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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하느님의 친구들»에 인간적인 결함 → 이해 항이 있음.

하느님 앞에서 용기 있게 자신을 성찰한다면, 저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날마다 자신의 결점을 많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것들을 없애려고 힘쓴다면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며, 비록 뿌리까지 완전히 없애지는 못할지라도 그것들을 이겨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러한 나약함을 넘어서, 만일 여러분이 참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상응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중대한 단점들을 치유하는 것을 도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들처럼 나약하고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아무리 그것이 끔찍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고 더 너그럽게 대할 것이며, 동시에 더욱 간절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이 마음으로부터 하느님을 사랑하겠다고 결심하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그리스도인은 위선자들이 주님께 미끼처럼 던진 말처럼 스승님의 본보기를 성실하게 따름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스승님께서는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마태 22,16). 다시 말하자면, 비록 하느님의 뜻에 따라 (때로는 그것이 단지 인간적 이유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돌보는 일은 있을지라도 어떠한 차별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영혼에 관심이 있습니다!)

사랑의 첫 표현들 가운데 하나는, 영혼을 겸손의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가장 작고 연약한 피조물조차도 우리보다 나을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잘못과 혐오스러운 일들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무수히 범하는 불충실함에서 벗어나려고 치열하게 투쟁하고는 있지만, 우리는 역시 죄인임을 압니다. 그러니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나쁘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또는 어떻게 우리 마음 안에 광신적인 열광, 편협함, 오만함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겸손은 우리의 손을 잡고 최선의 방법으로 이웃을 대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이해심을 갖도록 하고,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살게 하며,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결코 분열을 초래하거나 장벽을 만들지 않으며, 언제나 일치를 증진시키는 도구로서 행동하게 합니다. 인류의 평화와 일치, 개인 권리들의 상호 존중을 향한 우리의 심오하고 강력한 열망은 허망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형제애로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 열망은 우리 인간 본성에 가장 깊숙이 새겨진 어떤 것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우리의 형제애는 상투적인 말이나 허황된 꿈이 아니며, 비록 어렵지만 우리가 참으로 도달해야 하는 목표입니다.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사람들, 사랑에 실망하거나 겁에 질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그러한 종류의 애정이 참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창조되었고 하느님을 거슬러 무익하고 거친 저항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참된 애정을 지니기가 무척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애정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애정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함께 필연적으로 빚어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것을 바란다면, 예수님도 그것을 바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일상생활의 고통, 희생 그리고 이타적 헌신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확신하건대,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 덕목인 이 사랑은 때때로 익살스럽게 풍자되어 온 내용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그토록 끊임없이 선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사랑은 단지 선포해야 하는 주제일 뿐이고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일까요?

우리가 주위를 둘러본다면, 사랑은 단지 환상 속의 덕목일 뿐이라고 생각할 만한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자연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메마름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이란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지속적이고 강렬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영혼들 안에서 사랑이라는 첫 열매를 맺으시는 성령의 활동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수하게 될 것입니다.”(갈라 6,2)라는 성 바오로 사도의 충고 말씀에 대하여, 교회 교부들 가운데 한 분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선행이 미흡하여 아직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나약함을 쉽게 견딜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사랑 안에서 자라게 하여 준 그 길이 가리키는 방향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저만치 밀쳐놓고 인도적 활동이나 사회사업에 먼저 투신한다면,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 이웃의 환자를 돌보느라 그리스도를 외면하지 맙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환자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예수님께 여러분의 시선을 맞추십시오. 그분은 변함없이 하느님이시지만 우리를 섬기시고자 자신을 낮추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필리 2,6-7 참조). 오직 그분께서 가리키시는 길을 따라감으로써만 우리는 값어치 있는 이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받는 이와의 동일시, 결합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그분의 헌신적인 삶, 한없는 사랑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희생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궁극적 선택의 자리에 세우십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격리된 삶을 사는 것과, 다른 이들을 섬기는 데에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