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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명예 훼손 → 진실과 정의 항이 있음.

우리는 오늘 미사에서 방금 요한 성인의 복음 말씀을 읽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치유의 기적을 베푸신 장면입니다.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에 우리 모두 다시 한번 감동받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불행을 무심하게 바라보지 못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려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특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엄존할 때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결코 무관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존경심을 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움츠러들 때, 다른 사람들의 양심을 무분별하고 무자비하게 침해할 수 있는 위험이 움튼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요한 9,1) 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자비를 이렇게 간단하게 묘사하는 성경 말씀에 저는 자주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딘가로 가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인간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분의 제자들이 보인 반응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요한 9,2)

충동적인 판단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조차 제자들과 똑같이 행동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첫 번째 충동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증거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 생각을 혼자만 하지도 않습니다. 자신들의 성급한 판단을 여기저기 퍼뜨립니다.

제자들의 행동을 그나마 호의적으로 보자면, ‘근시안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시종일관 그런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는 바리사이 같은 자들이 있는 법이니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리사이들을 얼마나 비난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하고 말한다.” (마태 11,18-19)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명성을 비방하는 조직적인 움직임에 고통받으셨습니다. 그분의 흠잡을 데 없는 행동을 중상하고 욕하며 상처 입히는 비난들이 쏟아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성적인 결함을 가졌고 개인적으로도 실수를 저지르지만, 자신의 그런 단점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스승으로 따르려 합니다. 그들이 지닌 인간적 나약함이란 워낙 흔하고 피할 수 없는 것들이지요.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마저도 예수님과 똑같이 비난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한계를 알고 있다고 해서 누군가의 명성을 해코지하는 죄와 불의가 용납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비록 그런 말을 지어내는 사람들은 그저 “이상한데”라고 큰 소리로 말하며 자신들의 행적을 지우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마태 10,25)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또한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마태 5,22)

이렇게 부당하게 남을 헐뜯는 태도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어떤 사람들은 마치 ‘시선을 왜곡하는 안경’을 쓰고 있는 듯합니다. 원론적으로 볼 때, 이런 사람들은 도덕적인 삶의 가능성을 거부하거나, 최소한 옳은 일을 하려는 끊임없는 노력들을 부정합니다.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은 미리 왜곡해버린 모습들로 얼룩져버립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가장 고귀하고 이타적인 행동들조차 단지 착하게 보이려고 꾸며낸 위선적인 작태에 불과한 것입니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이런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들은 선한 일을 확실히 찾아냈을 때 그 일을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그 선한 일 안에 숨겨진 결점을 반드시 찾아낼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서 말입니다.”

이렇게 왜곡된 성향이 제2의 천성처럼 굳어버리면 도움을 주기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을 좋게 생각하는 것이 더욱 인간적이고 진실한 태도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도와주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다음과 같은 경험칙을 들어 조언합니다. “여러분의 형제들에게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미덕들을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갖추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더 이상 그들의 단점들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자신이 그런 단점들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말한 이 행동방식을 순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더 영리하고 “실질적인” 이들입니다.

자신의 편견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은 누군가를 비난할 땐 재빠르지만, 남의 말을 경청하는 데는 매우 느립니다. 그들은 남을 비난한 뒤에도 “편견 없거나 정정당당하게” 보이려는 듯이 자기들이 비난한 사람에게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가장 기초적인 정의나 도덕성에 따르면, 남을 고발한 사람이 먼저 증거를 제시해야 하겠지만, 그들은 이렇게 당연한 원칙을 무시합니다. 왜냐하면 고발을 하고 나서 무슨 특혜나 주는 것처럼 무고한 사람에게 스스로의 결백을 입증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제 생각이 교회법이나 윤리신학에서 빌려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하겠습니다. 이것은 아무런 잘못 없이 비난받았던 상처를 가진 많은 사람들의 경험에 근거합니다. 적지 않은 세월 동안 그들은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되풀이해서 비난의 표적이 되어왔습니다. 험담과 비방, 중상에 목매는 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리고 상대방의 비난을 되받아치지 않는 천성 덕분에 조금의 비통함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오로 성인처럼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1코린 4,3) 더 흔한 표현을 빌리자면, ‘그러거나 말거나 별 상관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게 맞는 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다른 사람들의 진심을 부당하게 공격하는 자들 때문에 슬퍼진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모욕을 일삼는 자는 스스로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방자하고 난폭한 비난에 직면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떱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상황이 정말로 있을 법한 일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악몽이 아닐까 의심합니다.

며칠 전 미사에서 우리는 수산나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순결한 여인 수산나가 음행을 저질렀다고 두 음탕한 원로들에게 거짓으로 고소당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꼼짝 못할 곤경에 빠졌소. 그렇게 하면 그것은 나에게 죽음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여도 당신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오." (다니 13,22) 시기와 음모가 불러온 그따위 속임수들 때문에 수많은 고결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자주 수산나처럼 궁지로 내몰렸습니까? 그들에게는 한 가지 선택만 주어집니다. 하느님께 죄를 짓거나 아니면 그들의 명성을 더럽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유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정직하기도 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결정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죄를 짓느니, 차라리 그렇게 하지 않고 당신들의 손아귀에 걸려드는 편이 더 낫소.” (다니 1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