 있을 때에는, 사랑을 잊을 정도로 정의를 과장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가장 약한 고리에 의해 쇠사슬의 세기가 결정됩니다.

당신 아래에 있는 사람 누구에게라도, 그 사람은 좋지 않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좋지 않은 것은 당신입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그 사람이 쓸모있을 만한 곳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명예들에 대한 야망을 물리치십시오. 그 대신 그대의 의무들에 관해서 그것들을 잘할 방법과, 그대가 그것들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도구들을 생각하십시오. 이렇게 해서 그대는 지위를 갈망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에 어떤 지위가 오면 그대는 영혼들에 대한 봉사를 위해 지니는 짐으로, 바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볼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한 시간에 동정 마리아께서는 주님 아드님 곁에 계시고, 같은 운명을 겪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움직이고 있는 환경이 쉽지 않을 때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하는 것에 대한 우리들의 두려움을 없애 버립시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들을 도와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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