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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는 자녀 교육를 주제로 하는 3 항이 있음.

부모는 주로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 자녀들을 가르칩니다. 아들과 딸이 아빠와 엄마에게서 얻고 싶어 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나 충고가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증거를 얻고자 합니다. 어느 특별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드러나는 삶의 가치에 대한 증거, 한 시대에 걸쳐 여러 상황과 환경에서 확인된 삶의 의미에 대한 증거 말입니다.

제가 부모님들께 조언을 드리자면, 무엇보다도 여러분이 신앙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속이지 맙시다. 자녀들은 어렸을 때부터 여러분의 모든 것을 보고 있고, 판단합니다. 부모들이 입으로만 하느님을 말하지 말고, 그분을 증거하고 있음을 아이들에게 행동으로 보여주십시오. 신앙에 충실하고자 진실하게 애쓰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여러분이 먼저 서로 사랑하고, 또한 자녀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여러분의 자녀들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한 최선의 헌신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자녀들은 성실하고 정직하게 커갈 겁니다. 그들은 열린 영성으로 삶의 모든 상황들을 마주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또한 동료에게 봉사하고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주며,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자녀들의 얘기를 경청하십시오. 자녀들에게 여러분의 시간을 내어주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위해 챙겨둔 시간이라 할지라도 자녀에게 선뜻 내어주십시오. 여러분이 자녀들을 신뢰하고 있음을 보여주십시오. 그들이 무슨 말을 하건, 때로 여러분을 속이려 들더라도 자녀들을 믿어주십시오. 자녀들이 반항한다고 해서 섭섭해하지 마십시오. 부모인 여러분도 그 나이 땐 어느 정도 반항적이었을 테니까요. 자녀에게 양보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그리스도교적인 태도로 행동한다면, 자녀들도 천진난만하게 여러분께 다가올 것입니다. 그 나이 때에 당연히 가질만한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거칠고 상스러운 친구를 찾아가는 대신 부모에게 다가올 것이란 얘깁니다. 부모가 신뢰와 상냥함으로 자녀를 대한다면 자녀들도 진실하게 부모를 대하는 모습으로 응답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일시적으로 불화와 오해가 생기더라도그리 큰 문제가 되진 않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의 평화이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초세기 때 한 그리스도인 작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요? 교회에 의해 맺어져, 남편과 아내의 헌신으로 굳세어진 결혼의 기쁨을 말입니다. 축복으로 다져지고 천사에 의해 선포되어 아버지 하느님께 받아들여진 혼인의 환희를 말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남매와 같으며, 서로를 섬기는 하인과도 같습니다. 그 무엇도 영육 간에 그들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부는 하나의 육신 안에 존재하는 두 사람이며, 참으로 하나의 육신과 하나의 영성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가정을 기대하시면서 기뻐하시고 당신의 평화를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있는 곳에 그리스도께서도 같이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는 어떤 악(惡)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요셉 성인이 예수님으로부터 거룩하게 사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면, 인간적으로는 요셉 성인이 하느님의 아들을 가르친 것도 많았을 거라고 저는 감히 얘기하겠습니다. 요셉 성인에게 이따금씩 주어지는 ‘양아버지’라는 호칭을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호칭이 요셉 성인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어쩐지 차갑고 형식적인 것처럼 여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육신적으로 요셉 성인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육신의 부자 관계가 부성(父性)의 유일한 특성이 아님을 가르쳐 줍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한 강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란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넘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성인은 어땠을까요? 그의 부성(父性)이 정결하였던 것만큼이나 성인은 아버지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인이 다른 아버지들과 똑같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사랑의 결실이 아닌, 육신으로 아들을 가진 다른 아버지들과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요. 그랬기 때문에 루카 성인은 “사람들이 그를 예수님의 아버지로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왜 루카 성인은 ‘사람들이 생각했다’고만 얘기할까요? 요셉이 예수님의 아버지라는 생각과 그러한 인간적 판단이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일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요셉이 낳은 자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셉의 깊은 신심과 사랑이 있었기에 그에게 아들이 생긴 것입니다. 태어나신 그 아기는 동정 마리아의 아드님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친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듯 예수님을 사랑했고,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들을 아들에게 줌으로써 그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하느님께서 명하신 대로 아이를 돌봤으며, 자기의 전문 기술을 전수해 예수님을 장인(匠人)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자렛의 이웃사람들이 예수님을 ‘장인(匠人-목수)이자, 장인의 아들’이라고 부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셉 성인의 작업장에서, 요셉 성인의 곁에서 일했습니다. 요셉 성인은 어떤 분이어야 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왜 요셉 성인을 통해서 이 세상에 그토록 큰 은총을 주셨을까요?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아들을 인간적으로 양육하는 사명을 어떻게 완수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요셉 성인을 닮으셨을 것입니다. 일하는 방식, 성품과 말투를 닮았을 것입니다. 예수님 특유의 현실주의와 세세한 것들에 대한 섬세한 시선, 식탁에 앉아 빵을 떼어 나누는 방법, 그리고 가르침을 주실 때 일상적이고 사실적인 상황을 주로 활용하는 것까지.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요셉 성인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이스라엘 어느 특정 지역의 말투를 쓰고, 요셉이라 불리는 목수와 닮은 그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장엄한 신비를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누가 하느님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참으로 인간이셨고 평범한 삶을 사셨습니다. 무엇보다 어린아이로, 그런 다음에는 소년으로 요셉의 작업장에서 일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성인이 되어서 삶의 절정기를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루카 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