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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친구들»에는 의지를 주제로 하는 3 항이 있음.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거룩한 어머니 교회는 언제나 소리 높여 자유를 옹호하였고 언제나 숙명론을 거부하였습니다. 교회는 각 영혼이 좋든 나쁘든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선을 행한 자는 천국에 이를 것이요, 악을 행한 자는 영원한 불로 가리로다”(아타나시오 신경). 저는 언제나 여러분과 저,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이 놀라운 능력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능력은 참으로 우리 신분의 고귀함을 드러내 줍니다. “죄라는 것이 고의적 악이기 때문에, 고의적이지 않은 것은 결코 죄가 되지 않습니다. 이 점은 너무 자명한 일이라서 소수의 식자든 다수의 대중이든 의견을 달리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 주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벅차오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 우리가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오로지 선을 향하도록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이 자유로이 당신을 섬기는 편이 더 좋다고 판단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얼마나 위대합니까! 당신 자녀들에게 넉넉하게 베푸시는 너그러우심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제 혀와 제 심장이 천 개, 아니 그 이상이기를 바랍니다. 그것들로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과 성령께 끊임없이 찬미를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당신 섭리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분께서는 종들의 억지 봉사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자녀들이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비록 우리가 첫 조상의 타락 때문에 죄로 기우는 경향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하여도, 그분은 우리 각자의 영혼 안에 당신의 무한한 지성의 불꽃과, 선을 향한 끌림과, 영원한 평화를 향한 열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 마음 안에 영원한 생명의 씨앗이 자라도록 힘쓴다면, 우리가 진리와 행복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절제는 자기 통제입니다. 우리 몸과 영혼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에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져서는 안 됩니다. 할 수 있다고 해서 무엇이든지 허용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른바 자연적 충동에 따라 행동하면 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의 끝은 비참함 속의 소외이고 슬픔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먹는 것, 보는 것, 소유하는 것에 관해서라면 그 무엇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깨끗한 삶을 영위하도록 충고를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새 삶을 열어가는 능력, 참으로 위대하고 고상한 능력, 하느님의 창조에 참여하는 능력은 고작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달성하는 도구로 악용할 뿐입니다.

그러나 제가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절제의 풍성한 열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까치가 모아오는 자질구레한 장신구들처럼 쓸모없는 싸구려 보석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노예가 아니라 참된 사람을 보고 싶습니다. 그 같은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위험에 빠지게 할 수도 있는 값싼 것들 없이 사는 법을 알고 있으며, 또한 자신의 희생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깨달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꺼이 희생하는 삶 덕분에 온갖 속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을 마음 깊은 데서 음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절제 때문에 흐릿해졌던 인생의 색깔들이 산뜻하게 되살아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배려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대의를 위하여 헌신합니다. 절제는 영혼을 진지하고 겸손하고 이해심 깊게 만듭니다. 그것은 또한 모든 이가 부러워하는 지성적인 자기 통제의 표지인 신중함을 길러 줍니다. 절제는 편협함이 아니라, 영혼의 위대함입니다. 자기 통제를 하지 못하는 무절제한 마음 안에 오히려 훨씬 더 큰 박탈감이 존재합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한심하게 딸랑거리는 방울을 들고 먼저 나타난 우상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지성의 선한 습관에 세 가지 양상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조언을 구하는 것, 바르게 판단하는 것, 그리고 결정하는 것이 그 세 가지입니다. 슬기로워지는 첫 단계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의 덕입니다. 이 겸덕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이 모든 일을 해낼 수는 없다는 점과, 공정한 판단을 위하여 유념해야 하는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언을 구합니다. 그러나 아무에게서나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올바른 품성을 지닌 사람, 우리처럼 하느님을 충실히 사랑하기를 바라고 그분을 따르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가야 합니다. 단순히 그의 의견을 묻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우리에게 건전하고 사심 없는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가야 합니다.

다음 단계는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보통 슬기는 신속하고 적절한 결정을 내리도록 요구합니다. 때로는 우리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요인이 밝혀질 때까지 결정을 미루는 것도 현명하겠지만, 지금 곧바로 해야 하는 일을 연기하는 것도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선익이 위협을 받고 있을 때에는 특히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