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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는 참회를 주제로 하는 2 항이 있음.

우리는 사순시기의 시작을 맞이했습니다. 참회와 정화, 그리고 회개의 시기입니다.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고 보면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가 그리 쉬운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우리의 첫 회개는 확실히 정말로 소중합니다. 우리들은 첫 회개의 순간을 저마다의 유일무이한 시간으로 기억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우리가 확실히 이해했던 특별한 시간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다음에 계속 이어지는 회개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회개할 때마다 점점 더 많은 것들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회개 안에 깃든 은총의 활동이 계속되게 하려면 우리의 영혼을 젊게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 간청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알게 해달라고, 무엇을 잘못했을 때 어떻게 하면 당신께 용서를 구할 수 있는지 깨닫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주일 전례에서 “그가 나를 부르면 나 그에게 대답하고” (시편 91,15) 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시고, 인간이 당신께 얘기하기를 기다리면서 언제나 우리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분은 항상 우리 얘기를 듣고 계시지만, 특별히 지금 이 순간에 더욱 경청하십니다. 우리 마음은 준비돼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화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분은 우리 얘기를 듣고 계시며, 우리의 “부서지고 꺾인 마음”(시편 51,19)을 결코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귀 기울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악(惡)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선(善)으로 가득 채우도록 하기 위해 우리 삶에 개입하길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를 해방하여 영예롭게 하리라.” (시편 91,15). 그러므로 우리는 영광을 희망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영적 생활(영성생활)을 일궈갈 ‘내적 움직임’을 다시 한번 시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영광에 대한 희망이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키웁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는 이 세 가지 신학적 미덕, 즉 ‘향주덕(向主德)’은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을 닮게 해줍니다. 이들 향주덕은 이미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순시기를 더 잘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참회의 정신과 정화를 위한 열망은 바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는 세 가지 향주덕으로부터 옵니다. 사순시기는 금욕의 외적인 실천만을 늘릴 수 있는 기회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사순시기가 가지는 깊은 의미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사순시기에 우리가 행하는 금욕의 외적 실천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결과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기쁨은 보물입니다. 오직 하느님을 거슬렀을 때만 우리는 그 기쁨을 잃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는 이기심의 열매이고, 이기심은 슬픔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우리 영혼의 파편 아래로 약간의 기쁨이 살아남습니다. 하느님도, 성모님도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회개해서 그 슬퍼하는 몸짓이 우리 마음으로부터 우러난다면, 그리고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만나 용서하시기 위해 오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슬픔도 우리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서에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루카 15, 32) 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에겐 오직 기뻐할 권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말씀은 ‘돌아온 탕자’ 예화의 놀라운 결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아무리 많이 묵상해도 질리지 않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 나오셨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맞으시기 위해 허리를 굽히시고, 사랑과 다정함의 표시로 입을 맞추실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새 옷과 반지와 발에 맞는 신발을 가져다주라고 하인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야단맞을까 봐 겁내지만, 그분은 여러분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여러분은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지만, 그분은 여러분에게 입을 맞추십니다. 여러분은 험한 말로 질책받을까 무서워하지만, 아버지는 여러분을 위해 잔치를 준비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당신을 거스르는 사람들에게도 관대하신 분이라면, 그런 분이 항상 당신께 충실했던 원죄 없으신 어머니, 동정 성모님께 어떻게 영광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마음은 자주 하느님을 배신합니다. 그런 인간의 마음이 하느님께 드리는 응답이 너무 작더라도 하느님의 사랑은 어마어마한 결과를 이뤄주실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을 조금도 거스르지 않았던 성모님의 마음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이뤄지겠습니까?

보십시오. ‘성모 승천 대축일’의 전례는,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하느님의 자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성모 승천 대축일’의 전례는 이것을 설명하기보다는 찬미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성모님을 칭송하는 우리들 각자의 열정이 더욱 커질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말하고 모든 것을 다할지라도 우리는 항상 부족할 것입니다.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묵시 12,1) “임금님이 너의 아름다움을 열망하시리니 그분께서 너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분 앞에 엎드려라. 한껏 화려하게 꾸민 임금님 딸이 금실로 수놓은 옷에 싸여 안으로 드는구나.” (시편 45, 12,14)

‘성모 승천 대축일’의 전례는 성모 마리아의 말씀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 말씀 안에서 최고의 겸손이 최고의 영광과 한데 이어집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루카 1,48-49)

가장 감미로우신 성모 성심이시여, 안전한 길을 예비해 주소서. (Cor Mariae Dulcissimum, iter para tutum). 이 땅에서 저희가 항상 마음 놓고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하소서. 저희를 위해 당신께서 저희가 따라갈 길이 되어주소서. 당신의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어지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을 당신께서는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