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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하느님의 친구들»에 성덕 → 일상생활 속 거룩함 항이 있음.

우리가 주님의 말씀, 곧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9) 하신 말씀을 묵상할 때에, 우리는 우리 삶의 유일한 목적, 곧 ‘성화’를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거룩해지게 하려고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미묘한 유혹처럼 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이 신성한 초대를 참으로 마음에 받아들인 사람은 아주 소수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보다시피, 우리는 도구로 쓰이기에 거의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인류의 다른 사람들과 견주어 소수입니다. 우리 자신도 보잘것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확고한 말씀, 권위에 찬 말씀이 메아리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요 누룩입니다. 그리고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합니다”(갈라 5,9). 우리가 각각의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언제나 가르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백이면 백 모든 사람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구속하셨고, 당신의 구원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시고자 적은 수의 보잘것없는 우리를 활용하고자 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어느 누구도 나쁘게 대우하지 않습니다. 잘못은 잘못이라고 해야 하지만, 그 잘못을 고쳐 줄 때에는 친절하게 고쳐 주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사람을 도울 수도, 거룩하게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사는 법을, 서로 이해하는 법을, 관대하게 넘어가 주는 법을, 형제자매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요한 성인께서 말씀하셨듯이,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놓으십시오. 그러면 사랑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의 일터, 가정, 사회생활에서 조성되는 매우 우울한 상황에서조차 이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는 극히 하찮은 기회조차도 놓치지 않고 활용하여 우리 자신을 성화하고, 공동 구속 활동을 달콤하고 고무적인 과제로 인식하며 우리와 함께 날마다 같은 고민을 나누는 사람들을 성화해야 합니다.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마태 21,33).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묵상은, 이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의 운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대한 우리 인간의 불성실하고 배은망덕한 응답을 적나라하게 지적하였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저는 그 임자가 “멀리 떠났다”는 말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포도밭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포도밭 울타리 안에서, 포도 확 안에서 우리 앞에 놓인 일들에 에너지를 쏟아야 합니다. 그러고는 하루 일이 끝났을 때 탑에 올라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편안함에 안주한다면,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보세요. 제 시간은 제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의 포도밭을 돌보는 일에 저 자신을 붙들어 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과 이해력과 능력과 무한한 은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주님의 농장에서 일해야 하는 일꾼이라는 것을 잊을 권리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먹거리를 마련해 주는 일에 우리를 협조자로 부르셨습니다. 이 농장의 울타리 안이 우리의 일터입니다. 이곳이 예수님의 구원 활동을 도와 우리가 하루하루 땀 흘려 일할 곳입니다(콜로 1,24 참조).

저는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시간이 정말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여러분의 시간은 하느님을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덕분에 그러한 이기적인 생각이 여러분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분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진심으로 투신하고, 교만을 이겨 내며, 바른 생각을 하십시오. 얄팍한 생각에 빠져 달아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장터를 배회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탈렌트를 묻어 버리고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는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돌보아야 하는 포도밭을 버려두고 다른 곳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모두 주인이 맡긴 중요한 일을 무심히 넘겼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주님의 도구로 여기고 그에 어울리는 행동으로 그분의 구원 활동에 협력하며, 영혼들의 선익을 위하여 자신의 온 생명을 기꺼이 희생 제물로 봉헌하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 기도의 열매는 어떤 확신이어야 합니다. 그 확신이란, 우리 지상 여정의 목적이 어떠한 때에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여정은 영광스럽고 보배로운 것이며, 하늘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이고, 놀라운 것으로서, 인간과 하느님에 대해 책임을 지면서 관리하도록 우리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 여건을 변경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한가운데서 우리의 직업, 일자리, 가정생활, 사회적 관계를 성화할 수 있습니다. 단지 세속적 의미만을 지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성화할 수 있습니다.

스물여섯 살에 저는 오푸스데이에서 우리 주님께 봉사하는 것의 의미를 깊이 깨달으면서, 온 마음을 다하여 간청하였습니다. 여든 살 노인의 성숙함을 주십사 하고요. 초보자로서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으로 하느님께 제가 더 나이 든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저의 시간을 잘 사용하는 법을 알 뿐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일에 매 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러한 풍요로움을 주시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아마도 여러분과 제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때가 올 것입니다. “제가 노인들보다 현명하니, 당신 규정을 따르기 때문입니다”(시편 119,100). 젊다고 하여 생각 없는 사람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머리카락이 희다고 해서 반드시 현명하거나 지혜로운 사람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님, 저와 함께해 주십시오. 당신은 우리 어머니시요 예수님을 기르신 어머니시며, 예수님께서 사람들 사이에서 보낸 시간을 잘 활용하신 분입니다. 저에게도 교회와 온 인류를 위하여 봉사하는 데 저의 날들을 활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좋으신 어머니여, 필요할 때마다 저를 부드럽게 꾸짖어 주소서. 제 시간의 주인은 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심을 저의 온 마음으로 깨우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물론 여러분의 권리를 포기하라고 권유하는 것도 아니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수행 중인 우리에게 그것은 하느님께서 초대하신 성덕을 향한 전투에서 도망치는 것만큼이나 비겁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품위에 맞게 사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특히 여러분의 일에서) 힘껏 노력해야 합니다. 때로는 빈곤 때문에 힘들어도, 낙담하지도 말고 항거하지도 마십시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을 이겨 내고자 할 수 있는 모든 올바른 수단을 사용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하느님의 섭리를 시험하는 셈이 됩니다. 여러분은 싸우는 동안에도, 모든 것이 함께 선을 이룬다는 것을, 심지어 결핍과 빈곤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로마 8,28)을 기억하십시오. 지금부터는 온갖 사소한 어려움과 불편함 정도는 웃으면서 맞이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이제 추위와 더위, 여러분이 느끼기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의 결핍, 쉬고 싶을 때 쉬지 못하는 것, 배고픔, 외로움, 배은망덕, 인정받지 못함, 모욕 따위는 쾌활하게 대처하십시오.

우리는 길 위를 걷는 사람들이며, 사회의 혈액 순환에 참여하고 있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직업 활동 안에서 성인이 되고 사도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으로 일을 성화하고, 일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성화되기를 바라십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거룩하게 살도록 돕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버지요 친구의 사랑으로 여러분의 일 안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이 날마다 자신의 일을 책임지고 잘 수행함으로써, 여러분 자신의 살림살이뿐 아니라 사회 발전에도 직접 이바지하게 되며, 또한 국내외의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수많은 복지 사업을 지탱해 주고 다른 사람들의 짐을 덜어 줄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유배 보냈던 이곳으로 너희를 다시 데리고 오겠다”(예레 29,14).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노예 신분을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가 불러 주는 사랑의 노래를 들으며 그 노래의 날개 위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압니다. 이 사랑의 노래를 듣는 우리는 결코 하느님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을 사는 새로운 방식, 거룩하고 초자연적이며 경이로운 방식입니다. 에스파냐 황금 세기에 회자되던 구절들처럼, 우리는 이 진리의 깊은 맛을 음미합니다. “나는 살아 있습니다. 아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사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갈라 2,20 참조)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긴 세월 동안 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친구들이 거의 없으셨습니다. 우리는 전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여 봉사해야 하는 의무를 저버리지 맙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자유롭게, 곧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로마 8,21) 안에서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갈라 5,1).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를 얻어 주셨습니다.

수덕 수련? 신비 신학? 사람들이 어떻게 부르건 상관없습니다. 수덕 수련이건 신비 신학이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것은 하느님 자비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이 묵상하려고 노력하면, 하느님께서는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믿음뿐 아니라 믿음의 행동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알고 있었듯이, 그리고 저도 분명하게 이야기하였듯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날마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한 행동은 이미 관상이며 합일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살아야 하며, 비록 각자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세상 문제들의 한가운데서 각자의 영적 여정(수많은 종류의 여정이 있습니다)을 떠나기에 앞서서 갖추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한 기도와 행위 때문에 우리의 일상 활동이 지장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고상한 인간적 열정 속에서 주님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온갖 염려와 일들을 하느님께 봉헌할 때, 그것들은 세상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만지는 것을 모두 금으로 바꾸었던 미다스 왕의 신화에 관하여 제가 얼마나 자주 이야기하였습니까! 우리는 비록 개인적으로 결함이 있지만, 우리가 만지는 것을 모두 초자연적 공로라는 금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그리스도인의 특별한 생활 방식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어떤 일을 해 주셨는지, 우리에게 어떻게 응답해 주셨는지 묵상합시다. 만일 우리가 용기 있게 자신의 행동을 성찰한다면, 여전히 더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어제 저는 어떤 일본인 예비 신자가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우리는 더 큰 믿음, 훨씬 더 큰 믿음을 지닐 필요가 있으며, 믿음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혼을 동요시키는 동시에 꿀처럼 달콤한 주님의 말씀에 조용히 마음을 여십시오. “내가 너를 구원하였고,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이사 43,1). 하느님의 것을 훔쳐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세상 창조 이전에 영원으로부터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해 주셨으며(에페 1,4 참조), 끊임없이 우리 삶을 정화하여 우리 자신을 당신께 봉헌한 기회를 주십니다.

만일 우리 마음 안에 지극히 작은 의심이라도 여전히 남아 있다면, 예수님의 입에서 직접 나오는 또 다른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 초자연적 믿음입니다. 믿음이 약해지면, 하느님께서 멀리 계시고 당신 자녀를 거의 돌보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종교를 마치 다른 치료법이 없을 때 의존하는 어떤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처구니없게도 화려하고 비상한 볼거리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살아있는 믿음을 지닌 영혼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일상생활의 평범한 방식을 바꿀 필요가 없으며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위대한 성덕은 여기에서 지금 매일매일의 사소한 일들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저는 길에 관하여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우리 집, 아버지의 나라를 향하여 여행하는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 특별히 어려운 구간들이 있고 때로는 강이나 거의 눈앞이 안 보이는 숲을 지나야 하더라도, 대개는 통과할 수 있고 깜짝 놀랄 것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오히려 위험은 평범한 길에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고 평상적인 일들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는 생각 안에 위험이 있습니다!

두 제자가 엠마오를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길을 가는 다른 많은 여행자들과 마찬가지로 보통 속도로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야단스럽지 않게 그들과 합류하여 함께 걸으십니다. 그분과 나누는 대화는 그들의 피로를 다소 덜어 주었을 것입니다. 황혼이 깃드는 것처럼 저는 그 장면을 잘 상상할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불고 있으며, 주변에는 밀이 무르익은 밭과 우아한 올리브 나무들, 희미한 빛이 어른거리는 그 나뭇가지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길에 동행하십니다. 주님, 모든 일에서 당신은 얼마나 위대하십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의 수준으로 내려오시어 매일매일의 혼잡함 속에서 우리를 찾으시고 따라오실 때에 저는 훨씬 더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어린이와 같은 마음, 순수한 눈과 맑은 머리를 주시어, 당신 영광을 드러내는 외적 표시 없이 저희에게 오실 때에 당신을 알아보게 하여 주소서.

그들이 마을에 도착하면 여행은 끝이 납니다. 그 두 제자는, 그러한 것에 대한 생각 없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아서 그분과 헤어지는 것이 서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습니다”(루카 24,28). 주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 심으신 그 순수한 사랑을 우리가 깨닫고, 자유롭게 당신께 의지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붙들고” 간청해야 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루카 24,29).

우리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대담성이 부족합니다. 아마도 자신이 불성실하거나 쑥스럽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내심 바라는 것은 이것일 것입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희 영혼이 어둠에 덮여 있습니다. 주님만이 홀로 빛이십니다. 주님만이 홀로 우리를 휩싸고 있는 갈망을 채워 주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온갖 아름답고 훌륭한 것들 가운데 하느님을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 최고임을 우리는 충분히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머무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빵을 떼실 때에 클레오파스와 그 동료의 눈이 열린 것처럼 우리의 눈도 열렸습니다. 비록 그분이 한 번 더 우리에게서 사라지실지라도, 비록 날이 저물고 있을지라도, 우리도 한 번 더 그분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할 힘을 발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토록 많은 기쁨을 우리 마음에만 간직하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 우리 하느님께서 이 이름을 달콤함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이제 전 세계가 엠마오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의 모든 거룩한 길들을 활짝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