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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는 평화를 주제로 하는 5 항이 있음.

성탄이 가까워올 때마다 저는 아기 예수님의 상징물들을 즐겨 봅니다. 스스로 낮아지신 하느님을 나타내는 조각상과 그림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줍니다. 전지전능하신 그분께서는 우리가 알기 원하십니다. 당신이 완전히 무방비 상태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부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희생의 삶, 일을 하고 기쁨을 누리는 삶을 온전히 살아내도록 재촉하십니다.

우리가 실제로 예수님을 본받으려 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처럼 우리도 겸손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하느님의 위대하심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아십니까? 바로 구유 안입니다. 포대기 안입니다. 마구간 안입니다. 우리들이 구원사업의 협력자가 되도록 하는 힘은 오직 겸손을 통해서만 발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은 그만하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실감해야 합니다.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일지라도 개인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때때로 생기는데, 실제로 심각한 걱정을 낳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라는 것들은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스스로 오만해지고, 모든 이들의 중심에서 관심받고 싶어하며 자신을 좋아해주기를 바라는 욕망이 솟아나는데, 그런 사람들에게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항상 좋은 모습으로 보이길 원하고, 개인적으로 번듯하게 잘 되기를 바랍니다. 남몰래 실천하는 선행에 만족하지 못하다 보니, 영혼의 놀라운 평화와 엄청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만과 억측에 빠져 불행해지고 허망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겸손하셨습니다. 당신의 삶을 통틀어 그분은 어떤 배려나 특권을 좇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이신 그분은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성모님의 태중에서 9개월을 보내시는 것으로 지상의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의 자연스러운 탄생과정을 따르신 것입니다. 그분은 인류가 당신을 간절하게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고, 모든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오시기를 갈망하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기다리셨습니다. 다른 모든 아기들이 태어나는 것과 같은 과정을 거쳐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잉태에서 탄생에 이르기까지 성모님과 요셉 성인 그리고 엘리사벳 성인을 제외하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 경이로운 진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사시기 위해 오셨다는 놀라운 진실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참으로 소박하셨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위풍당당하게 세상에 오시지 않았고 아무도 그분에 대해 몰랐습니다. 지상에서는 오직 성모 마리아와 요셉만이 이 거룩한 사건에 함께했을 뿐입니다. 나중에 천사의 메시지를 들은 목동들이 왔고, 동방박사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하늘과 땅을, 하느님과 인간을 하나로 이어준 이 초자연적 사건의 유일한 증인들이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에 무감해질 만큼 우리의 가슴이 무딜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낮추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당신이 베푼 사랑에 우리가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권능뿐만 아니라 그분의 놀라운 겸손 앞에서 우리의 자유가 머리 숙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느님이신 이 아기의 위대함이란…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분의 아버지는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느님이신데, 정작 하느님의 아들은 “여관에 들어갈 자리에 없어서…” (루카 2,7) 구유에 누워계십니다. 모든 피조물의 주님께서 계실 곳이 어디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전례가 그렇듯이 오늘의 전례 역시 평화를 기념합니다. 성지(聖枝)는 그 유구한 상징성으로 볼 때 창세기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다시 그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냈다. 저녁때가 되어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땅에서 물이 빠진 것을 알게 되었다.” (창세 8,10-11) 오늘날 우리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확인되고 또한 굳건해졌음을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페 2,14) 이시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전례는 신약 안에서 구약이 경이롭게 일치되고 결합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례를 통해 기쁨의 말씀을 읽습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 어떻게 경배 받았는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히브리 아이들이 올리브 가지 손에 들고 주님을 맞으러 나가 외치는 환호소리 ‘하늘 높은 곳에 영광’”

예수님을 맞이하는 환호의 노래(歡呼頌)는 베들레헴에서 그분이 탄생하셨을 때 드렸던 환호송과 우리의 영혼 안에서 맞닿아 있습니다. 복음사가 루카 성인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아가실 때에 그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예수님께서 어느덧 올리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이르시자, 제자들의 무리가 다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 때문에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 (루카 19, 36-38)

땅에눈 평화 

하늘에는 평화… 하지만 우리는 땅을 보도록 합시다. 왜 이 세상에는 평화가 없을까요? 맞습니다. 정말 평화가 없습니다. 단지 ‘평화처럼 보이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두렵고 불안정한 상태의 타협으로 잠시 균형이 이뤄질 때 나타나는 겉치레식 평화만 존재할 뿐입니다. 심지어 교회에도 평화가 없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신부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의 흰 예복을 찢는 듯한 긴장이 교회 안에 가득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세속적 활동에 몰입함으로써 영혼의 불안을 감추려 합니다. 결코 그들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들로 얄팍한 만족을 얻고자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슬픈 뒷맛만을 남길 뿐입니다. 그런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는 평화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지(聖枝)는 경배를 상징합니다. 성지(聖枝)가 승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세상을 이기시는 순간에 와 계십니다. 십자가의 표징 아래서 그분은 죽음의 왕자인 악마에게 승리하시려는 순간에 와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이 승리자이신 까닭입니다. 싸우셨기 때문에 그분은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싸움은 인간의 마음속에 가득한 악마와 대결하는 힘겨운 투쟁이었습니다.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길’이십니다. 우리가 평화를 찾고자 한다면 그분의 발자국을 따라가야 합니다. 평화는 전쟁과 투쟁의 결과이며, 마음 깊은 곳에서 이뤄지는 수덕적(修德的) 투쟁의 결실입니다. ‘수덕적 투쟁’이란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무관한 자기 삶의 모든 것들과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한 교만과 육욕, 이기심과 천박함, 그리고 비열함을 이겨내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인간의 양심에, 그들 영혼의 중심에 평온이 없다면, 밖에서 외적인 평온을 요구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오기” (마태 15,19) 때문입니다.

어제와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의 전례는 우리가 이렇게 말하도록 합니다.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 들어가신다.” 스스로의 이기심으로 가득 찬 요새(要塞)에 자기 자신을 가둬버린 사람은 누구라도 이 전쟁터에 나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쌓은 요새의 문을 들어 올려 평화의 임금을 들어오시게 한다면, 그분과 함께 요새 밖으로 나와 전투에 나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전투는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고 양심을 마비시키는 온갖 고뇌와의 싸움입니다.

“머리를 들어라. 오래된 문들아.” 그리스도교가 우리에게 투쟁을 요구한다는 사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항상 그렇게 요구해왔습니다. 만약 우리가 싸우지 않는다면 이길 수 없을 것이고, 이기지 못한다면 평화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가 없다면 인간의 기쁨이란 환상에 지나지 않고, 거짓이며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러한 헛된 기쁨은 결코 인간에 대한 봉사나, 사랑과 정의, 용서와 자비의 실천으로 변화되지 않으며, 하느님을 섬길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지도 못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팎에서 지위가 높든 낮든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분투를 포기해온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스스로의 나약함과 맞서 싸우는 개인적인 투쟁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투쟁을 포기하고 나서 영혼을 타락시키는 노예 상태에 투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항상 직면하는 위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께 모든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겨 달라고 끊임없이 간구해야 합니다. 이 주제에 관해 얘기하면서 저는 하느님의 정의(正義)에 관해 말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저는 그분의 자비와 연민에 호소합니다. 우리의 죄를 보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공로와 우리 어머니이기도 하신 거룩하신 성모님의 공로, 그리고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신 요셉 성인의 공로와 성인들의 공로를 보아달라고 말입니다.

오늘 미사의 독서에서 읽은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투쟁하기를 원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오른손으로 그를 붙잡아 주시리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마태 11,12) 이 폭력은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의 연약함과 비참함에 대항해 싸우기 위해 쓰는 폭력입니다. 이는 곧 여러분이 스스로의 불성실을 드러내게 하는 용기이며, 적대적인 상황에서도 신앙을 고백하는 대담함입니다.

예전과 다름없이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에게 ‘영웅적 행동’을 기대합니다. 물론 필요하다면 대단한 투쟁의 영웅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영웅적인 행동은 매일매일의 작은 전투에서 이뤄집니다. 겉으로 보기에 사소한 일들에서 사랑을 무기 삼아 끊임없는 투쟁을 이어갈 때 주님께서는 애정 가득한 목자로 항상 여러분의 곁에 계실 것입니다.: “내가 몸소 내 양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뉘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도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들은 제 땅 안에서 평안히 지내게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의 멍에를 부수고, 그들을 종으로 부리는 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해 내면, 그제야 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에제 34,15-16, 27)

앞에서 우리는 나인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물론 다른 예들도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장면들로 넘쳐나니까요. 각각의 사건들마다 벗이 아파할 때 함께 고통받는 한 인간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우리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된 교회는 상처 입으신 성심으로부터 태어났다네.” 활짝 열린 이 예수 성심으로부터 생명이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비록 잠시 지나치는 생각일지라도 여기서 우리는 성사(聖事)들을 떠올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성사들을 통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힘을 우리가 더불어 나누도록 해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체성사를 떠올릴 때마다 어떻게 특별히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성체성사는 갈바리아산의 거룩한 희생이며, 동시에 그 거룩한 희생이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 안에서 피 흘리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의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힘을 얻었고, 그 힘이 우리 영혼을 가득 채우며, 우리의 모든 활동과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방식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스도의 성심은 곧 그리스도인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를 내어놓을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러한 ‘자기 증여’의 원천은 단순히 우리들 자신의 열망이나 노력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열망과 노력은 수시로 흔들리고 허약하니까요. 자신을 내어주는 삶은 우리에게 주신 은총으로부터 힘을 얻습니다. 그 은총은 인간을 만드신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마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내적 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결코 낙담하거나 의기소침해선 안 됩니다. 저는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일상 삶에서, 가장 소박한 생활의 구석구석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지 생각해달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지해 살아가는 인간 행동의 본질이 바로 그 물음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신학적 미덕들을 실천해가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은 기쁨과 힘과 평화를 찾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의 결실입니다. 그분의 성심이 우리에게 주신 평화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해봅시다.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거룩한 신비입니다. 성부와 성령을 향한 성자의 사랑 또한 불가해합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를 이어주는 사랑의 끈이신 성령께서는 말씀 안에서 인간의 마음과 만나시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이런 핵심적 요소들을 얘기할 때면, 우리들 사고(思考)의 한계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계시(啓示)의 위대함을 함께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성을 한참 넘어서는 이러한 진리를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겸허하고 확고하게 이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증거들을 통해 진리임을 압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마음 깊이 계신 사랑이 인간에게 내리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 성심 안에 계신 사랑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심 안에서 살아가는 것, 그분과 친밀하게 하나가 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하느님이 머무시는 거처’가 됨을 의미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요한 14,21) 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자 그리스도와 성부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 영혼에 오셔서 그곳에 당신들의 집을 만드셨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이상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본다면 우리의 모든 태도는 바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갈망하게 되고, 시편의 말씀이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립니다.”(시편 63,2) 우리 마음속에서 이런 공허함을 일으키셨던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목마른 사람들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요한 7,37)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의 성심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마음으로부터 안식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초대를 받아들인다면 그분의 말씀이 진실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더욱 커질 것이고, 참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에 머무르셔서 그분의 빛과 온기를 우리로부터 결코 거둬가시지 않도록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루카 12,49)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불길에 다가갔습니다. 그 불길로 우리의 삶을 온전히 태우도록 합시다. 하느님 사랑의 불길을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림으로써 그 거룩한 불을 온 세상에 퍼뜨리겠다는 열망을 키워갑시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거룩한 불길을 가르쳐준 사람들 역시 하느님의 평화를 체험하고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심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명확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왔을 때 절정에 이를 그분의 평화를 사회와 교회에,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영혼 안에 심는 것입니다.

성모님, 당신은 평화의 모후이십니다. 당신께서는 깊은 신앙으로 천사가 알려준 주님 잉태의 예언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믿으셨습니다. 그러니 성모님, 우리가 신앙 안에서 성장하게 도우소서. 굳건한 희망과 더욱 깊은 사랑을 갖도록 도와주소서. 바로 그것이 오늘날 당신의 아드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이며, 그분의 성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