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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하느님의 친구들»에 하느님의 자녀됨 → 하느님의 자녀의 자유 항이 있음.

우리는 예수님의 자유를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분의 자유는 그분의 사랑만큼 무한하고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한한 가치를 지닌 그분의 숭고한 희생은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도록 합니다. “어째서 주님은 저희에게 당신을 따를 수도 있고 당신을 해칠 수도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까?” 자유는 선을 향할 때에만 올바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들 중의 사랑이신 분을 잊고 배반할 때에는 자유를 남용하는 것입니다. 제가 온 힘을 다해 옹호하고 있고, 앞으로도 언제나 옹호할 개인의 자유 덕분에 저는, 비록 제 나약함을 절감하면서도, 깊은 확신 속에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주님, 제가 자유로이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몸소 우리에게 그 답을 주십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이 얼마나 위대한 진리입니까! 이로써 자유에 길이 열리고, 자유에 의미가 부여됩니다. 하느님과 피조물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깨달으며 기쁨과 확신 속에서 제 이야기를 요약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손에서 나왔고, 거룩하신 성삼위께서 극진한 사랑으로 우리를 굽어보신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이처럼 놀라우신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께 간청합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날마다 거듭거듭 생각하게 해 주십시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진정한 자유인으로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신에 관한 가장 심오한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그는 행동할 때에, 모든 것 위에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자기 지배와 자제가 결핍되어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마음을 다하여 항구하고 자발적인 결심을 하고 자유로이 투신하여야 한다는 것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러나 자유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자유는 길을 안내하는 북극성을 필요로 합니다. “영혼은 안내자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혼은, 억압적 지배자인 악마가 아니라 ‘멍에가 편하고 짐이 가벼우신’(마태 11,30 참조) 그리스도를 임금으로 모시려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자유! 자유!” 하고 한심하게 외치며 자신을 달래는 사람들의 기만을 물리치십시오. 그들이 외치는 자유는 애처로운 종살이를 위장하는 가면일 뿐입니다. 그릇된 것을 선호하는 선택들이 어떻게 참된 자유를 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홀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시다(갈라 4,31 참조). 그분 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요한 14,6 참조).

여기 계신 하느님 앞에서 다시 한 번 자문해 봅시다. “주님, 어째서 우리에게 이러한 힘을 주셨습니까? 어째서 우리에게 당신을 선택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는 권한을 부여하셨습니까? 주님께서는 저희가 이 힘을 좋은 곳에 사용하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십니까?”(사도 9,6 참조) 그분의 대답은 간단명료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자유는 진리에 봉사할 때에만, 또 온갖 유형의 노예 상태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추구할 때에만 진정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스도교의 무궁무진한 보화, 곧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로마 8,21)를 사방에 선포하고픈 저의 열망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갑니다. 이것이 ‘선의’의 본질적 의미이며, 이 ‘선의’로써 우리는 “악에서 구별해 낸 선을 추구”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근본적인 점에 관하여 묵상해 보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양심상 지녀야 하는 책임을 통감하게 합니다. 우리를 위한 선택은 우리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고귀한 면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의해서 선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은 부모님에게서 가톨릭 신앙을 물려받았고, 하느님의 은총 덕분에 세례로 새로 태어난 그 순간부터 초자연적 생명이 우리 영혼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생 내내 날마다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한 분이시며 유일하신 하느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순명에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태도 그대로 악마의 유혹들을 거부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어느 쪽으로든 우리는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어느 쪽이든 섬겨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의 종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친구요 자녀가 됩니다. 이로써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열과 성을 다해서 세상일들을 정직하게 수행하지만, 거기에는 마음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환난 중에도 행복하고 침착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나가는 것에 믿음을 두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에 믿음을 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갈라 4,31).

우리의 자유는 어디에서 올까요? 그것은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옵니다. 그분은 이 자유로써 우리의 몸값을 치르셨습니다(갈라 4,31 참조).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6).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선물의 참된 의미를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야말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입니다.

저는 자유의 모험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여러분과 저의 삶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마련해 놓으신 길을 종이 아니라 자녀로서 자유롭게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선물로 받은 행동의 자유를 기쁘게 활용해야 합니다.

저는 제가 하느님을 선택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선택합니다. 저의 선택은 어떠한 강박도 없이 자유롭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저의 온 생애를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수단으로 봉헌할 것을 약속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나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힘껏 외치도록 저를 움직이는 것은 바로 이 자유입니다(로마 8,39 참조).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사랑이 아닌 그 어떤 것에도 속박을 거부합니다. 종교는, 동물처럼 살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반항입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느님을 알 때까지는, 또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까지는 만족스럽지 않고 마음이 불안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자유롭게 해방된 반항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대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노예와 하느님의 자녀, 이것이 우리가 직면하는 딜레마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와 교만의 노예, 관능의 노예, 이기심의 노예 가운데 우리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잘못된 선택으로 수많은 영혼이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진리와 정의와 선의 길을 닦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저의 자유를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를 묶고 있던 수많은 사슬이 풀리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동안 우리는 무의미하고 터무니없는 일들, 사소한 욕망들에 신경을 쓰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값진 보물이요, ‘돼지들 앞에 던져서는 안 되는 진주’(마태 7,6 참조)인 자유를 우리는 전적으로 선행을 배우는 데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이사 1,17 참조).

이것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의 방탕한 행동들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위축되거나 협박 또는 시기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한지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법을 온전히 이행하려고 열심히 노력한다면, 놀라운 용맹심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인간 존엄성의 충만한 의미를 발견하려고 다른 곳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짐스러운 것이거나 어떤 한계가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참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무지를 드러낼 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위한 결정을 내릴 때에, 우리는 아무것도 잃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을 얻습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우리는 최고의 카드를 뽑았습니다. 만일 그것이 의심스럽다면, 우리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봅시다. 우리의 신앙이 보잘것없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거의 없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이 빈곤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간청해야 합니다. 그분의 어머니요 우리 어머니이신 분을 통해서 간청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이 자라나도록, 우리가 주님의 현존이 얼마나 달콤한지 맛볼 수 있도록 간청해야 합니다. 오직 사랑할 때에만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유를 얻은 사람은 영원히 언제까지나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