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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는 진보를 주제로 하는 2 항이 있음.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원천이신 예수님 

저는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몇 가지 특징을 여러분과 함께 간단히 되새기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히브 13,8)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살아 계신다는 사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모든 생활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역사의 과정들을 짚어보면 발전과 진보를 깨닫게 됩니다. 과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힘을 더욱 잘 알게 해주었습니다. 오늘날의 기술은 과거보다 훨씬 더 세상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기술은 문화와 화합, 그리고 물질적 복지의 측면에서 인간이 꿈꿔온 것보다 더욱 위대한 수준에 이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여전히 불의와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때로는 그 정도가 과거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점을 들어 이러한 낙관론에 반기를 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옳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런 생각들을 넘어서 무엇보다 저는 이렇게 기억하고 싶습니다. 종교적 범주에서 보면,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며 하느님은 여전히 하느님이시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진보는 이미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 정점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십니다.” (레위 21,6)

영적 생활에 있어서 더 이상 새로운 시대는 없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항상 살아 계시고 우리와 함께 머무르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을 통해 그분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의 삶이 우리의 삶 안에서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Ipse Christus)으로 보일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삶에서 그분의 삶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밀과 가라지 

저는 여러분께 제 생각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이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설명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실천하기 힘들지만 숭고하고 매력적이란 사실을 여러분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사회에서 그렇게 사는 게 가능할까요?”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얘기하지만 사실은 평화가 존재하지 않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영혼의 평화이건, 제도적인 평화이건 또는 사회생활이나 국가 간의 평화이건 간에 실제로는 평화가 없을 때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과 민주주의에 관해 얘기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위에서 보는 것은 폐쇄적이고 밀폐된 계급사회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이해’를 갈망할 때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해는 그 부재(不在)에 의해서만 두드러집니다. 착한 믿음으로 행동하고 관대해지려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그렇습니다. 사랑이란 그것을 베푸는 것보다 이해하는 것이 먼저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광신자와 비타협주의자들이 오히려 자신들이 저지른 폭력과 공격의 희생자들을 비난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경청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일치를 호소하는 수많은 얘기들을 들을 수 있는 시기에 마침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도 더 이상의 큰 분열을 상상할 수 없는 시기에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저는 정치적인 발언을 하지 않습니다. 정치는 제 소관이 아닙니다. 제가 사제로서 세계가 처한 현재의 시대 상황을 설명한다면, 우리 주님이 드신 예화 중 하나인 밀과 가라지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는 말씀만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마태 13,24-25) 상황은 명확합니다. 밭은 비옥하고 씨앗은 좋았습니다. 밭을 가꾸시는 주님은 제때에 능숙하게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파수꾼까지 두시고 밭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만약 그 이후에 밀 사이에 가라지가 발견되었다면, 그 이유는 파수꾼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파수꾼들이,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잠이 들어 버려서 원수가 밭에 가까이 올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부주의한 종들이 주님의 밭에 왜 가라지가 자랐는지 주님께 물어보자, 예수님의 설명은 명확했습니다.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마태 13,28)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주께서 이 세상에 주신 좋은 것들이 진리와 선함의 도움으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보호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잠들어 버렸습니다. 그동안 원수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방해받지 않고 가라지를 뿌리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나태함은 참으로 슬픈 것입니다. 여러분은 도처에 가라지들이 얼마나 가득 자랐는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받은 성소는 결코 불행을 예언하는 일이 아닙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다고 해서 여러분이 처한 현실을 절망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주님의 섭리가 우리에게 배정하신 이 시대에 대해서 불평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인 이 시대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각자의 성화(聖化)를 이루도록 부르심을 받은 시기가 바로 이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순진한 갈망들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더 나아진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교회가 시작될 때부터, 열두 제자들이 여전히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었던 교회의 태동기부터 폭력적인 박해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최초의 이단이 생겨났고, 거짓이 만연하고 증오가 넘쳐났습니다.

악이 번성하는 듯이 보이는 것을 여전히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하느님의 밭에 가라지가 가득 자라났습니다. 하느님의 밭은 바로 이 땅이며 이 땅은 곧 그리스도의 유산입니다. 그곳에 가라지들이 자라났을 뿐만 아니라, 아예 밭에 가득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지속적이고 멈출 수 없는 진보’라고 하는 신화에 속을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진보란 좋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진보가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매우 다른 종류의 진보를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진보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 진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보의 어떤 움직임 안에서 인류가 퇴보하고 있으며 그동안 얻어온 기반들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을 우리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영혼과 마음이 완전히 깨어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우리는 비관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냉혹한 양심을 가진 사람만이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에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믿을 수 있습니다. 악은 하느님을 거역하며 때로는 영혼에 돌이킬 수 없는 해를 입히는데도 말입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의 양심은 경솔하고 상투적이며, 무뎌진 마음가짐 때문에 무감각해져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낙관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낙관주의는 우리의 신앙으로부터 온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패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권능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낙관주의는 만족을 지향하는 어떠한 인간적 감각으로부터도 오지 않았으며, 어리석고 주제 넘는 자기만족으로부터도 온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