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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관대함 → 헌신에 관대함 항이 있음.

믿음, 희망, 사랑은 요셉 성인의 삶을 지탱해주며,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지켜주는 버팀목입니다. 요셉 성인의 헌신은 충직한 사랑과 사랑 넘치는 믿음, 그리고 믿어 의심치 않는 희망이 하나로 맺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 요셉 축일은 하느님께서 주신 그리스도교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약속을 새롭게 하는 좋은 기회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믿음, 희망, 사랑으로 살고자 할 때, ‘여러분의 약속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무시하고 내버려뒀던 것을 다시 시작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새롭게 한다’는 것의 의미는 ‘하느님 손 안에 머무른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의 숱한 인간적인 잘못과 실수,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우리의 약속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에 대한 우리의 충실함을 확인하여 새롭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의 사랑을 행동으로 드러냄을 뜻합니다.

사랑에는 어느 정도 기준이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사랑이 자기만족을 위한 충동이거나 자기 인격의 이기적인 충족을 위한 수단인 듯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런 건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기쁨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의 뿌리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희생과 고통 없이는 진정한 사랑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다가올 영원하고 충만한 삶에 도달할 때까지 사랑에는 희생과 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고통은 달콤하고 사랑스러워집니다. 고통은 내적 기쁨의 원천이지만, 이것은 진짜 아픔입니다. 왜냐하면 저마다의 이기심을 이겨내고, 사랑을 우리들 각자의 원칙으로, 또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원칙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일상 활동을 잘 살펴보고 우리가 선포하는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임하도록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주간은 일종의 ‘종교적 막간(幕間)’이 될 수 없습니다. 삶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온 시간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삶이란 인간사(人間事)에 철저히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성주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심오하게 이해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언행(言行)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랑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특별한 조건을 내거십니다. 우리는 루카 성인이 우리를 위해 기록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6) 이것은 매우 어려운 말씀입니다. 사실, 영어의 ‘미워하다(hate)’라는 단어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매우 강하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 문구의 논조를 약화시키기 위해 ‘미워하다’를 “덜 사랑한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처럼 “덜 사랑한다”는 뜻을 표현하시려고 한 게 아니었습니다. ‘미워하다’처럼 강력한 말이 지닌 힘은 그 단어가 가진 부정적이고 냉정한 의미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 예수님은,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바로 그분이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어놓으신 그분인 까닭입니다.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에 관한 한, 우리가 결코 미온적이어선 안된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참뜻입니다. 이기적이거나 부분적인 사랑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더 사랑하라, 더 잘 사랑하라.”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우리 자신의 영혼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곧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바입니다. 만약 우리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래서 우리의 유일한 관심이 우리들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뿐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심지어 이 세상 전체를 미소하기 짝이 없는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하려 든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여길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뿐 아니라 행동과 진심으로 우리 자신을 실제로 봉헌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하고 그 어깨 위로 인류의 무게를 느끼도록 해주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가 일하고 생활하는 모든 환경에서 하느님이 뜻하시는 명확하고도 사랑 넘치는 계획을 실현하게끔 이끕니다. 우리가 방금 읽은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계속 얘기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7)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가르치고 요구하는 대로 우리의 모든 삶을 바로 세우도록 굳게 다짐합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투쟁과 괴로움과 아픔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신앙을 지켜나간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슬픔의 한가운데서도, 심지어 온갖 모략이 난무하는 한복판일지라도,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우리의 초자연적인 기쁨을 그들이 함께 나누도록 도와주는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있었던 제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어느 날, 매우 고운 심성을 지녔지만 신앙이 없었던 한 친구와 함께 있었는데, 그가 지구본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거 봐! 북쪽에서 남쪽까지, 동쪽에서 서쪽까지…” 그래서 제가 물었죠. “내게 뭘 보라는 거야?”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실패를 보라는 거야. 지난 2천 년 동안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인류의 삶에 전하기 위해 노력했어. 하지만 그 결과를 보라고.” 친구의 얘길 듣고 저는 정말 슬펐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님을 모른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 중에도 많은 이들이 마치 그분을 모르는 것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제 괴로운 마음은 금방 사랑과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구원사업에 협력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삶과 가르침은 이 세상에서 항상 유효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은 참으로 충분합니다. 아니, 충분함 그 이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노예가 아닌 자녀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구원사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매우 감동적인 언어로 우리에게 얘기합니다. 주님 수난의 남은 부분을 우리의 육신과 우리의 삶 안에 채워 넣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콜로 1,24)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주신 사랑과 신뢰에 응답하기 위해서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드리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하는 일이야말로 진정으로 소중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도신경을 외웁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를 믿으며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을 믿나이다.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성령으로 인해 생명력을 얻음을 확신합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죄의 용서와 부활의 희망에 기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도문이 과연 우리 마음의 깊은 곳까지 깃들어 있습니까? 아니면 단지 우리 입술에만 걸려 있습니까? ‘성령 강림 대축일’이 주는 승리와 기쁨, 그리고 평화의 거룩한 메시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데에 있어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기반이어야 합니다.

조용한 희생의 신비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당신 어머니를 찬미하신 것이 진실이라면, 성모님의 고통, 그리고 노동이나 믿음의 시험으로 인한 그분의 괴로움을 경감해 주시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똑같이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마을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예수님께 소리쳤습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11,27-28) 이는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소서” (루카 1,38)라고 하며 순명하신 어머니께 대한 찬사였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신 당신 말씀을 진정으로 아낌없이 살아내셨으며, 그에 따른 모든 결과들이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화려하게 사시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루하루를 숨어서 말없이 희생하며 지내셨습니다.

이러한 진실들을 묵상해보면, 우리는 하느님의 논리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네 삶의 초자연적인 가치는 어마어마한 과업을 성취하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과업이 엄청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의 지나친 상상 때문입니다. 오히려 매일매일의 일상적이고 사소한 희생의 기회들을 아낌없이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삶의 초자연적 가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품어 안음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서, 거룩하게 되기 위해 우리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처지들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겉으로는 가치 없어 보이는 것들을 거룩하게 만들어가는 그런 사람이 돼야 합니다. 그렇게 시작해야 하는 것이지요. 성모 마리아께서 바로 그렇게 사셨습니다. 성모님은 은총으로 가득하셨고,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분이며, 모든 천사와 성인들보다 높은 곳에서 찬미 받으시는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평범한 삶을 사셨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우리와 똑같이 창조되신 분입니다. 고통과 슬픔, 그리고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는 우리와 같은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가브리엘 대천사로부터 하느님의 계획을 들으시기 전까지는 당신이 태초부터 구세주의 어머니로 선택됐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셨습니다. 성모님은 당신 자신을 미천한 피조물로 여기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참으로 겸손하게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다” (루카 1,49)라고 인정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순결하심과 겸손하심, 그리고 관대하심은 우리들의 가증스럽고 이기적인 모습과 확연히 대비됩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가 깨닫는 만큼 성모님을 닮겠다는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우리들 또한 하느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만약 우리가 성모님의 충실하심을 본받기 위해 분투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우리 안에서 큰일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미소함은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미소한 것들을 선택하심으로써 당신 사랑의 권능이 더욱 드러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주님 

우리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베들레헴에서 목격했습니다. 바로 그 사랑스러운 아기가 온 우주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함께 이 사실을 묵상합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그분께서 지으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들이 아버지 하느님과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이 흘린 성혈로 하늘과 땅 사이의 평화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계신 임금이십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뒤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흰옷을 입은 두 천사가 말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사도 1,11)

비록 인간의 정치 권력을 가진 임금들은 오래 가지 못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통치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십니다” (탈출 15,18), “그분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이고 그분의 나라는 대대로 이어지리라.” (요한 4,31)

그리스도의 나라는 단순한 비유적 표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사람이 되셨을 때 취하셨던 똑같은 육신으로 살아계십니다. 또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을 때의 그 영광스러운 육신 또한 말씀이 사람이 되신 모습 그대로 계속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진정한 하느님이시고 또한 진정한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살아계시고 다스리십니다. 그리스도는 우주의 주님이십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그 존재를 유지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분은 가장 영광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지 않나요? 왜냐하면 당신의 나라는 비록 이 세상에 있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기” (요한 18,36)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요한 18,37) 메시아에게 눈에 보이는 찰나의 권능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잘못 판단했던 것이지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로마 14,17)

하느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진리와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 있는 곳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이는 곧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활동이자, 인간의 역사가 끝나고 마지막 날에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오실 때 절정에 이를 하느님의 역사(役事)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가르침을 주기 시작하셨을 때 정치적 계획(政綱)을 내세우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태 3,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기쁜 소식을 널리 알리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곧 오실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 그리고 그분의 정의는 곧 거룩한 삶이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필요한 유일한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초대입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마태 22,2-3) 그러므로 주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라는 진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누구든 자유롭게 그리스도 사랑의 요청에 응답한다면 그 누구도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사랑의 요청이란, 다시 태어나는 것 , 영적으로 단순해져서 어린 아이처럼 되는 것 ,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으려는 모든 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뿐 아니라 행동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결연히 노력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분투하는 자만이 영원한 유산을 받을 자격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지상에서 완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구원이나 심판의 최종 판결은 이곳 지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씨 뿌리는 것과 같고 , 겨자씨가 자라나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에 그것은 물고기로 가득 찬 그물과 같을 것입니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처럼 모래 위에 던져져서 의로운 삶을 산 이들과 사악한 삶을 산 이들로 가려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곳 지상에서 사는 한, 하늘나라는 어떤 여인이 밀가루 서 말 속에 넣었다가 온통 부풀어 올라 버린 누룩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일러주신 나라를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나라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상인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얻어야 할 진주인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참으로 밭에 숨겨진 보물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하늘나라는 얻기 어렵습니다. 그 나라를 얻을 수 있다고 아무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인간의 겸손한 울부짖음은 하늘나라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도둑들 중 한 명이 주님께 간청했습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4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