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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는 자비를 주제로 하는 6 항이 있음.

하느님의 자비 

오늘은 대림 시기의 시작을 알리는 날입니다. 이날을 맞아 ‘영혼의 적’들이 부리는 농간에 관해 생각해보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바람직한 일입니다. ‘관능의 무질서’, ‘무사태평한 피상성(皮相性: 진실을 추구하지 않고 겉모습만을 보고 내리는 판단)’, ‘하느님을 거부하는 이성의 어리석음’, ‘하느님과 당신의 피조물들에 대한 사랑을 훼손하는 무신경한 오만’ 등이 바로 그런 농간들입니다. 이 모든 영혼의 장애물들은 매우 현실적이며 실제로 엄청나게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전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며, 우리가 입당할 때 기도한 대로 다음과 같이 간구하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께 제 영혼을 들어 올립니다. 저의 하느님 당신께 의지하니 제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제 원수들이 저를 두고 기뻐 날뛰지 못하게 하소서.” (시편 25,1-2) 우리는 또한 봉헌예식 때도 같은 바람을 되새깁니다. “당신께 바라는 이들은 아무도 수치를 당하지 않으니” (시편 25,3)

우리들이 구원받을 시기가 다가오기에 바오로 성인의 말씀이 위로처럼 들립니다.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 구원하신 것입니다.” (티토 3,4-5)

성경을 대충만 읽어봐도 여러분은 ‘하느님 자비’에 관한 언급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땅을 가득 채우고, 당신의 모든 자녀들에게 미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 주위에 넘치며, 자비의 눈이 내게 머무르십니다.”(시편 33,18), 우리를 도우시기 위한 당신의 자비는 “하늘에 닿아 있고.” (시편 36,6), 그 자비는 언제나 “굳건합니다.” (시편 117,2).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 안에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그분의 자비는 “자애롭고” (시편 25,6), “가뭄의 비구름처럼 반갑습니다.” (시편 117,2)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하느님 자비의 이야기를 요약한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태 5,7) 우리 주님께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6) 복음서의 다른 많은 장면들도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심, 돌아온 탕자의 예화, 잃어버린 양의 비유, 빚을 탕감 받은 채무자, 그리고 나인 고을에 사는 과부의 외아들을 되살리신 사건 등등.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기적을 행하셔야 했던 많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느 가난한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죽은 아들은 어머니가 살아가는 의미였습니다. 살아 있었더라면 노년에 어머니를 보살폈겠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정의가 아닌 연민(憐憫)으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인간의 고통에 당신의 마음이 움직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생각하면 우리가 평안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들어 줄 것이다. 나는 자비하다.” (탈출 22,26) 이 말씀은 당신께서 우리의 간청을 반드시 들어주시겠다는 초대인 동시에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히브 4,16)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앞에 있는 한 우리의 성화(聖化: 거룩하게 됨)를 방해하는 적들은 힘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우리 자신의 잘못과 인간적 약점 때문에 우리가 쓰러진다 해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태만하지 않고 오만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웠습니다. 또한 경건하며 성숙하고, 세속적 것들의 포로가 되지 않으며, 덧없이 지나쳐가는 것보다 영원한 것을 선택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의 나약함 때문에 이 헛발 딛기 쉬운 세상에서 자신의 발걸음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훌륭한 의사를 보내어 처방하게 하시고, 절망에 빠져 용서를 청하지 않도록 자비로운 재판관을 통하여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의 전례는 우리가 이렇게 말하도록 합니다.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 들어가신다.” 스스로의 이기심으로 가득 찬 요새(要塞)에 자기 자신을 가둬버린 사람은 누구라도 이 전쟁터에 나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쌓은 요새의 문을 들어 올려 평화의 임금을 들어오시게 한다면, 그분과 함께 요새 밖으로 나와 전투에 나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전투는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고 양심을 마비시키는 온갖 고뇌와의 싸움입니다.

“머리를 들어라. 오래된 문들아.” 그리스도교가 우리에게 투쟁을 요구한다는 사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항상 그렇게 요구해왔습니다. 만약 우리가 싸우지 않는다면 이길 수 없을 것이고, 이기지 못한다면 평화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가 없다면 인간의 기쁨이란 환상에 지나지 않고, 거짓이며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러한 헛된 기쁨은 결코 인간에 대한 봉사나, 사랑과 정의, 용서와 자비의 실천으로 변화되지 않으며, 하느님을 섬길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지도 못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팎에서 지위가 높든 낮든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분투를 포기해온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스스로의 나약함과 맞서 싸우는 개인적인 투쟁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투쟁을 포기하고 나서 영혼을 타락시키는 노예 상태에 투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항상 직면하는 위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께 모든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겨 달라고 끊임없이 간구해야 합니다. 이 주제에 관해 얘기하면서 저는 하느님의 정의(正義)에 관해 말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저는 그분의 자비와 연민에 호소합니다. 우리의 죄를 보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공로와 우리 어머니이기도 하신 거룩하신 성모님의 공로, 그리고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신 요셉 성인의 공로와 성인들의 공로를 보아달라고 말입니다.

오늘 미사의 독서에서 읽은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투쟁하기를 원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오른손으로 그를 붙잡아 주시리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마태 11,12) 이 폭력은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의 연약함과 비참함에 대항해 싸우기 위해 쓰는 폭력입니다. 이는 곧 여러분이 스스로의 불성실을 드러내게 하는 용기이며, 적대적인 상황에서도 신앙을 고백하는 대담함입니다.

예전과 다름없이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에게 ‘영웅적 행동’을 기대합니다. 물론 필요하다면 대단한 투쟁의 영웅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영웅적인 행동은 매일매일의 작은 전투에서 이뤄집니다. 겉으로 보기에 사소한 일들에서 사랑을 무기 삼아 끊임없는 투쟁을 이어갈 때 주님께서는 애정 가득한 목자로 항상 여러분의 곁에 계실 것입니다.: “내가 몸소 내 양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뉘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도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들은 제 땅 안에서 평안히 지내게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의 멍에를 부수고, 그들을 종으로 부리는 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해 내면, 그제야 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에제 34,15-16, 27)

성목요일의 기쁨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성체께 항상 불러드렸던 그 찬미가를 우리는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을까요? “입을 열어 찬양하세. 영광의 성체 신비. 세상 구원 이루시려 흘리신 성혈 신비. 강생하신 만민 임금. 당신 피 흘리셨네. 순결하신 동정녀가 낳으신 아드님이 구원을 이루셨네” 우리는 성체 안에 숨어 계신 우리 하느님을 열렬히 경배해야 합니다. 그분은 예수님 당신 자신입니다. 동정 성모님께 잉태되어 나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당신 생명을 내어주신 그분이신 것입니다. 창으로 당신 옆구리를 찔리신 예수님은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 안에 받아 모시는 거룩한 잔치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수난을 새롭게 기억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미래의 영광을 약속받습니다. 교회 전례는 우리를 향한 주님 사랑의 역사의 정점(頂點)을 이렇게 몇 마디의 말씀으로 요약해왔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인간의 운명과 열망, 분투와 고통을 무관심하게 지켜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멀리 계신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 자녀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 복되신 삼위일체의 제2위격이신 예수님을 보내십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본성을 취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을 수 있게 하신 겁니다. 하늘에 계신 그분은 사랑 넘치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에 거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통해 지금도 우리를 당신께 친절하게 이끌어 주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성목요일에 우리가 느끼는 기쁨의 원천입니다. 창조주께서 당신의 피조물을 이토록 사랑하심을 깨닫는 것이 바로 기쁨의 근원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를 세우심으로써 항상 우리 곁에 계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치 그때까지 주님께서 행하신 다른 모든 자비의 증거들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당신 자비의 새로운 증거로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리하신 이유 중 한 가지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그분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지만, 우리와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복되신 삼위일체께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 빠지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은총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려 주셨고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세 1,26)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인간 개개인의 죄는 물론이고, 아담과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뻗친 원죄로부터 구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또한 인간의 영혼에 거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요한 14,23)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던 그 손솔레스 성지를 방문하던 길에 우리는 어느 밀밭을 지나쳤습니다. 바람이 불어 흔들릴 때마다 밀은 빛을 발했습니다. 그때 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일러주셨던 복음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수확 때가 온다.’하고 말하지 않느냐?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요한 4,35) 그리고 저는 주님께서 당신 마음속에 품으셨던 것과 같은 갈망을 우리 마음에 심어주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이윽고 저는 길을 벗어나 밀밭으로 가서 밀이삭을 뜯어 기념으로 간직했습니다.

우리의 눈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고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부르고 계시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며 그들에게 등을 돌릴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들만의 편협한 세계에 사로잡혀 살아가며 우리가 그들을 업신여기면 안 됩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셨던 방식이 아닙니다. 복음은 자주 예수님의 자비에 관해 얘기하며,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느끼고 그들이 필요한 것을 함께 나누시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말합니다. 그분은 나인 고을의 과부를 위로하셨고 , 나자로의 죽음에 슬피 우셨으며, 먹을 것 없이 당신을 따랐던 군중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또한 죄인들을 연민하셨고, 빛과 진리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을 가엾어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마르 6,34)

우리가 진정으로 성모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주님의 이런 태도를 이해하게 될 것이고 우리 마음이 넓어져서 부드럽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들, 우리 형제들의 고통과 의혹, 외로움과 슬픔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간절하게 그들을 돕고 싶어질 것이고 그들에게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대하고, 성모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사람들 이끌기 

하지만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음 대신에 올곧은 영(靈)의 의지를 네게 주겠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조건 없이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인간의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따로 함께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제 부모와 친구들을 사랑하는 똑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성자 그리스도와 성부와 성령, 그리고 성모님을 사랑합니다. 그런 사랑을 아무리 반복해도 저는 질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면 결코 거룩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진실하게 이 세상에서 우리가 체험한 사랑이라면, 그런 인간의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는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1코린 15,28)” 때, 우리가 천국에서 나누게 될 사랑을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나날이 인정 많고 관대하며 헌신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을 반드시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배운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참으로 단순하게, 조금의 자만심도 없이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더불어 나눌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사회에서 직장 일을 하면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여러분의 직업을 진실한 봉사로 바꿔놓을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가능한 모든 기술적, 문화적 이점을 활용해 여러분이 하는 일이 잘 돼야 합니다. 그러면서 항상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기심이 아닌 관대함이 동기가 되고,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닌 모두의 복지를 지향한다면,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삶의 느낌으로 충만해져서 일을 한다면, 여러분이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고 인류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을 통해서, 인간관계의 모든 네트워크를 통해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내보여야 합니다. 또한 친교와 이해, 인간적인 애정과 평화를 위한 노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팔레스티나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신” (사도 10,38)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의 가족관계와 시민사회, 그리고 직장에서, 또한 여러분의 문화와 여가활동 중에서 ‘평화’를 전파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의 왕국이 여러분 마음에 이르렀다는 최고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성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1요한 3,14)

하지만 ‘예수 성심’이라고 하는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성심을 꼼꼼히 바라보고 묵상할 때에만, 우리의 마음이 증오와 무관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사가 루카 성인이 예수님께서 나인 고을에 가셨을 때를 묘사한 장면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은 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치십니다. 그분은 그냥 지나쳐 가시거나 사람들이 당신을 부를 때까지 기다리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먼저 과부에게 가셨습니다. 과부의 슬픔에 마음이 움직이신 것입니다. 과부는 이제 막 자신의 모든 것인 아들을 잃었습니다.

루카 성인은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였다고 설명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라자로가 죽었던 때와 같은 기색을 보이셨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사랑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결코 무감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어린 자녀들이 부모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괴로워하십니다.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주시며,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은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우리가 먼저 인정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영감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군중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기적을 경외할 것이며 기적의 이야기를 온 지방에 퍼뜨릴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히 효과를 바라고 인위적으로 행동하는 분이 아닙니다. 간단히 말해,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고통에 마음이 움직였고, 그녀를 위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과부에게 다가가 “울지 마라” (루카 7,13) 하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이렇게 얘기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네가 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나는 기쁨과 평화를 주기 위해 지상에 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권능의 징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기적보다 당신의 연민이 먼저였습니다. 이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성심이 따뜻하다는 명백한 징표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불의’에 빠져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 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 너는 그들을 쇠 지팡이로 쳐부수고 옹기장이 그릇처럼 바수리라.” (시편 2,8-9) 이것은 진정 강력한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해주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낮출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세상의 구원자가 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 아버지 하느님의 오른편에서 임금으로서 다스리십니다. 삶이란 끝나게 되어 있고, 그 삶이 끝나면 무엇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려주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것은 역사가 끝났을 때 악과 절망으로 마음이 굳어버린 모든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정복하실 수 있더라도 먼저 그들을 설득하실 것입니다. “자, 이제 임금들아, 깨달아라. 세상의 통치자들아, 징계를 받아들여라. 경외하며 주님을 섬기고 떨며 그분의 발에 입 맞추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분께서 노하시어 너희가 도중에 멸망하리니 자칫하면 그분의 진노가 타오르기 때문이다.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이들 모두!” (시편 2,10-12)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이시고 왕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이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 제이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죄의 용서가 선포됩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여러분이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될 수 없었지만,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 안에서 모든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됩니다. 그러니 예언서들에서 말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미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보아라, 너희 비웃는 자들아! 놀라다 망해 버려라. 내가 너희 시대에 한 가지 일을 하리라.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어도 너희가 도무지 믿지 못할 그런 일이다.’” (사도 13,32-33, 38-41)

이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이 곧 구원사업이며, 우리 영혼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나라이자 하느님 자비의 드러내심입니다.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이들 모두!” (시편 2,12)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을 선포해야 할 권리를 지닙니다. 비록 불의가 만연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나라를 염원하지 않지만, 악을 숨기고 있는 똑같은 인간 역사 안에서도 구원사업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