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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는 대중 언론를 주제로 하는 3 항이 있음.

우리는 오늘 미사에서 방금 요한 성인의 복음 말씀을 읽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치유의 기적을 베푸신 장면입니다.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에 우리 모두 다시 한번 감동받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불행을 무심하게 바라보지 못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려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특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엄존할 때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결코 무관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존경심을 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움츠러들 때, 다른 사람들의 양심을 무분별하고 무자비하게 침해할 수 있는 위험이 움튼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요한 9,1) 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자비를 이렇게 간단하게 묘사하는 성경 말씀에 저는 자주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딘가로 가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인간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분의 제자들이 보인 반응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요한 9,2)

충동적인 판단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조차 제자들과 똑같이 행동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첫 번째 충동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증거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 생각을 혼자만 하지도 않습니다. 자신들의 성급한 판단을 여기저기 퍼뜨립니다.

제자들의 행동을 그나마 호의적으로 보자면, ‘근시안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시종일관 그런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는 바리사이 같은 자들이 있는 법이니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리사이들을 얼마나 비난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하고 말한다.” (마태 11,18-19)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명성을 비방하는 조직적인 움직임에 고통받으셨습니다. 그분의 흠잡을 데 없는 행동을 중상하고 욕하며 상처 입히는 비난들이 쏟아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성적인 결함을 가졌고 개인적으로도 실수를 저지르지만, 자신의 그런 단점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스승으로 따르려 합니다. 그들이 지닌 인간적 나약함이란 워낙 흔하고 피할 수 없는 것들이지요.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마저도 예수님과 똑같이 비난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한계를 알고 있다고 해서 누군가의 명성을 해코지하는 죄와 불의가 용납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비록 그런 말을 지어내는 사람들은 그저 “이상한데”라고 큰 소리로 말하며 자신들의 행적을 지우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마태 10,25)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또한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마태 5,22)

이렇게 부당하게 남을 헐뜯는 태도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어떤 사람들은 마치 ‘시선을 왜곡하는 안경’을 쓰고 있는 듯합니다. 원론적으로 볼 때, 이런 사람들은 도덕적인 삶의 가능성을 거부하거나, 최소한 옳은 일을 하려는 끊임없는 노력들을 부정합니다.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은 미리 왜곡해버린 모습들로 얼룩져버립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가장 고귀하고 이타적인 행동들조차 단지 착하게 보이려고 꾸며낸 위선적인 작태에 불과한 것입니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이런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들은 선한 일을 확실히 찾아냈을 때 그 일을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그 선한 일 안에 숨겨진 결점을 반드시 찾아낼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서 말입니다.”

사생활의 권리 

예수님께서 눈먼 남자를 치료해주시는 장면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대답하십니다. 눈먼 남자의 불행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이 그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라고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놀랍도록 간단하게 눈먼 남자에게 빛을 되찾아 주시기로 결심하십니다.

그로 인해 불쌍한 남자에게 행복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고뇌도 함께 시작됐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이웃 사람들이, 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이들이” (요한 9,8) 그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복음서는 그들이 눈을 뜬 남자를 괴롭히면서 기뻐했다고까지는 전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까지 눈이 멀었던 그 남자는 자신이 이전에는 볼 수 없었으나 지금은 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눈을 뜬 남자가 새로 맞이한 행운을 평화롭게 즐기도록 놔두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를 바리사이들에게 데려갔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냐고 캐물었지요. 그러자 그 남자는 다시 한번 대답했습니다.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요한 9,15) 그러자 바리사이들은 그 남자에게 일어난 이 명백한 은총의 기적이 아예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라고 우기려 했습니다. 그러나 허사였지요. 그들 중 몇몇은 옹졸하고 위선적이며 비논리적인 주장을 폈습니다. 그 남자가 안식일에 치유되었다고 트집을 잡은 거죠. 안식일에 일하는 것은 율법에 위배된다면서 이 경이로운 사건을 부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바리사이들은 오늘날 우리가 진상조사라고 부를 법한 일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우선 눈먼 남자의 부모들에게 접근합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요한 9,20-21) 남자의 부모는 그들의 권위가 두려워서 있는 그대로의 내용만을 기술적으로 대답합니다. “이 아이는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이를 먹었으니 제 일은 스스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요한 9,20-21)

눈먼 남자의 부모를 조사한 바리사이들은 이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고요? 안 믿겠다고 작정을 했으니까요. “그리하여 바리사이들은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하고 말하였다.” (요한 9,20-21)

요한 성인의 기록을 보면, 부도덕한 자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전형적인 방법에 대해 단 몇 마디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존중받아야 할 기본적인 자연권을 훼손하는 방법 말입니다.

이런 식의 작태가 비단 과거에만 일어났던 일은 아니지요.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을 병적으로 파고드는 공격적인 호기심은 오늘날에도 여러 경우가 존재합니다. 현실에서 그 예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지요. 실제로 뭔가 잘못이 있다고 의심되는 경우에도, 아주 조금이라도 사생활이 침해되지 않도록 조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매우 주의 깊게, 절제해서 조사를 진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요구하는 것이 최소한의 정의입니다. ‘법에 어긋나지 않는 명확히 선한 행동’에 대해서 불건전한 호기심으로 이를 검증하려 들면 사건을 왜곡하게 됩니다. 이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선의(善意)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사람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사생활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모든 사람들의 존엄함을, 평화롭게 살아갈 그들의 권리를 지켜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모든 정직한 사람들은 이러한 권리 수호의 필요성에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가치가 위험해지기 때문입니다. 보편적인 가치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이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권리이며, 가족 안에서 희로애락을 누릴 권리입니다. 세상에 알리지 않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권리와, 순수한 사랑으로 가난한 이웃을 도울 수 있는 권리 역시 그런 보편적 가치에 포함됩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개인의 노력을 사방에 선전하지 않으며 이웃에 대한 봉사가 허용돼야 하는 것이지요. 분별없고 뒤틀린 자들의 눈에 우리의 내적 생활을 드러내지 않고도 그러한 봉사가 가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뒤틀린 시선을 가진 자들은 우리의 내적 생활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설령 관심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걸 빌미로 우리를 조롱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집요하게 남의 뒤를 캐는 자들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정말로 어렵습니다. 사람을 홀로 가만히 놔두지 않기 위해 고안된 방법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기술적인 방법뿐만 아니라, 제법 알려진 논쟁의 방식들까지 포함합니다. 너무 교묘해서 그에 대응하는 것만으로도 당사자의 명성이 위험에 빠지게 되는 그런 논쟁 말입니다. 그런 논쟁 중 흔한 방식을 예로 들자면, ‘모든 사람들은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한다’고 억지 추정을 하는 겁니다. 이런 그릇된 일련의 사고방식에 끌려가다 보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내 탓이요”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고 자기비판에 빠져들고 맙니다. 만약 우리가 먼저 자기비판을 하지 않는다면, 비난하는 자들은 지체 없이 나서서 우리가 교활한 악당일 뿐 아니라 위선적이고 거만하다고 떠들어댈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비난하는 과정이 다릅니다. 상대방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의도를 가진 작가나 호사가들이 여러분을 개인적으로는 올바른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은 올바른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며, 당신을 두고 도둑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자신이 도둑이 아님을 증명하겠습니까?” 아니면,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죠. “여러분은 언제나 여러분의 행동이 깨끗하고 고귀하며 올바르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여러분의 행동이 더럽지 않고, 삐뚤어지지도 않고, 비열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조사를 해봐도 되겠습니까?”

이런 예들은 제가 마음대로 뽑아낸 게 아닙니다. 누구나 제가 제시한 목록에 들어갈 수 있으며, 나름 유명한 단체나 기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려는 그릇된 사고들은 특별한 환경에서 생겨납니다. 특별한 환경이란, 다른 사람의 삶의 가장 은밀하고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 알아내고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어떤 특정 대상에게 주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 특정 대상이 대중이거나 미디어이거나, 그 명칭을 뭐라고 하든지 간에 말입니다.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얘기를 해드려도 될까요? 삼십 년 이상 저는 오푸스데이가 세속적이거나 정치적인 목적을 결코 추구하지 않는다고 얘기해왔고 또한 그렇게 글을 써왔습니다. 오푸스데이는 모든 민족과 모든 사회적 상황과 모든 나라들에서 그리스도 구원의 가르침을 더 잘 알리고, 더 잘 실천하는 일에만 오로지 매진해왔다고 수많은 방법을 통해 말해온 것입니다. 오푸스데이는 이 땅에 하느님의 사랑이 더 많아져서 같은 아버지의 자녀인 모든 사람들 사이에 더 많은 평화와 정의가 생겨나도록 헌신하길 바랄 뿐입니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오푸스데이의 지향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이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저희를 이해하시는 분들께는 더욱더 마음 깊이 다가가겠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맥락에서, 저희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분들도 더 존경하고 사랑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의 존엄함 역시 마땅히 존경받고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 또한 모두가 하느님 자녀가 되는 영광으로 부르심 받은 이들이니까요.

하지만 저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을 무시하는 소수의 편파적인 부류가 항상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푸스데이에 관해 우리가 자신들의 언어로 설명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의 말은 배타적으로 정치색을 띠며, 초자연적인 실재(實在)와는 무관하고, 오로지 권력 놀음과 압력 단체들에만 동조할 뿐입니다. 오류투성이고 왜곡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설명이 주어지지 않는 한, 그들은 여기 계신 여러분이 거짓되고 사악한 계획을 가졌다고 계속 주장할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제게 닥친다면 저는 슬퍼하지도, 걱정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한 말씀 더 드려야겠네요. 그들이 부정과 죄악을 범했고, 그 정도가 하늘에 대고 바로잡아 달라고 호소해야 할 지경인데도 제가 그 사실을 합법적으로 보아 넘길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웃을 일 아닌가요? 그런데 저는 도저히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습니다. 저는 솔직함으로 유명한 스페인의 한 지역 출신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저는 진심(眞心)을 존경합니다. 저는 속임수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에 대해 본능적으로 반대합니다. 저는 비난받을 때마다 교만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하려고 언제나 노력해왔습니다. 심지어 저를 헐뜯는 사람들이 난폭하고, 거만하며, 적대적이고,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보이지 않을 때조차 저는 최선을 다해 진실만을 얘기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