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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하느님의 사랑 → 하느님의 사랑과 응답 항이 있음.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일상 활동을 잘 살펴보고 우리가 선포하는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임하도록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주간은 일종의 ‘종교적 막간(幕間)’이 될 수 없습니다. 삶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온 시간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삶이란 인간사(人間事)에 철저히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성주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심오하게 이해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언행(言行)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랑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특별한 조건을 내거십니다. 우리는 루카 성인이 우리를 위해 기록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6) 이것은 매우 어려운 말씀입니다. 사실, 영어의 ‘미워하다(hate)’라는 단어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매우 강하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 문구의 논조를 약화시키기 위해 ‘미워하다’를 “덜 사랑한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처럼 “덜 사랑한다”는 뜻을 표현하시려고 한 게 아니었습니다. ‘미워하다’처럼 강력한 말이 지닌 힘은 그 단어가 가진 부정적이고 냉정한 의미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 예수님은,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바로 그분이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어놓으신 그분인 까닭입니다.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에 관한 한, 우리가 결코 미온적이어선 안된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참뜻입니다. 이기적이거나 부분적인 사랑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더 사랑하라, 더 잘 사랑하라.”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우리 자신의 영혼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곧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바입니다. 만약 우리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래서 우리의 유일한 관심이 우리들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뿐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심지어 이 세상 전체를 미소하기 짝이 없는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하려 든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여길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뿐 아니라 행동과 진심으로 우리 자신을 실제로 봉헌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하고 그 어깨 위로 인류의 무게를 느끼도록 해주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가 일하고 생활하는 모든 환경에서 하느님이 뜻하시는 명확하고도 사랑 넘치는 계획을 실현하게끔 이끕니다. 우리가 방금 읽은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계속 얘기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7)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가르치고 요구하는 대로 우리의 모든 삶을 바로 세우도록 굳게 다짐합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투쟁과 괴로움과 아픔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신앙을 지켜나간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슬픔의 한가운데서도, 심지어 온갖 모략이 난무하는 한복판일지라도,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우리의 초자연적인 기쁨을 그들이 함께 나누도록 도와주는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만 더 깊이 생각해보고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그리스도 자신’이 됨으로써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현존(現存)을 보여줄 때, 그것은 단순히 사려 깊고 사랑 넘치는 사람이 된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이는 더 나아가 자신의 인간적인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널리 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삶을 이러한 사랑의 계시(啓示)로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제자 중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요한 14,9). 요한 성인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으니 그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라는 얘기를 할 때에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인용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요한 4,7-11)

하느님 사랑 안에서 어린이가 되는 것… 

‘하느님 사랑 안에서 어린이가 되는 것’이란 주제에 관해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매우 중요한 사실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모님의 신비는 하느님께 다가가려면 우리가 작아져야만 한다는 진실을 깨닫도록 도와줍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태 18,3)

어린이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오만한 마음을 버려야 하고,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아집을 버려야만 합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길을 찾아 그 길을 계속 가기 위해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영적 어린이가 되기 위해 여러분은 어린아이들이 그렇듯 자기 자신을 포기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믿는 것처럼 믿어야 하며, 어린아이들이 애원하듯이 하느님께 애원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성모 마리아와의 만남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성모님께 대한 공경은 그저 부드럽고 감상적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 공경은 우리 영혼을 위로와 기쁨으로 채워줍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희망을 주님께 두도록 해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으로 큰 위안과 기쁨을 얻게 되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곧 성모 공경을 의미할 정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시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 길로 나를 이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23,1-4)

마리아는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 대한 공경은 우리가 영적으로 그분의 진정한 자녀가 되도록 가르쳐줍니다. 성모님이 가르쳐 주시는 첫 번째 방법은 아무런 조건 없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참으로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복잡한 문제들로부터 벗어나야 하는데, 복잡한 문제들은 항상 자기 자신만을 이기적으로 생각할 때 발생합니다. 세 번째는 그 무엇도 우리의 희망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진실을 깨달음으로써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충만해진 여러분 자신을 만나게 되는 길… 그 길의 시작은 성모님께 대한 신뢰 가득한 사랑입니다.” 몇 해 전에 저는 묵주기도에 관해서 쓴 소책자의 서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이 말의 진실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저는 이 생각을 여기서 결론짓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여러분 스스로 이 말의 진실을 발견하도록 초대합니다. 성모 마리아께 대한 여러분의 사랑을 내보이고, 그분을 향해 여러분의 마음을 활짝 열고, 여러분의 기쁨과 슬픔을 성모님께 털어놓으며, 여러분이 스스로 깨달아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그분께 간청함으로써 말입니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물어보겠죠. 그리스도에 대한 이 깨달음을 어떻게 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하고요. 그러면 저는 아주 자연스럽고 간단하게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세상 안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직업 생활에 종사하고 가족을 돌보십시오. 그리고 인간의 고귀한 관심사들을 더불어 나누십시오. 또한 모든 사람들의 정당한 자유를 존중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됩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열망을 제 마음에 심어주셨습니다. 어떤 상황, 어떤 여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건 간에 누구나 그들의 일상적인 삶이 거룩하게 될 수 있으며 하느님으로 충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도우려는 열망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매일매일의 일상적인 일들을 거룩하게 만들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성은 바로 일상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삶을 묵상하면서 이러한 진리를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성모님께서 당신 삶의 거의 모든 날들을 당시의 보통 여인들과 똑같이 사셨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됩니다. 가족을 돌보고 자녀들을 키우며 집안일을 하는 평범한 여인들처럼요. 성모님께서는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상의 모든 일들을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일상적인 일들이 중요하지 않고 의미도 없다고 잘못 생각합니다. 매일매일의 노동,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 이웃을 돌보는 일, 친구와 친척들을 방문하는 것 같은 일들을 하찮게 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일상의 일들이야말로 얼마나 복된 것인지요!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일상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삶을 한 마디로 설명해주는 것, 그것은 바로 그분의 사랑입니다. 완전한 사랑, 그 사랑은 너무도 완벽해서 성모님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성의껏 수행하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의 아주 작은 행동조차도 결코 상투적이거나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우리 어머니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모범이자 길이십니다. 우리는 성모님 같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상의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단순하면서도 평범한 삶의 모범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인간 조건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온갖 한계와 결점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흔들림 없는 삶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게 사는 우리가 자신들과 같은 일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물을 것입니다. ‘뭐가 그렇게 행복해? 이기심과 편히 살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도덕적으로 살며 타인에게 봉사하기 위해 헌신하도록 누가 당신에게 가르쳐준 거야?’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교인의 거룩한 존재적 비밀을 그들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성령, 그리고 성모님에 관해 그들에게 얘기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영혼에 쏟아부어주신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려주기 위해 우리의 초라한 언어를 사용할 때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심 안에서 살아가는 것, 그분과 친밀하게 하나가 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하느님이 머무시는 거처’가 됨을 의미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요한 14,21) 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자 그리스도와 성부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 영혼에 오셔서 그곳에 당신들의 집을 만드셨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이상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본다면 우리의 모든 태도는 바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갈망하게 되고, 시편의 말씀이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립니다.”(시편 63,2) 우리 마음속에서 이런 공허함을 일으키셨던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목마른 사람들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요한 7,37)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의 성심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마음으로부터 안식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초대를 받아들인다면 그분의 말씀이 진실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더욱 커질 것이고, 참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에 머무르셔서 그분의 빛과 온기를 우리로부터 결코 거둬가시지 않도록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루카 12,49)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불길에 다가갔습니다. 그 불길로 우리의 삶을 온전히 태우도록 합시다. 하느님 사랑의 불길을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림으로써 그 거룩한 불을 온 세상에 퍼뜨리겠다는 열망을 키워갑시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거룩한 불길을 가르쳐준 사람들 역시 하느님의 평화를 체험하고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심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명확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왔을 때 절정에 이를 그분의 평화를 사회와 교회에,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영혼 안에 심는 것입니다.

성모님, 당신은 평화의 모후이십니다. 당신께서는 깊은 신앙으로 천사가 알려준 주님 잉태의 예언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믿으셨습니다. 그러니 성모님, 우리가 신앙 안에서 성장하게 도우소서. 굳건한 희망과 더욱 깊은 사랑을 갖도록 도와주소서. 바로 그것이 오늘날 당신의 아드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이며, 그분의 성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