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 목록

«하느님의 친구들»에는 허영를 주제로 하는 3 항이 있음.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여러 해 동안 경험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알퐁스 도데의 「타라스콩의 타르타랭」에 나오는 것처럼 헛되고 유치한 꿈을 계속 꿉니다. 자기 집의 복도에서 실제로는 쥐들밖에 만나지 못하는데도 사자 사냥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저는 여러분이 평범한 일상의 의무들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하느님과 동행하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지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벌이는 일상의 투쟁들은 우리 주님께 충만한 기쁨을 드립니다. 오직 우리 주님과 우리 각자만이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만히 휴식을 취하면 휘황찬란한 기회들에 현혹되는 일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실제로 그런 기회들은 거의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여러분을 둘러싼 사소하고 평범한 일들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을 보여 드릴 기회는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로니모 성인께서 말씀하셨듯이, “사소한 일들에서도 영혼의 위대함이 똑같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창조주께서 하늘과 땅, 태양과 바다, 코끼리, 낙타, 말, 황소, 표범, 곰, 사자를 만드신 데 대해서도 흠숭을 드리지만, 또한 개미, 모기, 파리, 벌레 같은 작은 피조물, 모양은 알지만 이름조차 모르는 것들을 지으신 데 대해서도 같은 흠숭을 드립니다. 크건 작건 모든 피조물에 배인 창조주의 솜씨를 찬미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 봉헌된 사람은 거창한 일뿐 아니라 사소한 일에도 똑같이 열심입니다.”

자연스러움과 단순성은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놀라운 인간적 덕목들입니다. 다른 한편, 이들은 서로 얽혀 있고 복잡합니다. 문제를 왜곡하여 다른 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때로는 우리 주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장애물을 만듭니다. 바리사이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질책을 기억합시다. 바리사이들은 스스로 미로 속으로 들어가 헤맵니다. 그들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으로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합니다. 그들은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입니다(마태 23,23-24 참조).

아닙니다. 자기 잘못 없이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의 고귀한 삶이건 그리스도인의 삶이건 특이하거나 기묘한 삶이 아닙니다. 오늘 성찰한 인간적 덕목들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동일한 결론으로 이끕니다. 참된 인간은 진실하고 충실하며 성실하고 용기 있으며 온화하고 관대하며 침착하고 정의로우며 열심히 일하려고 노력합니다. 온전히 그렇게 살기는 힘들지만, 그것이 특이한 삶은 아닙니다. 만일 그러한 삶을 깜짝 놀랄 만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 눈이 침침하고 마음은 소심하며 결단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교만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혹시 독재자나 지배자의 행동을 상상할지 모르겠습니다. 전쟁 영웅을 영접하는 군중의 환호성 가운데, 개선문의 하얀 대리석에 자신의 영광스러운 이마가 닿지 않도록 머리를 숙이는 로마 황제를 연상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살펴봅시다. 이러한 유형의 교만은 오직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서만 발견됩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교묘하고 더 빈번한 교만의 다른 형태와 싸워야 합니다. 내 것이 남의 것보다 더 낫다고 여기는 교만, 허영에 가득 찬 말과 생각과 행동, 아무런 모욕 의사가 없는 말과 행위에 대하여 분노하는 거의 병적인 과민 반응 등이 그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유혹입니다. 모든 것이 태양인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돌아가야 한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 교만한 사람은 이 어리석은 착각을 충족시키려고 거짓으로 아픈 척, 슬픈 척하여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어들이고 야단법석을 치르게 합니다.

많은 사람의 경우에 자신의 내적 생활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대부분은 자기가 상상한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인정을 받고 있는지’ 등입니다. 그 불쌍한 영혼은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이 가엾은 상황에서 그에게는 모든 것이 쓰라린 아픔이고, 자신도 다른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겸손해지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놓는 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