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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교리 → 과학 항이 있음.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성품성사를 통해 신자들 가운데 몇몇이 그들 영혼에 인호(印號)를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성사는 심오하고도 형언할 수 없는 성령의 감도(感導)하심으로 이뤄집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인호는 그들을 사제이신 그리스도께 인도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합니다. 주님의 신비체인 교회의 머리이신 분,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직무 사제직’은 일반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직무 사제직’을 받은 사목자들은 하느님께 거룩한 희생 제사를 봉헌하며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을 축성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해주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에 관한 모든 것을” (히브 5,1: 불카타 성경) 가르치는 사목활동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닙니다.

사제는 오로지 하느님의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그는 사제의 영역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눈에 띄고자 하는 그 어떤 욕망도 거부해야 합니다. 사제는 심리학자도, 사회학자도, 인류학자도 아닙니다. 그는 또 한 명의 그리스도이며, 형제들의 영혼을 돌봐야 하는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만약 사제가 어떤 인간적 학문을 기반으로 하여 교의신학이나 윤리신학에 관해 가르칠 자격이 있는 사람인 척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슬픈 일일 겁니다. 만약 사제가 자신에게 주어진 사제직의 업무에 진정으로 헌신한다면, 인간적 학문에 관해서는 자신이 아마추어나 관찰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혜로운 척하는 피상적인 모습이 일부 순진한 독자와 청중들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는 곧 인간의 학문에 있어서도, 신학(神學)에 있어서도 무지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날 일부 성직자들이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 하는 듯이 보입니다. 이는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것은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을 하려는 자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야 하는 교회의 영적 목표를 세속적인 목표로 변질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혹에 사제들이 저항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거룩한 직무를 완수하지 못하게 되며,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을 잃게 될 것이고, 교회에 큰 혼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과 다른 사람들의 정치적 자유를 극도로 방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시민사회에 혼란의 씨를 뿌리고 그들 스스로도 위험해질 것입니다. 성품성사는 신앙 안에서 형제들을 섬기는 초자연적인 성사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를 새로운 독재를 위한 세속적 도구로 변질시키려는 듯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성심 가득히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넘치시는 분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의 언어로는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인간과 사물의 가치’에 대한 유창한 설명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행복, 그리고 인간의 삶은 참으로 소중해서, 인간을 구원하고정결하게 하며, 다시 살게 하기 위해 성자께서는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어느 관상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토록 상처 입은 성심을 누가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사랑을 사랑으로 갚지 않겠습니까? 이토록 순결한 마음을 어떻게 끌어안지 않겠습니까? 육신으로 만들어진 우리는 사랑을 사랑으로 되갚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악한 인간들에 의해 손발에 못 박히신 우리의 상처 입은 그분을 끌어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 곁에 있을 것이고 그분의 성심에 기댈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그분의 사랑이 한데 이어질 만큼 우리가 가치 있는 사람이기를 빕니다. 또한 우리도 그분처럼 우리 마음이 창에 찔릴 값어치가 있는 사람들이기를 기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은 여전히 완고하고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은 이 기도는 예수님과 사랑에 빠진 영혼들이 처음부터 그분께 봉헌했던 생각이자, 애정이며, 대화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 말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래서 인간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성심과 하느님의 사랑을 실제로 알고자 한다면, 신앙과 겸손이 모두 필요합니다. 신앙과 겸손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글을 쓰도록 만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쉴 수 있을 때까지 결코 쉬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겸손하지 않다면 하느님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고 애쓸 것입니다. 하느님의 방식이 아닌 자기 뜻대로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1코린 11,24) 라고 하시며 인간이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오만한 인간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인간의 한계 안에 가두려 합니다. 그런 다음 차갑고 맹목적인 이성이 등장합니다. 맹목적인 이성은 신앙이 깃든 마음과는 판이하게 다르고, 세상 일을 즐기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의 올바른 마음씨와도 전혀 다릅니다. 이런 류의 이성은 모든 것을 자신의 편협한 인간적 경험으로 축소시키려는 개인적 시도에 갇혀 비이성적으로 변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초인간적인 진리는 빈곤해집니다. 그런 인간의 마음은 껍질을 자라게 하고 그 껍질 때문에 성령의 활동에 둔감해지고 맙니다. 만약 하느님 자비의 권능이 우리가 가진 비천함의 장벽을 허물어 주시지 않는다면, 한계로 가득한 우리의 지성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에제 36,26) 오직 하느님의 도움이 있어야만 우리의 영혼이 다시 눈뜰 수 있고, 거룩한 성경의 약속을 들어 기쁨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평화를 위한 계획이지 재앙을 위한 계획이 아니다.” (예레 29,11)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예레미야를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의 전례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예수님 안에서 확실히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비난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비열함과 옹졸함을 꾸짖으러 오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용서하시며, 평화와 기쁨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을 대하시는 경이로운 방법을 알기만 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변할 것입니다. 우리 앞에 완벽하게 새로운 광경이 펼쳐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안도감과 심오함, 그리고 빛으로 가득한 전경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