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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기쁨 → 낙관주의와 희망 항이 있음.

‘주님 승천 대축일’은 또 하나의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이 세상에서 맡겨진 과업을 수행하도록 우리를 격려해주시는 그리스도께서 천국에서도 똑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사랑하는 지상에서의 삶이 결코 마지막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사실 땅 위에는 우리를 위한 영원한 도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올 도성을 찾고 있습니다.” (히브 13,14) 그곳은 우리가 영원히 살아갈 불변(不變)의 집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편협하게 제한해서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승에서의 우리의 삶이 불행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우리가 오로지 다음 생에서의 보상을 기다리는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승에서도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오직 하느님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완전히 다른 행복에 대한 열망으로 우리가 행복하기를 소원하십니다.

이승의 삶에서 이뤄지는 초자연적인 현실의 묵상, 우리 영혼 안에 깃드신 은총의 활동,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불러오는 이웃에 대한 사랑, 이 모든 것들이 이미 천국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성장해가도록 운명 지어진 ‘출발’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의 삶과, 천국에서의 삶, 이 두 가지 삶을 살아가는 일로부터 결코 물러설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나로 모아지는 강력하면서도 단순한 일치를 이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필리 3,20) 인 동시에 완벽하게 이 땅의 시민입니다. 땅의 시민은 고난과 불의와 몰이해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이란 진실을 깨달음으로써 기쁨과 평화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꿋꿋하게 우리 하느님을 섬깁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인류를 구원하는 그리스도인의 군대가 수적으로, 또한 신심 면에서 불어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관상(觀想)하는 영혼이 됩시다. 그래서 하루를 시작하는 첫 생각부터 마지막 생각까지 언제나 쉬지 않고 우리 하느님과 끊임없이 대화합시다. 우리의 마음이 항상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합시다. 우리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께 나아갑시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아버지와 성령께 다가갑시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승천이 우리 영혼에 어떤 슬픔을 남겨 준다면,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분의 어머니께 가도록 합시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 (사도 1,12-14)

그리스도인의 낙관주의 

그렇게 사는 것은 너무 좋은 일이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이 아닐까? 가끔은 이런 생각에 빠져듭니다. 저는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을 새롭게 하는 일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차분히 생각하세요. 하느님의 경이로움을 통해 우리의 모든 갈망이 이루어지리라는 명백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희망의 미덕에 우리가 진정으로 의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기적들에 무덤덤해지지 맙시다. 특히 우리 주님께서 매일 사제의 손으로 내려오신다는 놀라운 사실에 둔감해지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 깨어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의 권능을 확신하고 당신의 약속을 다시 한번 들을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마르 1,17) 여러분은 많은 영혼들을 하느님께 인도할 쓰임새 큰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신뢰해야 합니다. 배에 올라타 노를 젓고 닻을 올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유산으로 주신 이 세상이라는 바다를 향해 나서야 합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루카 5,4)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사도적 열정이 거짓된 겸손으로 인해 약화되거나 사라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개인적인 실패 때문에 엄청난 중압감을 경험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실수를 충분히 감안하고 계십니다. 자비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시며, 우리가 온갖 한계와 나약함과 불완전함을 지닌 피조물임을 알고 계십니다. 또한 죄에 이끌리는 존재들임을 아십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분투하라고 하십니다. 스스로의 나약함을 알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회개하고 더 나아지겠다는 열망을 굳세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단지 주님의 도구일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1코린 3, 5-6) 이 가르침에서 우리가 반드시 서로 새겨야 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한없는 효용성’이란 우리들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세상을 구하기로 결심하신 분은 바로 하느님 당신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신앙을 가져야 하고, 또한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인간적 계산에 의해서도 결코 멈춰선 안 됩니다.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이겨내기 위해 주님이 주신 과업에 우리 스스로를 투신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노력이 새로운 길을 열어갈 것입니다. 하느님께 헌신하는 우리들 각자의 거룩함이야말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단 하나의 해결책입니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려운 일이라고 여러분은 얘기할 겁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이상적인 것은 항상 수준이 높은 법이니까요. 하지만 딱히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플 때 딱 들어맞는 약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일의 경우엔 그렇지 않습니다. 특효약이 항상 있는 법입니다. 그 특효약은 바로 거룩한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당신이 제정하신 다른 성사들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말과 행동으로 다시 말해봅시다. “주님,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만나는 당신의 섭리와 매일 주시는 당신의 도움이 제가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엄청난 기적을 일으켜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키워달라고 부탁해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을 밝혀주시고 우리의 의지를 굳세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무르십니다. 바로 그분께서 항상 계시는 것입니다.

제가 강론을 시작한 이후로 항상 신자들께 주의를 드린 것이 있습니다. 거룩함에 대한 잘못된 느낌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실제로 알게 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맞습니다. 여러분은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이나 저나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거룩하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영원무궁하신 분의 거룩한 부르심으로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에페 1,4) 우리는 특별히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들 개개인의 엄청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느님의 도구들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나약함을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쓰임새가 큰 주님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닥쳐오는 유혹들은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알게 해주는 척도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생생하게 체험했기 때문에 낙담한다면, 그 순간이야말로 온전히, 그리고 순명하며 하느님 손길에 스스로를 내어드릴 때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을 만나 자선을 청했던 어떤 걸인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걸인 앞에 멈춰 서서 그에게 다섯 도시의 지배권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걸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뒷걸음질 쳤습니다. 그리고 소릴 질렀죠. “저는 그렇게 어마어마한 것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대왕이 대답했습니다. “너는 꼭 너답게 내게 청했고, 나는 꼭 나답게 네게 주는 것이다.”

우리들 자신의 한계를 명확하게 깨닫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당신의 생명을 우리가 더불어 나눌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뒤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 편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실하고, 또한 충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직시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이해하고 우리들 자신의 잘못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사랑과 자극을 예수님 안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여러분과 나 그리고 우리 모두가 느끼는 좌절감마저도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는 하나의 기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허약함을 인정합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권능에 고백합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희망과 기쁨,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도구로 쓰길 원하신다는 강한 확신으로 일관돼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교회의 한 부분으로 여긴다면, 그리고 베드로라는 반석과 성령의 활동으로 우리 자신을 지탱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살아가는 모든 순간의 작은 의무들을 완수하고야 말겠다고 결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조금씩 씨를 뿌리면 우리의 곡식 창고는 넘쳐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 

교회가 우리에게 제시한 주제를 다시 봅시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육신과 영혼이 함께 천국에 가셨고 천사들이 기뻐합니다. 천상 낙원에서 성모님을 기다리셨던 그분의 가장 순결한 배필 요셉 성인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지 저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남은 우리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요? 바로 여기 현실의 삶에서 우리는 모두 순례자요, 여행자라고 우리의 신앙은 말해줍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몫은 희생과 고통, 가난 중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내딛는 발걸음은 기쁨의 율조로 새겨져야 합니다.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시편 100, 2) 주님을 섬기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2코린 9,7) ‘기쁘게 주는 이’란 온 마음을 다해 희생하며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낙담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런 낙관주의가 도에 지나치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단점과 실패들에 익숙해 있지 않나요? 고통과 권태, 배은망덕, 그리고 심지어 증오조차도 우리에겐 낯설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존재들이라면, 우리 인간의 본성에 항상 따라붙는 이 고통의 동반자들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끈질기게 마주치는 고통과 좌절, 슬픔과 고독을 그냥 무시해버리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순진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너무도 확실하게 가르쳐줍니다. 삶의 이러한 수긍할 수 없는 일면들이 결코 눈먼 운명 때문이 아니며, 하느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의 운명은 행복에 대한 열망을 스스로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은, 우리 주위와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하느님의 뜻하심이 깃들어 있으며, 그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초대를 담고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물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이러한 초자연적인 이해가 인간 삶의 복잡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초자연적 이해는 오히려 인간 삶의 이런 복잡성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찰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또한 유쾌하지 못한 삶의 표면(表面)을 넘어서면 절대로 파괴되지 않는 강한 유대(紐帶)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해줍니다. ‘파괴되지 않는 강한 유대’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천국에서 누릴 최종적인 삶이 서로 굳게 이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은 이 기쁨에 찬 희망의 근거를 우리가 인정하도록 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순례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머니가 우리보다 앞서가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신 그곳에서 우리들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말해주십니다. 우리가 성실하다면 우리는 천국의 집에 도달할 것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우리의 본보기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당신이 우리 어머니이심을 보여주세요” 하고 그분께 간청한다면, 성모님께서는 어머니의 돌보심으로 당신 자녀들을 보살펴주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