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 목록

5«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사도직 → 인류의 성화를 위해 협력하다 항이 있음.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이었던”(1코린 1,23) 그 치욕과 영광 속에서 구원은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하느님께서 뜻하신 바에 따라 우리 주님의 시간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 산다면 우리도 그분처럼 모든 죄인을 구하기 위해 파견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날마다 더욱더 하느님의 자비에 기대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구원의 협력자가 되어 살아가겠다는 강렬한 열망을 품어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 모든 영혼을 구원하겠다는 열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 (Ipse Christus)이고, 또한 그렇게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1티모 2,6)

위대한 사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소극적일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루카 19,13)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왕국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 다시 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긴장을 풀 여유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은 교회에서 공식적인 직책을 가진 구성원들에게만 주어진 과업이 아닙니다. 물론 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거룩한 힘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바오로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1코린 12,27) 그러면서 그는 특별한 계명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해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지난 세월 동안에도 많은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이전 세대의 성취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공정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싶겠지만 말이죠. 우리는 지난 2천 년간 큰일들을 많이 해냈습니다. 그 가운데는 매우 큰 성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경우에는 실수들도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교회가 설 자리를 잃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처럼 교회의 기반이 손상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면에선 겁 많고 소심한 태도들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동시에 용기와 관대함이 넘쳐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상 황이 어떻든 간에 인류는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각각의 세대마다 하느님 자녀로서 자신들이 받은 소명의 위대함을 깨닫도록 도와주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을 수행하도록 가르치기 위해 계속 절실히 노력해야 합니다.

평화와 기쁨의 씨앗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는 이미 여러분께 사회적 또는 정치적 위기라든지 문화적 쇠퇴나 혼란에 관해 말씀드리지 않겠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악(惡)의 정확한 의미는 ‘하느님께 대항하는 공격’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도직은 어떤 정치적 프로그램이나 문화적 대안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도직은 선함의 확산을 의미합니다.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다른 사람들을 감염시키고, 평화와 기쁨의 씨를 뿌리는 일을 뜻합니다. 이러한 사도직 활동은 의심할 여지없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영적 이익을 가져올 것입니다. 더 많은 정의와 더 많은 이해,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더 큰 상호 존중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데에 우리가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겐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끌어갈 의무가 있으며, 각자 성인이 돼야 할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에겐, 하느님께 결코 등을 돌리지 않으며, 그리스도인이 진리를 전하는 본보기이자 원천이 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의 사도직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제가 이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사랑의 특징은 베푸는 것보다 이해하는 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해받지 못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제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배웠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항상 제 자신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이해하지 않으려고 작정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모든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위한 또 하나의 이유를, 매우 실질적인 이유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더 크고 보편적이며 가톨릭적인 마음을 가지라고 우리를 재촉하는 그런 이유는 아닙니다. 우리가 반드시 보여줘야 하는 이해는 하느님의 착한 자녀로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추구되는 모든 진실한 일들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가라지가 아닌 형제애와 용서,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선한 씨앗을 뿌리기를 원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니 여러분 스스로 누군가의 적(敵-원수)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자신의 삶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열망을 기꺼이 희생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편 갈라 나누거나, 서로 구분하거나, 무슨 상품이나 곤충표본처럼 사람들에게 꼬리표를 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분리할 여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의 삶은 형편없이 이기적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 합니다. (참조 1코린 9,22)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의 행동을, 관대함이라는 선한 씨앗과 이해와 평화를 위한 열망으로 흠뻑 적시는 방법을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정당한 독립성을 장려하게 될 것입니다. 세속의 문제들에 있어서 각자에게 부여된 과제들에 대해 스스로의 책임을 떠맡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저마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우선적으로 보호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자유 또한 지키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스스로의 약점을 갖고 있고 실수를 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또한 하느님의 은총과 스스로의 인간적 고결함으로 다른 사람들이 악을 이기도록, 가라지를 제거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서,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존엄함에 따라 살아가도록 서로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 

우리 모두 살아가면서 숱한 상황들과 마주합니다. 그 상황이란 개인적 생존의 여건일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역사의 엄청난 기로일 때도 있지요. 저는 삶의 그런 모든 상황들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수많은 부르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진실을 마주 보게 하기 위한 부르심 말입니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기회라고 여깁니다. 당신의 은총으로 굳세어진 우리의 행동과 말을 통해 우리가 속해 있는 그분, 성령을 선포하는 기회인 것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세대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구원하고 거룩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이해하고 똑같이 함께 나눠야 합니다. 우리는 말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으로부터 오는 값진 보물의 영원한 솟구침에 화답하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이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구하면서도 항상 새로운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복음 선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속해 있고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세상을 향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인간 존재와 운명에 관해 가르치는 것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관해 대다수 사람들이 무관심한 것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우리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세속의 일들에만 관심이 있으며 천국을 우러러보는 것을 아예 잊어버렸다고 여긴다면, 그 역시 사실과 다릅니다. 물론 편협한 이념들과, 그런 이념들을 견지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차고 넘친다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대에 엄청난 욕망과 비도덕적인 태도, 영웅주의와 비겁함, 열성과 환멸을 동시에 발견합니다. 더 정의롭고 인간적인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아마도 젊은 시절에 이상주의가 좌절됨으로 인해서 용기를 잃어버린 듯한 사람들을 동시에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용기를 잃은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하거나 아니면 스스로의 좌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이기주의에 갇혀 자신을 숨기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사람들 이끌기 

하지만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음 대신에 올곧은 영(靈)의 의지를 네게 주겠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조건 없이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인간의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따로 함께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제 부모와 친구들을 사랑하는 똑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성자 그리스도와 성부와 성령, 그리고 성모님을 사랑합니다. 그런 사랑을 아무리 반복해도 저는 질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면 결코 거룩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진실하게 이 세상에서 우리가 체험한 사랑이라면, 그런 인간의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는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1코린 15,28)” 때, 우리가 천국에서 나누게 될 사랑을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나날이 인정 많고 관대하며 헌신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을 반드시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배운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참으로 단순하게, 조금의 자만심도 없이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더불어 나눌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사회에서 직장 일을 하면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여러분의 직업을 진실한 봉사로 바꿔놓을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가능한 모든 기술적, 문화적 이점을 활용해 여러분이 하는 일이 잘 돼야 합니다. 그러면서 항상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기심이 아닌 관대함이 동기가 되고,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닌 모두의 복지를 지향한다면,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삶의 느낌으로 충만해져서 일을 한다면, 여러분이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고 인류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을 통해서, 인간관계의 모든 네트워크를 통해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내보여야 합니다. 또한 친교와 이해, 인간적인 애정과 평화를 위한 노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팔레스티나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신” (사도 10,38)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의 가족관계와 시민사회, 그리고 직장에서, 또한 여러분의 문화와 여가활동 중에서 ‘평화’를 전파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의 왕국이 여러분 마음에 이르렀다는 최고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성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1요한 3,14)

하지만 ‘예수 성심’이라고 하는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성심을 꼼꼼히 바라보고 묵상할 때에만, 우리의 마음이 증오와 무관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사가 루카 성인이 예수님께서 나인 고을에 가셨을 때를 묘사한 장면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은 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치십니다. 그분은 그냥 지나쳐 가시거나 사람들이 당신을 부를 때까지 기다리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먼저 과부에게 가셨습니다. 과부의 슬픔에 마음이 움직이신 것입니다. 과부는 이제 막 자신의 모든 것인 아들을 잃었습니다.

루카 성인은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였다고 설명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라자로가 죽었던 때와 같은 기색을 보이셨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사랑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결코 무감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어린 자녀들이 부모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괴로워하십니다.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주시며,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은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우리가 먼저 인정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영감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군중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기적을 경외할 것이며 기적의 이야기를 온 지방에 퍼뜨릴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히 효과를 바라고 인위적으로 행동하는 분이 아닙니다. 간단히 말해,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고통에 마음이 움직였고, 그녀를 위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과부에게 다가가 “울지 마라” (루카 7,13) 하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이렇게 얘기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네가 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나는 기쁨과 평화를 주기 위해 지상에 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권능의 징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기적보다 당신의 연민이 먼저였습니다. 이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성심이 따뜻하다는 명백한 징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들처럼, 순결한 마음을 가진다는 것, 하느님 같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을 ‘인간적인 애욕과 섞이지 않은 것, 오염되지 않은 것’ 정도로만 여긴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말 것입니다. 건조하고 영혼 없는 ‘형식적 사랑’만을 베풀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럴 경우 우리의 사랑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진정한 사랑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애정과 인간적 온기가 담긴 사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사람의 마음을 하느님께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죄와 벌의 상황으로 오도(誤導)하는 그릇된 이론들과 옹졸한 변명들을 결코 지지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예수 성심 대축일’에 우리는 이웃의 고통에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선한 마음을 달라고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만, 이 세상의 모든 아픔과 고뇌를 치료하는 진정한 약이 바로 사랑이요 애덕(愛德)이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위안들은 잠시의 효과도 갖기 어렵고 고통과 절망만을 뒤에 남길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다면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해와 헌신, 애정과 자발적 겸손이 깃들어 있는 사랑을 해야 한다고 저는 주장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율법을 두 가지 계명, 실제로는 하나의 계명으로 요약하신 이유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이웃을 사랑하는 것’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 말고 여러분과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따금 이 가장 기본적인 의무를 잊고 실천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여러 가지 예를 떠올릴 겁니다. 시급히 시정돼야 할 불의(不義)와 고쳐지지 않는 온갖 학대(虐待), 항구적인 해결책을 찾으려는 시도 없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차별 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저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제가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여러분께 상기시켜 드리는 것이 제 의무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설명하신 ‘심판 장면’을 묵상해봅시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마태 25,41-43)

고통과 불의에 대항하지 않고, 그 고통과 불의를 감소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개인이나 사회는 그리스도 성심의 사랑과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문제들의 다양한 해결책을 찾고, 이를 실제로 적용하는 데 있어 완벽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에 봉사하겠다는 같은 열망 안에서 하나로 일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사람들의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말씀도 예수님의 삶도 아닐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교라면 하느님과 인간을 기만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