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

우리 모두가 다 부유해지고, 현명해지고, 유명해지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 모두가다 —네, 우리 모두가 다— 성인(聖人)이 되도록 불리워져 있습니다.

하느님께 충실하려면 투쟁이 요구됩니다. 진정한 투쟁, 사람과 사람, 즉 옛 인간과 새 하느님의 사람이된 새 인간 사이의 투쟁, 작은 일 하나하나에서, 항복하는 일 없이, 곁눈질하지 않고 계속해야 합니다.

시련이 너무 가혹한 것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본의 아니게’ 언덕길을 올라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충고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모든 것은 선을 위하여”라고 반복하십시오. “나에게 생겨나는 모든 일”은 나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려운 일이지만 흔쾌히 그것을 받아들이십시오. 이것이야말로 무척 힘들게 여겨지지만, 조금도 틀리지 않는 정확한 결론입니다.

오늘날에는 남자도 여자도 착한 사람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착한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충분히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혁명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둘러싼 쾌락주의와 유물론, 이교적인 분위기에 대해 타협을 거부하는 사랑의 반역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거룩함(聖性). 거룩함에 도달하고 싶은 열의가 있다면 휴식도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이 헌신이나 올바른 행동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그것이 고통스럽지 않거나, 그것을 위해 싸울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였던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과는 관계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힘으로 쟁취하여 얻는, 순간순간 거룩한 싸움을 통해 회득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모든 이에게 해당한다는 것을 잊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얼마나 개혁에 열성을 보입니까?

맡겨진 것들을 성실하게 이행하기 위해 우리들 자신을, 한 사람 한 사람 스스로 개혁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대는 유혹에 빠져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고 눈과 상상을 희롱하며 바보같은 수다를 떱니다. 그런 뒤 의심과 소심, 당혹, 슬픔, 낙담에 사로잡혀 놀랍니다.

일관된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처음의 열성이 있은 후에 동요와 망설임,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공부, 가족, 경제적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대가 그 수준에 못 미치고 있다는, 아마도 그대는 쓸모가 없으리라는, 그대는 인생에 경험이 없다는 생각으로 걱정합니다.

제가 그대에게 그러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확실한 방법을 드리겠습니다.

악마의 유혹이거나 관용의 결핍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런 두려움을 극복할 확실한 방법을 알려주겠습니다. 그것은 ‘무시하기’, 그러한 생각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벌써 2천년도 전에 스승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점을 알려주셨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죄에 대한 진정한 혐오감을 가슴 속에 키워야 합니다. 주님, 이제 결단코 당신을 모욕하는 일이 없기를 제가 다시는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되기를 바라옵니다!

그대의 초라한 육체와 인간적인 정욕의 부담을 느껴도 놀라지 마십시오. 지금에서야 “이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다니, 어리석고 천진한 아이가 아닙니까? 그대의 비열함은 장애물이 아니라 더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한,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기 위한 자극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맑게 해주시는 것이니 말입니다.

만약에 당신 자신에 관한 생각들로 그대의 상상력이 넘쳐 흘러서 정상적으로는 그대의 도리에 어울리지 못할 환상적인 상황들과 환경들을 창출해 낸다면, 어리석게도 당신의 마음을 빗나가게 하고, 차갑게 해, 하느님의 현존으로부터 갈라놓을 것입니다. 이것이 허영입니다.

만약에 그대의 상상력이 남을 중심으로 돌아가면 그럴 사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남을 심판하는 결점에 빠져들 것입니다. 또한 남의 행동에 대해 객관적이지도 않고 비열한 해석을 내리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경솔한 판단입니다.

만약에 그대의 상상력이 당신 자신의 재능이나 말투, 혹은 다른 이가 그대에게 감탄하게 만드는 일에 집중된다면 강직한 의도를 잃고 자만심을 조장할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상상을 풀어헤치면 시간 낭비가 되고 상상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연이은 유혹에게 문을 열어 놓는 셈입니다.

단 하루도 내적 금욕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소명에 꿋꿋하게 대응하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유혹들을 이겨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단순한 바보가 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살고 싶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심장이 멈춰줬으면 하는 바람과 같지 않습니까?

유혹과 대화하지 마십시오. 거듭 말씀드립니다. 용기를 내어 도망치십시오. 그대가 어느 정도론 괜찮겠지 생각하고 약하게 대응하거나 장난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강해지십시오. 양보없이, 끊어 버리십시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나쁜 건 당신입니다. 그런 독서, 그런 친구, 즉 그 길로 가면 절벽에서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왜 그러한 것들이 그대의 발전에 도움이 되거나 인격을 원숙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겁니까.

비록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되고,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즐거움이 줄어들지라도 계획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십시오. 이제 책임 있는 사람에게 걸맞은 행동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고의의 작은 죄를 피하려 하지 않는 다수의 남녀의 무자각함이, 심하게 주님을 괴롭힙니다.누구나 이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보통입니다, 라고 생각하고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예수님을 형에 처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그 군중도 대부분 다른 무리들처럼 처음엔 고함을 지르며 모두 올리브 동산으로 달려갔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하는 일에 휘말려 돌이킬 수 없었던 것인지,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20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리는 아무것도 배우고 있지 않습니다.

떴다 가라앉았다 함. 당신은 올라가고 내려가는 기복이 너무 심합니다.

이유는 자명합니다. 그동안 그대는 편안한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내어주는 ‘바램’만 있는 상태와, 실제로 ’자신을 내어줌’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는 것 같습니다.

조만간 자신의 연약한 비참함을 깨달을 테니 몇 가지 유혹에 대해 미리 경고해 두고 싶습니다. 악마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내비칠 것입니다. 즉, 하느님은 당신을 잊으셨다, 당신이 사도직에 불려간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세상의 괴로움과 죄의 무게는 사도로서의 당신의 힘을 초월했다라고.

즉시 그것들을 거부하십시오.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대가 정말로 싸우고 있다면 그대는 양심의 성찰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매일의 양심성찰을 신경써서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대하는 방법의 서투름을 깨달았을 때, ‘사랑’ 때문에 아픔을 느끼는지 어떤지 알아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초석’을 놓는 시공식으로 달려가도 그렇게 시작한 일이 끝까지 완성될지 여부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죄인들은 이것이 ’최후’, 이것으로 ‘끝’, 이라고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속입니다.

무엇인가를 “끊어버릴”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마지막”이라는 표현은 과거의 시기, 즉, 이미 지나가버린 일을 말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라는 걸요.

그대에게 권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힘내서 당신의 ‘첫회심’때로 돌아가보십시오. 그것은 비록 아이들같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의 시작과 아주 흡사합니다.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는 그대는 완전한 신뢰감을 가지고, 성실하게 그리고 두려움 없이 당신 자신이 이끌려 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대는 머리와 마음에 있는 일을 숨기지 말고 분명하게 말해야 합니다.

그대가 그 방법을 쓰지 않고 어떻게 그 미지근함, 한심한 권태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대는 잘 싸우지 않습니다. 싸우기는 해도, 홧김에, 번거로움에 져서인지, 그대의 소소한 노력이 효과를 거두지 않기를 바라면서 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그대는 스스로에게 강하게 요구하지 않고,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요구받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대가 따르고 있는 것은 당신 자신의 뜻이지 하느님의 뜻은 아닙니다. 만약에 그대가 열심히 고치지 않는다면 그대는 행복해지지도 않고 지금 그대에게 결핍되어 있는 평화를 얻지도 못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당신 자신을 낮추고, 정말로 원해서 하도록 시도해 보십시오.

무슨 시간 낭비, 또 무슨 얄팍하고 인간적인 티가 나는 겁니까? 그게 효과를 내는 비결인 것처럼 모든 걸 전술로 돌려놓다니.

하느님의 ‘전술(戦術)’이란, 애덕(愛徳), 끝없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인 것을, 모두가 잊고 있습니다.

인간이 죄로 인해 하늘과 땅 사이에 벌어진 메울 수 없는 거리를 하느님은 사랑으로 메꾸어 주신 것입니다.

양심성찰을 할 때에는 야만적이라 할 만큼 정직해지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거울 속의 나를 보고 어디에 상처가 있는지, 제거해야 할 얼룩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가 결점인지를 찾는 것처럼.

‘악마’. 대문자로 쓸 만한 가치가 없으므로 소문자로 쓰지만, 그 악마의 교활함에 주의하라고 말해 두겠습니다. 악마는 보통의 상황을 이용하여 우리를 하느님의 길에서 조금만, 혹은 마음껏 벗어나게 하려고 합니다.

투쟁한다면, 진심으로 투쟁한다면, '흐름을 거슬러’ 걷지 않으면 안됩니다.’ 가끔, 피로에 사로잡혀 인간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위안이 없을 때가 있으니까, 놀라지 않도록 하십시오.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이 저에게 써 보낸 것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 편지는 순진하게도 은총은 본성을 없애 버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보존해 두었습니다. “신부님, 이제 이삼일이 되었습니다마는 엄청나게 나태해짐을 느껴 왔고 생활 계획을 실천하는 열성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 싫지만 억지로 하고 있습니다. 이 위기가 빨리 지나가길 빌어주십시오. 제가 길을 잃을까봐 몹시 괴롭습니다.”

사랑은 희생을 요구할 줄 몰랐나요? 스승 예수님의 말을 천천히 읽으십시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성경의 조금 더 앞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들처럼 버려 두지 않겠다···” 그대에겐 괴로운 일이지만 주님께서 그런 무미건조한 상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대가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도록 하시고, 그대가 십자가로 공동 구속자가되도록 하시고, 그대가 주님을 만나뵙게 되도록 하십니다.

당신에겐 괴로운 일이지만 당신이 당신을 그런 무미건조한 상태에 놓이게 한 겁니다.당신이 좀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만 신뢰를 두고, 십자가를 지고 구원의 협력자가 되어, 그대가 주님을 만나뵙게 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악마는 별로 현명하지 않은 것 같다"고 그대는 말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토록이나 바보스러워질 수 있는지 저는 이해가 안갑니다. 그는 언제나 같은 속임수, 같은 거짓말을 씁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더 어리석으니까, 언제까지나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지 않습니다. 악마는 그런 것을 모두 계산하고 유혹하는 겁니다.

어느 날 들은 바로는 큰 전쟁이 있을 때 항상 반복되는 기묘한 현상이 있다고 합니다. 병력과 장비의 우세 때문에 사전에 승리가 확실시된다 해도 막상 싸움이 벌어지면 약한 전선이 나타나 패전의 우려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럴 때는 위에서 단호한 명령이 내려와 약한 전선을 보강합니다.

당신과 저에 관하여 생각했습니다. 패배하지 않는 하느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언제나 승리자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성인이 되기 위한 싸움에서 힘이 없다고 느끼면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실행에 옮기십시오. 도움을 받는 겁니다. 하느님께 실패란 없으니까.

당신은 성실하고 정직하게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현존을 유지하며 지도자와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멋진 것은 핑계나 발뺌에 대해 스스로 적절한 답을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영적 지도를 사랑합시다.

그대가 바르게 행동함을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고 지식하게 말하도록 해 주십시오. 그대는 일을 그토록이나 느긋하게 하고 있어서, 온전하게 행복하지 않은 것은 고사하고, 영적 정결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시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묻는 것입니다. 그대는 정말로 바르게 행동합니까? 그대가 바르다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대가 바르게 행동함을 인정하겠습니다··· 그런데 확실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대는 일을 그토록이나 느긋하게 하고 있어서, 온전하게 행복하지 않은 것은 고사하고, 영적 정결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시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묻는 것입니다. 그대는 정말로 바르게 행동합니까? 그대가 바르다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에 그대가 빈들거리고, 유혹에 직면하였을 때 내부로는 경박하고 외부로는 주저한다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그대가 내적인 생활을 진전시키기는 불가능합니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은혜에 저항하는 것을 ‘내일’이라든가 ‘나중에’라고 부릅니다.

영적인 길의 또 다른 역설. 몇 가지만 조금 개선이 필요한 사람은 열심히 고치려고 노력하며 이룰 때까지 손을 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그대는 행동의 근원을 밝혀내지 않기 때문에, 때때로 ‘문제’를 만들어 내고 맙니다.

단 하나 당신에게 필요한 것, 그것은 단연코 전투의 대상을 바꾸는 일입니다. 즉, 충실히의무를 다하고 영적지도에서 주어진 지시를성실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성인(聖人)이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과거보다 더 강하고 절박하게 느꼈습니다. 안락함을 좋아하는 어떠한 징조라면 무엇이든 용감하게 버려야 한다고 확신하고 서슴없이 매일의 투쟁에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뒤늦게 기도 중에 주님께 말씀드리는 동안, 그대는 투쟁이 사랑의 동의어임을 이해하였습니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 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앞으로 다가올 전투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더 큰 사랑을 요구하였습니다.

헷갈려요? …솔직히 성실해집시다. 그리고 하느님 혹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보다 이기주의의 노예가 되고 싶다고 말합시다. 그렇다고 인정합시다.

유혹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은 복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시험을 받은 후에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이 내적인 운동이 끝없는 평안의 근원임을 인식하면 마음이 기쁨으로 채워지지 않겠습니까.

“지금, 시작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외침입니다. 매순간 충성을 다할 때나 관용이 결여되어 왔거나 간에, 하느님을 온전한 충성으로 섬길 - 사랑하려는! - 소망을 새롭게 하는 사람의 외침입니다.

그대가 찾고있는 것은, 개심(改心)이 아니라, 자신의 결점을 소중히 간직해 두는 상자입니다. 그리하여 비록 씁쓸한 뒷맛이 남기는 하나 그 슬픈 짐을 질질 끌면서도 안락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 당신의 마음은 아팠습니다.

자신을 붙잡고 있는 것이 신체적 쇠약인지, 정신적 피로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당신은 알 수 없습니다. 싸우고는 있지만, 진정한 싸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기쁨과 사랑을 사람들에게 ‘옮기기’ 위해, 진심으로 좋아지려는 열의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명백한 말씀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에 구애됨 없이, 즉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서 싸우는 사람만이 승리의 관을 얻습니다.

더 나은 일을 하고, 더 결연한 태도를 취하고, 더 열의를 나타낼 수 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당신은 자문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건 당신이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수많은 마음의 문 중에서 가장 방비가 약한 것이 사람의 어리석음, 즉 허영심이라는 것을 충분 이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 근처를, 전력을 다해 공격하고 있습니다. 감상적인 추억에 잠겨 있을 때나 히스테릭한 시각으로 의붓자식 취급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 버릴 때, 자유가 없다고 함부로 생각해 버릴 때 등을 노리고 덮쳐 오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허세를 부리면서도 자신없다는 듯이 내게 말했습니다.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내리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리는 사람도 있다고 말입니다.

당신의 무감각을 보고 슬퍼져서 저는 말했습니다. 올라가는 사람은 게으름뱅이를 끌고 가지만 보통은 내리는 사람이 더 강하게 끌어당기는 법이라고. 애처로운 사도를 스스로 찾고 있다는 걸 모릅니까? 이미 히포의 성스러운 주교(역주: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전진하지 않는 자는 후퇴한다고.

당신에게는 잘 맞물리지 않는 두 부분, 즉 이성과 감정이 있습니다.

신앙의 지성은 길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영웅적으로 걸어가거나 어리석은 행보를 하거나 둘 사이의 큰 차이도 가르쳐줍니다.

특히 삼위일체의 하느님이 우리 손에 맡기신 사업의 신적인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그것과는 달리, 감정은 당신이 경멸하는 모든 것, 지금 경멸하는 것에조차 집착합니다. 무수한 작은 일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몸이 피곤해서인지 초자연적인 시각을 잃어서인지 당신의 의지가 약해졌다고 보자마자 그 작은 일들이 몰려와 당신의 상상을 끄집어내고, 끝내는 산이 되어 당신을 괴롭히고, 낙담하게 합니다. 일의 괴로움, 불순종, 수단의 부족, 꿈에서 보는 편안한 생활, 크고 작은 여러가지 꺼려야 할 유혹, 훌쩍거리는 감정의 욱신거림, 피로, 영적인 미지근함이 가져오는 괴로움 등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두려움, 즉 성인(聖人)이 되라고 하느님이 원하시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 데서 오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엄한 말투지만 용서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에게는 되돌아갈 ‘동기’가 털어 버릴 만큼 있지만, 하느님이 주시는 은혜에 보답하는 대담함이 부족합니다. 또 다른 그리스도, ‘그리스도 자신’이 되도록 부르셨는데 말입니다. 당신은 사도 성 바오로에 대한 예수님의 훈계를 잊은듯 보입니다.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이것은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당신이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훔치거나 죽이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착한 사람으로 믿고, 스스로 만족하며, 안심하고 낭비해 버린 시간을 되찾길 바랍니다.

아직 갈 길이 멀으니 믿음과 일의 걸음을 빨리 합시다. 성가신 사람들을 포함해 모두와 사이좋게 생활하며, 이전에 당신이 멸시했던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시 - 섬기도록 - 노력을 하십시오.

고해성사를 할때 과거의-곪아터진-끔찍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사제는 성실한 의사인 것처럼, 명의처럼 당신의 영혼을 치료했습니다.필요한 부분은 절제하고 완전히 소독이 끝날 때까지 상처를 닫지 않았습니다. 감사하십시오.

진지한 자세로 임해야 할 일도 스포츠맨 정신으로 시작하면 아주 좋은 결과가 나옵니다. 몇 국면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참고 견디면 결국에는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을 고치십시오, 아직 젊다고 느끼고 있는 지금에. 마음이 나이를 먹고 나서 고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니까.

‘복된 탓이여!’라고 교회는 부릅니다.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도움이 되었다면, 또 그대보다 못한 이웃을 더 잘 이해하고 돕기 위해 도움이 되었다면, 다시금 그대 귀에 속삭입니다. “다행이려나, 그대의 죄는.”

유혹을 거절한 뒤에 당신은 물었습니다. 주여, 제가… 그렇게 나쁜 인간일 수가 있을까요?

당신의 진료 ‘진료기록카드’를 요약하면, 여기에서 쓰러져 그곳에서 일어섰다, 라고 합니다. 이 두 번째가 중요한 겁니다. 비록 거북이 같은 걸음일지라도 당신은 내적인 싸움을 계속하십시오. 자, 전진입니다.

나의 자녀여, 싸우지 않으면 어디까지 떨어질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심연(深淵)은 또 다른 하나로 그리고 또 다른 하나로 이끌어 갑니다.

그대는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낡은 더러움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본능과 나쁜 쏠림은 매사에 민감하게 느껴져 마음에 불안의 구름이 드리워집니다. 게다가 원하지도 않고 예상치 못할 때, 피곤하고 의지가 휘청거릴 때에만 유혹이 엄습합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면 견딜 수 없지만 내가 겸손한지는 모른다고 당신은 말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때문에 주님의 사랑 때문에 아픔을 느낀다면 그 사랑에서 우러난 통회 덕분에 경계심을 늦추지는 않을 겁니다.

싸움은 여생 동안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얼마 전에 행했던 자기 봉헌을 다시 한번 확인하려는 욕망으로 그대는 지쳤습니다. 그대는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자녀에 걸맞은 삶을 살겠다고 강력히 바라고 있습니다.

당신의 수많은 비참함과 불충실을 하느님의 손에 맡기십시오. 그것이 짐을 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쇄신이란 완화되는 게 아닙니다.

피정은 하느님을 알고, 자신을 알고, 진보를 위한 잠심(潜心)의 시기입니다. 어느 점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고쳐야 하는지, 즉 무엇을 하고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발견하기 위해 필요한 날들입니다.

지난해와 같은 일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도록, “피정은 어땠습니까”라고 그대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대는 “잘 쉬다 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침묵과 은혜가 넘치는 날들, 일대일로 하느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날들입니다.

그들을 보고 감사의 기도가 뿜어져 나왔습니다.하느님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면 나이와 경험으로 볼 때 중후한 사람들이 아직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살 수 있고, 또 길을 잃은 과거나 게으름을 지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열중하여 어린아이처럼 마음을 열고 화답한 것입니다.

저는 그 장면을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투쟁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당신에게 간청했습니다.

‘신자들의 도움’ 로레토의 복되신 동정마리아 호칭기도에서는 이렇게 자신있게 말합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 화살기도를 되풀이해본 적이 있습니까? 어린아이 같은 사랑과 믿음으로 외친다면 승리로 이끄는 성모님께서 전구해 주시는 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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