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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는 고백를 주제로 하는 5 항이 있음.

하느님의 자비 

오늘은 대림 시기의 시작을 알리는 날입니다. 이날을 맞아 ‘영혼의 적’들이 부리는 농간에 관해 생각해보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바람직한 일입니다. ‘관능의 무질서’, ‘무사태평한 피상성(皮相性: 진실을 추구하지 않고 겉모습만을 보고 내리는 판단)’, ‘하느님을 거부하는 이성의 어리석음’, ‘하느님과 당신의 피조물들에 대한 사랑을 훼손하는 무신경한 오만’ 등이 바로 그런 농간들입니다. 이 모든 영혼의 장애물들은 매우 현실적이며 실제로 엄청나게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전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며, 우리가 입당할 때 기도한 대로 다음과 같이 간구하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께 제 영혼을 들어 올립니다. 저의 하느님 당신께 의지하니 제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제 원수들이 저를 두고 기뻐 날뛰지 못하게 하소서.” (시편 25,1-2) 우리는 또한 봉헌예식 때도 같은 바람을 되새깁니다. “당신께 바라는 이들은 아무도 수치를 당하지 않으니” (시편 25,3)

우리들이 구원받을 시기가 다가오기에 바오로 성인의 말씀이 위로처럼 들립니다.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 구원하신 것입니다.” (티토 3,4-5)

성경을 대충만 읽어봐도 여러분은 ‘하느님 자비’에 관한 언급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땅을 가득 채우고, 당신의 모든 자녀들에게 미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 주위에 넘치며, 자비의 눈이 내게 머무르십니다.”(시편 33,18), 우리를 도우시기 위한 당신의 자비는 “하늘에 닿아 있고.” (시편 36,6), 그 자비는 언제나 “굳건합니다.” (시편 117,2).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 안에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그분의 자비는 “자애롭고” (시편 25,6), “가뭄의 비구름처럼 반갑습니다.” (시편 117,2)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하느님 자비의 이야기를 요약한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태 5,7) 우리 주님께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6) 복음서의 다른 많은 장면들도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심, 돌아온 탕자의 예화, 잃어버린 양의 비유, 빚을 탕감 받은 채무자, 그리고 나인 고을에 사는 과부의 외아들을 되살리신 사건 등등.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기적을 행하셔야 했던 많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느 가난한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죽은 아들은 어머니가 살아가는 의미였습니다. 살아 있었더라면 노년에 어머니를 보살폈겠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정의가 아닌 연민(憐憫)으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인간의 고통에 당신의 마음이 움직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생각하면 우리가 평안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들어 줄 것이다. 나는 자비하다.” (탈출 22,26) 이 말씀은 당신께서 우리의 간청을 반드시 들어주시겠다는 초대인 동시에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히브 4,16)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앞에 있는 한 우리의 성화(聖化: 거룩하게 됨)를 방해하는 적들은 힘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우리 자신의 잘못과 인간적 약점 때문에 우리가 쓰러진다 해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태만하지 않고 오만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웠습니다. 또한 경건하며 성숙하고, 세속적 것들의 포로가 되지 않으며, 덧없이 지나쳐가는 것보다 영원한 것을 선택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의 나약함 때문에 이 헛발 딛기 쉬운 세상에서 자신의 발걸음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훌륭한 의사를 보내어 처방하게 하시고, 절망에 빠져 용서를 청하지 않도록 자비로운 재판관을 통하여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시고, 착한 인도자이신 분 

하느님의 부르심은 항상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우리 앞에서 별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별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별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비논리적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오는 길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내적 삶의 어떤 순간에는 별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는 대부분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신 성소의 거룩한 광채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부르심이 무엇인지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우리들 자신의 고행길을 걸으면서 스스로 일으킨 먼지들이 투박한 구름을 만들었을 것이고, 그 구름이 우리 앞에 비추던 빛을 가렸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동방박사들을 본보기로 삼아 질문해봅시다. 헤로데는 자신의 지식을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하는 데 써버렸습니다. 하지만 동방박사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선한 일을 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헤로데에게 갈 필요도 없고, 세상의 현자들을 찾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명확한 가르침(교리)을 주셨고, 성사 안에서 넘치는 은총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인도하고 이끌어줄 사람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항상 되새겨주는 사람들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도록 주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 우리에겐 또한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지혜의 보물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보전해온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사를 통해 베풀어지는 그리스도의 은총이 그것입니다. 우리 곁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증언과 본보기 또한 지혜의 보물들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선한 삶을 통해 하느님께 충실하게 나아가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께 충고 한 마디 하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밝게 빛났던 빛을 잃어버린다면, 그때마다 착한 목자에게 의지하십시오. 그런데 누가 착한 목자일까요? 착한 목자는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양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 입니다. 그는 삯꾼처럼 행동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삯꾼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그렇게 되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립니다.” (요한 10,1-12). 이 성경 말씀들을 되새겨보십시오. 결코 헛된 말이 아닙니다. 목자와 양들, 그리고 양의 우리와 양 떼에 관해 애정을 가득 담아 얘기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영혼에게 좋은 인도자가 필요하다는 실질적인 증거로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좋은 목자’에 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만약 나쁜 목자가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이리를 보고 도망하는 삯꾼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쁜 목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닌 자기 자신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나쁜 목자는 영적 자유를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나무랄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이리는 양의 목을 물어 낚아채고, 사탄은 인간을 유혹해 불의를 범하게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침묵하며 나무라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삯꾼인 것입니다. 이리를 보고 달아났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아니야, 나는 여기 있다고. 달아나지 않았어’… 하지만 저는 여러분께 대답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침묵했으니 달아난 것입니다. 두려웠기 때문에 여러분은 침묵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는 항상 풍성하게 많은 착한 목자들을 통해 스스로의 거룩함을 드러냈고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가 단순해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아둔해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침묵하는 삯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닌 얘기를 하는 삯꾼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착한 목자를 찾아가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서조차 주님께서 우리를 어둠 속에 내버려 두신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굳건하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야말로 우리는 착한 목자에게 가야 하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는 당연히 우리 영혼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그는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며 말과 행동을 통해 사랑 넘치는 영혼이 되고자 합니다. 그 역시 죄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항상 그리스도의 용서와 자비를 믿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여러분의 양심이 말해준다면, 그 잘못이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거나 잘못인지 아닌지 의심스럽더라도 고해성사를 드리러 가십시오. 여러분을 돌봐주는 사제를 찾아가십시오. 그는 굳건한 믿음과 영혼의 정화, 그리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용기를 여러분에게 요청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적합한 자격을 갖춘 사제라면, 누구에게나 찾아가서 고백할 수 있는 엄청난 자유를 여러분에게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신중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완전한 자유의지로 자신이 착한 목자로 알고 있는 사제에게 갈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제는 여러분이 다시 한번 주님의 별을 올려다보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 

여러분은 이 확신에 찬 기도를, 악(惡)과의 전쟁에서 우리가 결코 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 깨달음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이런 확신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바로 이 ‘하느님의 자녀됨’이야말로 언제나 제게 경이롭게 다가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사순시기에 우리의 변화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결코 포악한 지배자도, 엄격하고 무자비한 심판자도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부족한 관대함과 우리의 죄와 실수에 관해 말해주십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해주시는 것은 우리를 그것들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시기 위해서이며, 당신과 나누는 친교와 사랑을 약속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우리가 기쁘게 회개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는 아버지의 집으로 우리가 되돌아오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됨’은 오푸스데이 영성의 바탕입니다.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아이는 아버지를 여러 방법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깨닫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세상 한가운데 있는 당신 집으로 우리를 데려가서 하느님의 가족이 되게 하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것이 곧 우리의 것이고 우리의 것이 바로 그분의 것입니다. 마치 달을 따달라고 조르는 어린아이처럼 주님께 간구하는 친근함과 자신감을 키워가도록 노력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주님을 아버지로 모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아첨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단순히 격식과 예의만을 차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참으로 진실되고 의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진노하시게 만들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불신(不信)을 참으실 수 있습니다. 당신 자녀들이 주님께 돌아올 때, 회개하며 용서를 청할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어떤 잘못도 용서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너무도 좋은 아버지여서 용서받고 싶어 하는 우리의 소망을 항상 기다리시며, 은총 가득한 당신의 팔을 벌리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저는 아무것도 지어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예화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예화를 기억해봅시다. 바로 방탕한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루카 15,20) 성경에 기록돼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보다 더 인간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까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부성애를 이보다 더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해 달려오실 때 우리는 침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오로 성인과 함께 ‘아빠, 아버지(Abba, Pater)’라고 외칩니다. 비록 하느님께서는 우주의 창조주이시지만, 우리가 어마어마하게 찬양하며 반기지 않더라도 괘씸하게 여기지 않으시며, 당신의 위대하심을 우리가 알지 못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으십니다. 단지 그분은 우리가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길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영혼이 기쁨에 가득 차서 이 ‘아버지’라는 말을 음미하길 바라시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인간의 삶이란 끊임없이 우리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입니다. 통회(痛悔)를 통해서, 마음의 회개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우리 마음의 회개는 스스로 변화하고픈 열망을 의미합니다. 우리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굳센 결심, 희생과 자기증여(自己贈與)라는 말로 표현되는 그 확고한 다짐을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갑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입고, 그분의 형제이자 하느님의 가족이 되는 ‘용서의 성사(고해성사)’를 통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화 속 아버지처럼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비록 우리에겐 그럴 자격이 없을지라도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빚이 얼마나 많은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방탕한 아들과 똑같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음을 열고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는 것뿐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응답은 너무나 초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실제로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 거룩한 선물에 놀라고 기뻐하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거룩한 은총의 성사들 

진실로 투쟁을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교 2천년 역사에서 절대 변하지 않은 유용한 방법을 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이고, 고행이고, 또한 자주 성사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행도 역시 기도지요. 육신의 감각으로 드리는 기도니까요. 그래서 추려보면, 이 방법은 두 단어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성사입니다.

이제 성사(聖事)에 관해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성사는 하느님 은총의 근간입니다. 성사는 하느님의 사랑 넘치는 친절하심을 확인하는 경이로운 증거입니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내린 교리의 정의를 조용히 묵상해봅시다. “성사란 은총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그 은총을 우리 눈앞에 가져다 놓고 선포하는 일종의 감각적인 징표이다.” 우리 주 하느님은 무한(無限)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다할 줄 모르며, 우리를 향한 그분의 온화함과 다정하심은 한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그리고 무상으로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일곱 개의 효과적인 징표를 세우셨습니다. 그 일곱 가지 징표(칠성사)는 안정감 넘치고 간단하며 쉬운 방법으로 인간이 구원의 공로를 나눌 수 있게 해줍니다.

만약 성사를 포기한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특히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사에 대해 잊은 듯이 보이며, 성사라고 하는 이 그리스도 은총의 흐름을 비웃기까지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른바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이러한 상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니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해야만 합니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우리가 더욱 감사하고 사랑하면서, 이들 성사의 원천에 다가서도록 용기를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조금도 느끼지 않고 갓 태어난 자녀의 세례를 미루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정의와 사랑에 심각하게 맞서게 됩니다. 세례를 미루는 것은 신앙의 은총을 자녀들에게서 빼앗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원죄로 얼룩진 세상에 태어난 한 영혼 안에 깃들어 계신 복된 삼위일체의 엄청난 보물을 앗아가는 까닭입니다. 아울러 그들은 견진성사의 참된 본질도 바꾸려 듭니다. 거룩한 성전(聖傳)은 이견 없이 견진성사를 영적 삶을 굳세게 해주는 성사로 받아들입니다. 견진성사는 더욱 많은 초자연적인 힘을 영혼에 부여합니다. 조용하면서도 풍요로운 성령의 강림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군대(milites Christi)’답게 싸울 수 있게 해줍니다. 그 싸움은 이기심과 온갖 유혹에 맞서는 스스로의 은밀한 전투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느님의 일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린다면, 고해성사의 가치를 인정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고해성사는 인간과의 대화가 아닌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고해성사는 하느님 정의(正義)의 법원(法院)인 동시에, 특히 하느님 자비의 법원입니다. 그 법원에는 사랑 넘치는 재판관이 계셔서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에제 33,11)

우리 주님의 다정하심은 정말로 무한합니다. 그분이 당신의 자녀들을 얼마나 친절하게 대하시는지 보십시오. 그분은 결혼을 거룩한 결합으로 만드셨고, 그리스도와 당신 교회가 일치를 이루는 상징으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 가정의 근간이 되는 위대한 성사로 만드셨습니다. 혼인성사로 이뤄진 그리스도인 가정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평화와 화합의 장소여야 하고, 또한 성덕(聖德)의 학교여야 합니다. 부모는 하느님의 협력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를 사랑해야 할 의무를 가집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썼던 것처럼, 부모를 사랑하라는 네 번째 계명을 십계명 중 가장 사랑 넘치는 계명으로 설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거룩하게 결혼생활을 한다면, 여러분의 집은 평화와 기쁨 가득한 밝고 즐거운 가정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기쁨은 보물입니다. 오직 하느님을 거슬렀을 때만 우리는 그 기쁨을 잃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는 이기심의 열매이고, 이기심은 슬픔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우리 영혼의 파편 아래로 약간의 기쁨이 살아남습니다. 하느님도, 성모님도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회개해서 그 슬퍼하는 몸짓이 우리 마음으로부터 우러난다면, 그리고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만나 용서하시기 위해 오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슬픔도 우리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서에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루카 15, 32) 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에겐 오직 기뻐할 권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말씀은 ‘돌아온 탕자’ 예화의 놀라운 결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아무리 많이 묵상해도 질리지 않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 나오셨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맞으시기 위해 허리를 굽히시고, 사랑과 다정함의 표시로 입을 맞추실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새 옷과 반지와 발에 맞는 신발을 가져다주라고 하인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야단맞을까 봐 겁내지만, 그분은 여러분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여러분은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지만, 그분은 여러분에게 입을 맞추십니다. 여러분은 험한 말로 질책받을까 무서워하지만, 아버지는 여러분을 위해 잔치를 준비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당신을 거스르는 사람들에게도 관대하신 분이라면, 그런 분이 항상 당신께 충실했던 원죄 없으신 어머니, 동정 성모님께 어떻게 영광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마음은 자주 하느님을 배신합니다. 그런 인간의 마음이 하느님께 드리는 응답이 너무 작더라도 하느님의 사랑은 어마어마한 결과를 이뤄주실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을 조금도 거스르지 않았던 성모님의 마음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이뤄지겠습니까?

보십시오. ‘성모 승천 대축일’의 전례는,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하느님의 자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성모 승천 대축일’의 전례는 이것을 설명하기보다는 찬미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성모님을 칭송하는 우리들 각자의 열정이 더욱 커질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말하고 모든 것을 다할지라도 우리는 항상 부족할 것입니다.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묵시 12,1) “임금님이 너의 아름다움을 열망하시리니 그분께서 너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분 앞에 엎드려라. 한껏 화려하게 꾸민 임금님 딸이 금실로 수놓은 옷에 싸여 안으로 드는구나.” (시편 45, 12,14)

‘성모 승천 대축일’의 전례는 성모 마리아의 말씀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 말씀 안에서 최고의 겸손이 최고의 영광과 한데 이어집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루카 1,48-49)

가장 감미로우신 성모 성심이시여, 안전한 길을 예비해 주소서. (Cor Mariae Dulcissimum, iter para tutum). 이 땅에서 저희가 항상 마음 놓고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하소서. 저희를 위해 당신께서 저희가 따라갈 길이 되어주소서. 당신의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어지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을 당신께서는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