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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는 교회의 교도권를 주제로 하는 3 항이 있음.

착한 목자이시고, 착한 인도자이신 분 

하느님의 부르심은 항상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우리 앞에서 별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별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별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비논리적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오는 길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내적 삶의 어떤 순간에는 별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는 대부분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신 성소의 거룩한 광채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부르심이 무엇인지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우리들 자신의 고행길을 걸으면서 스스로 일으킨 먼지들이 투박한 구름을 만들었을 것이고, 그 구름이 우리 앞에 비추던 빛을 가렸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동방박사들을 본보기로 삼아 질문해봅시다. 헤로데는 자신의 지식을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하는 데 써버렸습니다. 하지만 동방박사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선한 일을 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헤로데에게 갈 필요도 없고, 세상의 현자들을 찾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명확한 가르침(교리)을 주셨고, 성사 안에서 넘치는 은총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인도하고 이끌어줄 사람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항상 되새겨주는 사람들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도록 주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 우리에겐 또한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지혜의 보물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보전해온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사를 통해 베풀어지는 그리스도의 은총이 그것입니다. 우리 곁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증언과 본보기 또한 지혜의 보물들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선한 삶을 통해 하느님께 충실하게 나아가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께 충고 한 마디 하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밝게 빛났던 빛을 잃어버린다면, 그때마다 착한 목자에게 의지하십시오. 그런데 누가 착한 목자일까요? 착한 목자는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양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 입니다. 그는 삯꾼처럼 행동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삯꾼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그렇게 되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립니다.” (요한 10,1-12). 이 성경 말씀들을 되새겨보십시오. 결코 헛된 말이 아닙니다. 목자와 양들, 그리고 양의 우리와 양 떼에 관해 애정을 가득 담아 얘기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영혼에게 좋은 인도자가 필요하다는 실질적인 증거로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좋은 목자’에 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만약 나쁜 목자가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이리를 보고 도망하는 삯꾼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쁜 목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닌 자기 자신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나쁜 목자는 영적 자유를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나무랄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이리는 양의 목을 물어 낚아채고, 사탄은 인간을 유혹해 불의를 범하게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침묵하며 나무라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삯꾼인 것입니다. 이리를 보고 달아났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아니야, 나는 여기 있다고. 달아나지 않았어’… 하지만 저는 여러분께 대답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침묵했으니 달아난 것입니다. 두려웠기 때문에 여러분은 침묵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는 항상 풍성하게 많은 착한 목자들을 통해 스스로의 거룩함을 드러냈고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가 단순해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아둔해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침묵하는 삯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닌 얘기를 하는 삯꾼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착한 목자를 찾아가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서조차 주님께서 우리를 어둠 속에 내버려 두신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굳건하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야말로 우리는 착한 목자에게 가야 하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는 당연히 우리 영혼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그는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며 말과 행동을 통해 사랑 넘치는 영혼이 되고자 합니다. 그 역시 죄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항상 그리스도의 용서와 자비를 믿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여러분의 양심이 말해준다면, 그 잘못이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거나 잘못인지 아닌지 의심스럽더라도 고해성사를 드리러 가십시오. 여러분을 돌봐주는 사제를 찾아가십시오. 그는 굳건한 믿음과 영혼의 정화, 그리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용기를 여러분에게 요청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적합한 자격을 갖춘 사제라면, 누구에게나 찾아가서 고백할 수 있는 엄청난 자유를 여러분에게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신중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완전한 자유의지로 자신이 착한 목자로 알고 있는 사제에게 갈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제는 여러분이 다시 한번 주님의 별을 올려다보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제의 책임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목자들 스스로가 민감한 양심을 가지기 위해 분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신앙의 유산을 채워주고 교회의 모든 유산을 만들어 주는 교의(敎義)와 윤리적 가르침에 충실하기 위해 그들이 분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에 대한 설명이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여라. 예언하여라. 그 목자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에제 34,2-4)

이 말씀은 매우 신랄한 질책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은 훨씬 더 나쁩니다. 하느님을 거스른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영적 안녕을 촉진해야 할 임무를 맡은 사람이 오히려 사람들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사람들에게서 영혼을 정화하는 세례수(洗禮水)를 빼앗게 되고, 영혼을 굳세게 하는 견진성사의 성유를 잃게 만듭니다. 또한 고해성사라고 하는 용서의 법원을 빼앗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음식을 앗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평화를 위한 싸움(내적 투쟁)을 포기할 때 생겨나는 결과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 싸우지 않는 사람은 육신에 얽매인 노예 상태에 스스로를 맡겨버리게 됩니다. 육신에 얽매인 노예 상태란 순전히 인간적인 사고방식의 노예가 되는 것이고, 일순간에 불과한 영향력과 명성에 집착하는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허영심의 노예,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이고 육욕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이런 시험을 겪게 그냥 놔두시고, 이름값 못하는 목자를 만나게 된다 해도 충격받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에게 무류성(無謬性)과 확고함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구성하는 인간들의 충직함을 보장해주지는 않으셨습니다. 만약 그들이 하느님께서 요구하신 작은 일을 한다면, 그들에게 주시는 은총이 결코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거룩함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제거하고자 분투한다면, 풍부하고 풍성한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노력하지 않는다면, 설사 매우 높은 지위에 있는 듯이 보이는 자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눈에는 매우 낮은 자가 될 것입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 나는 네가 한 일들이 나의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네가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들었는지 되새겨, 그것을 지키고 또 회개하여라.” (묵시 3,1-3)

1세기에 요한 성인이 쓴 이 권고는 사르디스 교회의 책임자에게 전달됐습니다. 일부 목자들의 책임의식이 약해지는 것은 비단 오늘만의 현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셨던 바로 그 시기, 사도들의 시대에도 그런 상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의 분투를 그만둔다면 어느 누구라도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간단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아무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굳세게 하기 위한 특별한 방법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도움과 충고를 받아들이도록 해주는 겸손,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해서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게 하는 고행, 그리고 우리의 신앙을 보전하고 전파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견고하고 변치 않는 가르침에 대한 공부…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들 스스로를 굳세게 해주는 방법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 

우리 모두 살아가면서 숱한 상황들과 마주합니다. 그 상황이란 개인적 생존의 여건일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역사의 엄청난 기로일 때도 있지요. 저는 삶의 그런 모든 상황들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수많은 부르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진실을 마주 보게 하기 위한 부르심 말입니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기회라고 여깁니다. 당신의 은총으로 굳세어진 우리의 행동과 말을 통해 우리가 속해 있는 그분, 성령을 선포하는 기회인 것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세대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구원하고 거룩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이해하고 똑같이 함께 나눠야 합니다. 우리는 말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으로부터 오는 값진 보물의 영원한 솟구침에 화답하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이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구하면서도 항상 새로운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복음 선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속해 있고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세상을 향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인간 존재와 운명에 관해 가르치는 것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관해 대다수 사람들이 무관심한 것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우리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세속의 일들에만 관심이 있으며 천국을 우러러보는 것을 아예 잊어버렸다고 여긴다면, 그 역시 사실과 다릅니다. 물론 편협한 이념들과, 그런 이념들을 견지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차고 넘친다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대에 엄청난 욕망과 비도덕적인 태도, 영웅주의와 비겁함, 열성과 환멸을 동시에 발견합니다. 더 정의롭고 인간적인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아마도 젊은 시절에 이상주의가 좌절됨으로 인해서 용기를 잃어버린 듯한 사람들을 동시에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용기를 잃은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하거나 아니면 스스로의 좌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이기주의에 갇혀 자신을 숨기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