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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하느님의 친구들»에 평화 → 초자연적 삶에 항이 있음.

여러 해 전의 이야기지만 오늘날에도 참으로 적절한 한 말씀으로써 이 대화를 계속하고자 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지나가는 모든 것, 하느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영혼이 목표에서 벗어나, 성인이 되도록 하느님께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온갖 평온과 평화를 잃게 되는 이유를 이제 이해하시겠습니까? 휴식 또는 여가 시간에도 초자연적 전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휴식과 여가가 일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직업에서 최고 위치까지 오를 수 있습니다. 또 세상사에서 자유로운 선택과 노력의 보상으로서 최고의 칭송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모든 인간적 활동에 생기를 주는 초자연적 전망을 잃는다면, 안타깝게도 그릇된 길로 빠질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주제로 되돌아옵니다.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비록 여러분이 사회에서, 공적 업무에서, 자신의 직업에서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만일 영적 생활을 소홀히 하고 우리 주님을 무시하면, 결국 완전한 실패로 끝나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관한 한, 그리고 참으로 중요한 최종 분석에서, 승리는 오직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올 것입니다. 어정쩡한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인간적 관점에서는 마땅히 아주 행복해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불안과 고통을 겪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행복에 가득 차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자기 영혼을 할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쓸개즙보다 더 쓴 맛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날마다 하느님의 뜻대로 행동하고, 그분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며, 그분의 왕국을 온 인류에게로 확장해 가려고 참으로 노력한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 부르짖을 때가 왔습니다. 주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당신께서 그것에 희망을 두게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저를 당신 말씀으로 위로하시고 제 생명에 힘을 불어넣어 주소서(시편 119,49-50 참조).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면에서 당신께 의존하기를 바라십니다. 주님 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은 참으로 명약관화합니다(요한 15,5 참조). 반면에, 그분과 함께라면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참조).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걷겠다고 굳게 결심해야 합니다(시편 119,168 참조).

무기력해 보이는 우리 지성에 빛을 비추시는 하느님 덕분에, 우리는 창조주께서 당신의 원수들까지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돌보시는데 당신의 친구들은 얼마나 더 세심하게 돌보실 것인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악이나 어려움도 결국 우리의 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결코 우리에게 들이닥칠 수 없음을 우리는 확신하게 됩니다. 이렇게 기쁨과 평화가 우리 영 안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고, 어떤 인간적 동기로도 이 기쁨과 평화는 우리에게서 떠나가지 않습니다. 이러한 ‘방문’은 언제나 우리에게 그분의 어떤 것, 거룩한 어떤 것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헤아릴 수 없는 위업을 이루신 주 하느님을 찬미하고(욥 5,9 참조), 그분께서 우리에게 한량없는 보물을 얻게 해 주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지혜 7,14 참조).

우리는 시냇물을 그리워하는 암사슴처럼 달려 왔습니다(시편 42,2). 우리는 갈증에 시달리고, 입술은 바싹 말라 건조해졌습니다. 우리는 생명수의 원천에서 물을 마시고 싶습니다. 우리는 온종일 보잘것없는 일에 매달리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물이 풍성하게 솟는 맑은 샘을 향하여 움직입니다(요한 4,14 참조). 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혀가 제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성이 조용히 자랍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만 봅니다! 그러면 영혼이 한 번 더 새로운 노래를 시작합니다. 온종일 하느님께서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신다는 것을 느끼고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특별한 상황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틀림없이, 이것은 우리 영혼 안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일 것입니다. 이 열렬한 사랑은, 어떠한 소란이나 과장 없이 우리에게 고통을 견디며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마태 7,14)에 들어선 우리들은 얼마나 침착하고 평화로운가!

수덕 수련? 신비 신학? 사람들이 어떻게 부르건 상관없습니다. 수덕 수련이건 신비 신학이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것은 하느님 자비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이 묵상하려고 노력하면, 하느님께서는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믿음뿐 아니라 믿음의 행동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알고 있었듯이, 그리고 저도 분명하게 이야기하였듯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날마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한 행동은 이미 관상이며 합일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살아야 하며, 비록 각자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세상 문제들의 한가운데서 각자의 영적 여정(수많은 종류의 여정이 있습니다)을 떠나기에 앞서서 갖추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한 기도와 행위 때문에 우리의 일상 활동이 지장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고상한 인간적 열정 속에서 주님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온갖 염려와 일들을 하느님께 봉헌할 때, 그것들은 세상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만지는 것을 모두 금으로 바꾸었던 미다스 왕의 신화에 관하여 제가 얼마나 자주 이야기하였습니까! 우리는 비록 개인적으로 결함이 있지만, 우리가 만지는 것을 모두 초자연적 공로라는 금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