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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악마 → 유혹 항이 있음.

그리스도께서 유혹 받으시다 

사순시기는 당신의 공생활을 준비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보내신 40일을 기리는 기간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승리로 절정을 맞이할 주님의 공생활을 준비하신 광야의 시기를 기념하는 것이지요. 40일의 사순시기는 기도와 참회의 기간입니다. 끝으로 전례에 따른 오늘의 복음 말씀을 떠올려 봅시다. 바로 그리스도의 유혹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인간이 감히 이해하기를 바랄 수 없는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유혹을 받으시고, 악(惡)이 멋대로 설치게 놔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가르침을 이해하도록 도와달라고 주님께 간청하면서 이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혹 당하시다… 전통적으로 광야에서 겪은 그리스도의 시련을 이런 식으로 바라봅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의 모범이 되신 주님께서는 유혹에 시달리는 일 또한 스스로 원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죄가 없다는 것 말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완벽한 인간이므로 우리와 똑같이 유혹 받으시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마도 약초와 풀뿌리 조금, 그리고 약간의 물 말고는 다른 어떤 음식물도 없이 40일간 금식하셨기에 예수님은 허기를 느끼셨을 겁니다. 보통의 인간들이 그렇듯 그분도 정말로 배가 고팠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마가 돌멩이를 빵으로 바꿔보라고 제안할 때 예수님은 당신의 육신이 갈구하는 음식을 거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더욱 큰 유혹을 뿌리치십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당신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의 거룩한 힘을 쓰라는 유혹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복음서 전체를 보면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어떻게 일으키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카나의 결혼식에서 축하객들을 위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고, 배고픈 군중을 위해 빵과 물고기를 많아지게 하십니다. 그렇지만 당신 자신은 수년간 스스로 일을 하셔서 생계를 꾸리십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땅을 돌아다니며 공생활을 하시는 중에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생활하십니다.

복음사가 요한 성인은 긴 여행을 하신 뒤 예수님께서 ‘시카르’의 우물에 도착하셨을 때 제자들을 고을로 보내 먹을 것을 사오게 하셨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이 오는 것을 보자 예수님은 그녀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하십니다. 부탁하는 방법 말고는 물을 얻을 길이 없었던 겁니다. 오래 길을 걷느라 지친 당신의 육신이 피곤을 느끼신 것입니다. 다른 경우였다면 그분은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잠을 청해야 하셨겠죠. 당신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셔서 인간의 육체적 상태를 온전히 받아들이시는 우리 주님은 얼마나 너그러우십니까! 그분은 자신의 고충이나 노고를 피하기 위해 당신의 거룩한 힘을 절대 쓰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우리가 강인해지도록, 우리가 우리의 일을 사랑하도록, 그리고 우리들 자신이 노력한 결과를 음미할 수 있는 인간적이면서도 거룩한 고귀함을 깨닫도록 말입니다.

두 번째 유혹에서 악마는 예수님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권능을 사용하라는 악마의 제안을 다시 한번 거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겉으로 드러내는 허영(虛榮)을 좇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 자신의 장점을 내보이는 배경으로 하느님을 이용해선 안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셨지만, 하느님의 계획을 미리 예상하지도, 기적의 시기를 앞당기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오직 인간의 고된 길을, 십자가로 나아가는 사랑의 여정을 묵묵히 걸어가셨을 뿐입니다.

세 번째 유혹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왕국과 권력과 명예를 제안받습니다. 악마는 이제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야 할 신심(信心)마저도 인간의 야욕으로 돌리기 위해 열을 올립니다. 이렇게 악마는 편안한 삶을 우리에게 약속합니다. 우리가 악마 앞에, 우상 앞에 무릎 꿇기만 하면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참으로 경배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하느님뿐이라고 역설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만을 섬기겠다는 당신의 다짐을 명확히 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마태 4,10)

예수님께서는 어둠의 왕자인 악마에게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곧바로 밝아집니다.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마태 4,11). 예수님께서는 시험에서 이기셨습니다. 그것은 진짜 시험이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 성인은 광야의 유혹이 진짜 시험이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으로서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권능을 쓰시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분이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힘을 쓰셨다면, 광야에서 유혹 받으신 사건이 무슨 본보기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서로 나눌 수 있는 도움만을 쓰셨던 것입니다.”

악마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자기 멋대로 왜곡해 인용합니다.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시편 91,11)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 아버지를 시험하려는 유혹을 거부하십니다. 그리고 악마가 왜곡해 인용한 성경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러한 충실함의 보답으로 때가 되자 아버지 하느님의 사역자들(천사들)이 나타나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악마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사용한 유혹의 방법은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악마는 성경 말씀의 의미를 불경하게 왜곡해서 그 문구들을 가지고 언쟁을 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속지 않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기록된 것이지 인간을 혼란에 빠뜨려 타락하게 하려고 쓰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으로 한 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악마처럼 성경 말씀을 조작하는 그런 짓거리에 아무도 속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짓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악마가 저지르는 전형적인 수법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지혜의 말씀을 거짓으로 속이고 빛을 어둠으로 바꾸려는 수작인 것이죠.

예수님의 삶에서 이렇게 천사가 등장하는 순간을 한번 살펴봅시다. 그러면 모든 인간의 삶에 있어서 천사가 하는 역할, 즉 그들 천사의 사명에 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전승은 수호자인 천사들을 ‘강력한 친구들’이라고 묘사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길을 가는 데 동행해주라고 하느님께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배정해주신 존재들인 거죠.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들과 친구가 되라고 이끄시며,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도와주게 하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삶의 행적들을 묵상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죄와 비참함, 그리고 정화의 절실함을 깨닫는 이 사순시기에도 기쁨의 여지가 존재함을 일깨워줍니다. 사순시기는 용기의 시간인 동시에 기쁨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용기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를 저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 곁에 계시며, 당신의 천사를 우리에게 보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들은 우리 인생 여정의 동반자가 되고, 길을 가는 내내 세심한 조언자가 되며, 우리가 맡은 모든 일의 협력자가 될 것입니다. 시편은 이렇게 천사들에 관해 노래합니다.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시편 91,12)

우리는 천사들에게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지금 천사들에게 의지하십시오. 당신의 수호천사들에게 얘기하십시오. 사순시기에 주시는 이 영성의 물결이 여러분의 영혼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영혼 깊이 깃들게 해달라고 간청하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은 가엾은 존재들이니까요. 또한 여러분의 선한 의지를 주님께 가져가 보여드리라고 천사들에게 부탁합시다. 마치 퇴비 더비에서 자라난 한 떨기 백합처럼 우리의 비천함을 뚫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라난 선한 의지를 주님께 가져다드리라고 말입니다. 거룩한 천사시여, 우리의 수호자시여, “싸움 중에 있는 저희를 보호하소서. 그래서 마지막 심판의 날에 저희가 사라지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