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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는 이웃과 화목하기 살기를 주제로 하는 2 항이 있음.

섬김으로써 다스리시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을 다스리시게 한다면, 우리는 결코 권위주의적일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들을 섬길 것입니다. 저는 “섬기다”라는 말을 정말 좋아합니다. 제 임금을 섬기고 그분을 통해 당신의 성혈로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저는 참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섬기는 방법’을 알기 바랍니다. 오직 섬김으로만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할 수 있으며 그분을 널리 알리고 사랑받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의 모범을 통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을 우리가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행동을 통해 그분의 증거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네 모든 삶의 주님이시며 우리들 존재의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한 번 이 섬김의 증거자가 되면 우리의 언어로 가르침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신 방법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처음부터 다 다루었습니다.” (사도 1,1)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 행동으로 가르치시고, 그런 다음에 거룩한 강론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다른 사람을 섬기려면 진정으로 ‘인간적’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의 삶이 인간적이지 못하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 위에 아무것도 세우시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질서와 이기심, 또는 자만(自慢) 위에는 아무것도 정상적으로 세우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이들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불의(不義)를 정의(正義)라고 불러서는 안 되고,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을 그렇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 되며, 악을 선이라고 말해도 안 됩니다. 악과 마주했을 때 또 다른 악으로 대항해서도 안 되며, 오히려 굳건한 교리와 선한 행동으로 맞서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충만한 선 앞에 악이 굴복당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과 우리 주위 사람들의 영혼을 다스리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마음에 하느님의 사랑을 담으려 하지도 않으면서 세상에 평화를 세우려고 애씁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평화를 이루겠습니까?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의 평화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나라는 거룩함을 향한 열망과 은총을 받아들일 겸손한 준비를 필요로 합니다. 동시에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노력과 거룩한 사랑의 분출을 기반으로 해야 합니다.

개인의 자유 

자신의 일을 할 때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그들이 하는 일들이 가진 의무를 회피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인간의 모든 활동을 축복한다”는 표현이 그들의 고유한 본질에 대한 모욕이나 무시를 뜻한다면, 저는 그런 표현을 결코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인간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알리는 플래카드나 종교를 드러내는 명찰을 달고 다니는 건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게 반대하는 의견들을 존중합니다만, 그런 식의 표지를 달고 다니는 것이 우리 신앙의 거룩한 이름을 헛되이 사용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가톨릭”이란 이름 또한 때로는 인간의 기준에 따라 점잖지 못한 활동과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습니다.

죄를 제외하면 이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들은 선합니다. 우리 주 하느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긍정적인 방법으로 분투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시민들과 어깨를 맞대고 세속에서 꾸려가는 모든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존엄성에 기반한 모든 가치들을 수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특별히 소중하게 여겨야만 할 한 가지 가치가 있습니다. 바로 ‘개인의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의 개인적 자유를 보호해야 합니다. 물론 그러한 이웃의 자유 또한 지켜야 할 그들 나름의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만 인간적인 동시에 그리스도교적으로 진실되게 자기 자신의 자유를 지킬 수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엄청난 초자연적 능력, 즉 거룩한 은총, 그리고 다른 놀라운 인간적 능력, 바로 ‘개인의 자유’를 거저 주셨습니다. 이렇게 주어진 개인의 자유가 방종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우리는 더욱더 성실해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이 하느님의 율법에 따르도록 진심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자유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 유일한 종은 하느님 사랑에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묶어 맨 이들뿐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사랑의 노예들인 것입니다.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은총에 응답할 수 없습니다.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주님께 우리들 자신을 거리낌 없이 내어드릴 수 없습니다. 가장 초자연적인 이유를 들자면 우리가 그렇게 원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제 말씀을 듣는 분들 중 몇몇은 저와 오래 알고 지냈습니다. 그러니 제가 평생 ‘책임을 수반한 개인의 자유’를 강론해왔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실 수 있을 겁니다. 등불을 들고 정직한 사람을 찾으려 했던 디오게네스처럼 저는 온 세상을 돌며 자유를 찾았고, 지금도 그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더더욱 자유를 사랑하게 됩니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에 저는 자유를 가장 사랑합니다. 자유는 우리가 그 가치를 충분히 가늠할 수 없는 보물입니다.

제가 개인의 자유에 관해 말할 때, 사제로서 제 능력 밖에 있는 정당한 문제들에 관해 참견할 핑계로 사용하려는 게 절대 아닙니다. 세속적이고 시민적 영역에 속하는 현실 문제들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제게 맞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주제들은 우리 주님께서 인간이 자유롭고 차분하게 논의해야 할 문제로 남겨 두셨습니다. 사제의 입은 모든 인간적이고 당파적인 논란을 피해가야 한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제는 오직 하느님과 그분께서 주신 구원 교리로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서만 입을 열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사와 하느님께 더욱 가깝게 다가가는 내적 생활로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서만 말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형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그리스도의 나라를 정치 공학적인 면으로만 바라본다면, 그는 신앙의 초자연적인 목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과는 전혀 무관한 양심의 무거운 짐을 질 위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멍에는 편하고 가벼운 멍에이고, 그분이 주시는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사제로서 제 역할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을 사랑합시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다른 사람들의 정당한 자유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그들과 조화롭게 어울려 살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