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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사도단 → 사도들의 삶 항이 있음.

예수님의 삶에서 일어난 다른 여러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그분의 숨겨진 시간들을 묵상할 때도 우리는 언제나 감동하게 됩니다. 이 30년의 시간은 우리의 이기심과 나태함을 털어내라는 부르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한계와,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마음과, 우리의 욕망을 알고 계십니다.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스스로를 내어주는 것이 인간에겐 참으로 어려운 일이란 사실을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또한 사랑을 찾을 수 없을 때의 심정이 어떤지, 입으로는 주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반쯤 무관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 그 기분이 어떤지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복음사가들이 묘사한 인상적인 장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세속적인 욕망에 가득 차고 오직 인간적인 계획에만 몰두하는 사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도들을 가까이에 두시고 당신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을 그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이 우리를 부르시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물으 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묻습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마태 20,22) 여기서 ‘잔’이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여러분 자신을 바칠 수 있느냐’는 의미입니다. 그때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습니다.(Possumus!). 우리는 준비돼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그럴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모든 일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의 온 마음을 주님께 드렸던가요? 아니면 하느님이 아닌 우리들 자신에 얽매이고, 우리의 이익과 편안함, 그리고 자기애에만 집착하고 있나요? 우리 생활 속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지하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요? 우리의 길을 그리스도인답게 바꾸는 것을 꺼리게 만드는 무엇이 있는 겁니까? 다행히 이 모든 것을 올곧게 바로잡을 기회가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이 질문들을 우리에게 개별적으로 주셨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질문을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인 것입니다. 저는 감히 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큰 소리로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각자 마음속으로 조용히 우리 주님께 고백하십시오. “주님, 제가 얼마나 쓸모없는 인간인지요, 얼마나 겁쟁이인지요! 얼마나 많은 실수를 거듭해왔는지요.” 그러고 나서야 조금 더 나아가 주님께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뭐 괜찮습니다. 주님, 당신의 손길로 저를 지켜주고 계시니까요. 만약 저를 그냥 내버려두신다면 저는 정말로 최악의 수치스러운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저를 내버려두지 마세요. 어린아이처럼 저를 보살펴 주십시오. 저는 강하고 용감해지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저를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저는 보잘것없는 피조물입니다. 주님, 제 손을 잡아 이끌어 주십시오. 당신의 성모님께서 항상 제 곁에서 지켜주시도록 해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시면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possumus!)! 당신을 우리의 본보기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결코 주제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거룩한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우리가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인간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그 거룩한 길을 인간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길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그렇게 낮추신 이유입니다. “그분이 당신 자신을 그리도 낮추셔서 종의 모습을 취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 주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존재셨지만, 자신의 위엄과 권능을 스스로 낮추셨습니다. 그러나 선함과 자비는 그대로이셨습니다.”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그 거룩한 길을 우리가 쉽게 갈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초대를 거부하지 맙시다. 그분께 “아니요.”라고 말하지 맙시다. 그분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하지 맙시다. 핑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지 못할 거라고 더 이상 생각하지 맙시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범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온 마음을 다해 여러 형제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귀중한 본보기를 무시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예수님을 따르고 성령 안에서 여러분의 영혼을 새롭게 하십시오.”

우리는 오늘 미사에서 방금 요한 성인의 복음 말씀을 읽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치유의 기적을 베푸신 장면입니다.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에 우리 모두 다시 한번 감동받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불행을 무심하게 바라보지 못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려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특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엄존할 때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결코 무관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존경심을 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움츠러들 때, 다른 사람들의 양심을 무분별하고 무자비하게 침해할 수 있는 위험이 움튼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요한 9,1) 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자비를 이렇게 간단하게 묘사하는 성경 말씀에 저는 자주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딘가로 가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인간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분의 제자들이 보인 반응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요한 9,2)

충동적인 판단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조차 제자들과 똑같이 행동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첫 번째 충동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증거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 생각을 혼자만 하지도 않습니다. 자신들의 성급한 판단을 여기저기 퍼뜨립니다.

제자들의 행동을 그나마 호의적으로 보자면, ‘근시안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시종일관 그런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는 바리사이 같은 자들이 있는 법이니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리사이들을 얼마나 비난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하고 말한다.” (마태 11,18-19)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명성을 비방하는 조직적인 움직임에 고통받으셨습니다. 그분의 흠잡을 데 없는 행동을 중상하고 욕하며 상처 입히는 비난들이 쏟아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성적인 결함을 가졌고 개인적으로도 실수를 저지르지만, 자신의 그런 단점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스승으로 따르려 합니다. 그들이 지닌 인간적 나약함이란 워낙 흔하고 피할 수 없는 것들이지요.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마저도 예수님과 똑같이 비난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한계를 알고 있다고 해서 누군가의 명성을 해코지하는 죄와 불의가 용납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비록 그런 말을 지어내는 사람들은 그저 “이상한데”라고 큰 소리로 말하며 자신들의 행적을 지우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마태 10,25)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또한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마태 5,22)

이렇게 부당하게 남을 헐뜯는 태도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어떤 사람들은 마치 ‘시선을 왜곡하는 안경’을 쓰고 있는 듯합니다. 원론적으로 볼 때, 이런 사람들은 도덕적인 삶의 가능성을 거부하거나, 최소한 옳은 일을 하려는 끊임없는 노력들을 부정합니다.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은 미리 왜곡해버린 모습들로 얼룩져버립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가장 고귀하고 이타적인 행동들조차 단지 착하게 보이려고 꾸며낸 위선적인 작태에 불과한 것입니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이런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들은 선한 일을 확실히 찾아냈을 때 그 일을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그 선한 일 안에 숨겨진 결점을 반드시 찾아낼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서 말입니다.”

눈(眼)의 노약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멀었던 그 남자의 대답이 제 마음속에 자주 떠오릅니다. 바리사이들이 그에게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여러 차례 물었지요.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요한 9,27)

바리사이들의 죄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느님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죄는 스스로를 자기 자신들 안에 가둬버린 데 있습니다. 자신을 걸어 잠금으로써 빛이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바로 바리사이들의 죄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빛이어야 한다고 믿으며, 하느님께서 자기들의 눈을 뜨게 해주시는 것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들은 부당하고 오만한 태도로 자기 이웃을 대할 것입니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도둑질하고 속이고 간음이나 하는 그들과 같지 않게 해주시고, 여기 있는 세리와도 같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요한 9,39-41) 바리사이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한때 눈이 멀었던 그 남자는 예수님의 기적으로 치유됐다고 진심으로 설명하지만, 바리사이들은 그를 모욕합니다.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요한 9, 34)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 중에도 정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스스로 올바르게 행동하는 방법을 알며, 진실하고 친절하며 고상합니다. 만약 그들과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께서 닫힌 눈을 치료해주시는 것을 막지 않는다면, 그분의 손에서 치료약으로 변한 진흙을 우리에게 발라주시도록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참된 현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믿음의 빛으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거룩한 현실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지향점이 곧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소입니다. 우리는 사랑(愛德)으로 충만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1코린 13,4-7)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우리 이웃에 대한 친절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자선(慈善)을 선호하는 경향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에 부어주신 것이고, 우리의 마음과 의지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변화합니다. 사랑은, 우정을 나누고 옳은 일을 한 기쁨을 누리는 초자연적인 기반을 제공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불구자의 치료 장면을 묵상해봅시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는데 문 옆에 앉아 있는 불구자와 마주칩니다. 그 남자는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이 눈먼 남자의 치유와 흡사합니다. 하지만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불구자의 불행이 그의 죄 때문이거나 그 부모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그에게 말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사도 3,6) 이전에 제자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을 모욕했지만, 지금은 자비로 그를 대합니다. 이전에는 사람을 경멸하며 판단했지만, 지금은 주님의 이름으로 치유의 기적을 그에게 선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우리 곁을 지나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도와 제자들의 모습으로 이 세상의 거리와 광장들을 계속 지나가십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제 말씀을 듣고 계신 여러분의 영혼으로 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 그리스도인들의 어머니 

1935년 이후 저는 여러 차례 성모성지를 방문하는 동안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어머니께 가진 놀라운 애정을 떠올리며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애정을 성모님께 대한 사랑의 응답, 그러니까 성모님께 드리는 자녀로서의 사랑이자 감사라고 여겨왔습니다. 즉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드리는 애정 표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 사랑의 가장 위대한 징표와 아주 깊이 연관돼 있으시니까요. 하느님 사랑의 가장 위대한 징표란 바로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스스로 우리 인간의 죄와 나약함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당신이 태어나신 거룩한 목적에 충실하심으로써 성모 마리아께서는 인간에게 봉사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투신하셨습니다. 인간은 당신 아들 예수님의 형제가 되도록 부르심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어머니는 또한 참으로 인간의 어머니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성모님이 모든 인간의 어머니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미래 세대들도 그 사실을 알기를 바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요한 성인에게 영감을 주셔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어,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요한 19, 25-27).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자신의 삶 속으로 모신온 것이지요. 영성가들은 복음에 나오는 이 말씀을,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성모 마리아를 그들의 삶 안에 모시도록 초대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확실히 우리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확신에 차서 당신께 다가오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당신이 우리 어머니이심을 보여주소서”라고 간청하며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알고 당신께 호소하길 바라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의 간청을 미리 아시는 어머니이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바를 알고 계시기에 우리를 돕기 위해서 아주 빨리 오시는 분입니다. 성모님의 손길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온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성모님이 우리 어머니라고 느낄 수 있는 여러 이유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모님에 관한 복음 말씀은 그분이 당신 아드님을 한 걸음씩 착실하게 따라가셨던 예수님의 어머니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업에서 한 역할을 맡으시면서 그분과 함께 기뻐하고 아파하시는 어머니인 것입니다. 복음은, 성모님에 대해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이들을 사랑하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어머니의 돌봄으로 살펴주시는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카나의 결혼잔치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성모님께서는 시끌벅적한 시골 결혼식 중 하나에 초대받은 하객이었습니다. 여러 다른 마을에서 온 군중으로 붐볐습니다. 하지만 오직 성모님만이 포도주가 동이 난 것을 알아차리셨죠.

그리스도의 삶에서 만나는 이런 장면들은 우리에게도 익숙해 보이지 않나요? 하느님의 위대하심은 이처럼 일상적인 일들에서 드러납니다. 여인이, 특히 가정주부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아차리고, 삶을 즐겁게 만드는 작은 일들을 살피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리고 성모 마리아께서는 이것을 행동에 옮기셨습니다.

카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를 전한 사람이 요한이란 점도 눈여겨봅시다. 요한은 우리를 걱정하시는 어머니 성모님의 이야기를 기록한 유일한 복음사가입니다. 요한 성인은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할 때 성모님이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길 바랐습니다. 오직 요한 성인만 이 사실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님을 누구에게 부탁할지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은 성모님을 자신의 어머니로 이해하고 사랑할 줄 알았던 제자였던 것입니다.

‘주님 승천’과 ‘성령 강림’ 사이의 날들로 돌아가 봅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온 승리의 결과로 제자들은 믿음이 충만해진 상태입니다. 그들은 간절하게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서로가 곁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마치 한 가족처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사도 1,14)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 가장 길게 얘기해주는 복음사가는 루카 성인입니다. 루카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는 데 성모 마리아께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의 시작에도 성모님이 깊이 관여하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려 했고, 그래서 그렇게 긴 설명을 한 듯합니다.

교회가 시작된 첫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갈구하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모님을 만났고 어머니와 같은 그분의 보살핌을 경험했습니다. 성모님은 진실로 그리스도인들의 어머니로 불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으로 교회의 신자들이 생겨나는 데 협력하셨습니다. 그렇게 생겨난 교회의 신자들은 성모님이 육신의 실제적인 어머니이신 분, 즉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께 드리는 이러한 공경의 가장 오래된 증언들 중 하나가 다음과 같은 확신에 찬 기도라는 사실은 결코 놀랍지 않습니다. “천주의 성모여, 당신의 보호에 우리를 맡기오니, 어려울 때에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마시고, 항상 모든 위험에서 우리를 구하소서.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