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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정의 → 정의와 형제애 항이 있음.

존경과 사랑 

처음에 우리는 날 때부터 눈먼 남자에 대한 예수님 제자들의 태도에 놀랐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나쁘게 생각하라, 그러면 네가 옳을 것이다”라는 불운속담(不運俗談)에 딱 들어맞습니다. 하지만 그 후 제자들이 스승이신 예수님을 더 잘 알게 되면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으면서 사도들의 생각은 각자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점차 달라졌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필리2,3)

라고 말했는데, 이 말씀에 따르면,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길 수 있는 측면이 있다는 겁니다. 이 같은 영성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겸손이라는 미덕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줍니다. 다른 사람의 명성과 성실과 사생활에 대한 존중의 표시는 겉으로 나타나는 관례가 아니라, 사랑과 정의를 드러내는 첫 번째 표징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질적이거나 금전적인 도움을 주는 데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무엇보다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고유한 존엄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이해하기를 지향합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의 평판과 명예를 헐뜯는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이 전하는 진리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어떤 경우건 그런 사람들에겐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똑같은 미덕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나누는 이 대화로부터 여러분이 실제적인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결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맙시다. 그들의 선한 의지를 의심하지 맙시다. 우리 주위에 돈독한 친교와 정의, 평화의 씨를 뿌림으로써 그 넘치는 선함 속에 악(惡)을 빠뜨려서 없애버리자고 다짐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올바른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받더라도 슬퍼하지 않기로 결심합시다. 우리 주님의 부단한 도움에 힘입어,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선한 일들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잘못 해석되더라도 슬퍼하지 않겠다고 다짐합시다. 우리의 선한 일을 그릇되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동기(動機)를 부당하게 억측하면서 기뻐합니다. 또한 우리가 사악한 계획을 갖고 있으며 거짓된 행동을 하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항상 용서합시다. 그리고 양심상 말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면, 악한 감정을 배제하고 명확하게 얘기합시다. 만약 우리가 개인적으로 공격을 받는다면, 그 공격이 아무리 잔인하고 수치스럽더라도, 거룩한 침묵 안에서 - “예수님께서는 입을 다물고 계셨다.” (마태 26,63) -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깁시다. 오직 선한 일을 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입시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선한 행동이 빛이 되어 “사람들 앞을 비추도록” (마태 5,16) 하실 것입니다.

투쟁: 사랑과 정의의 요구 

하지만, 어쩐지 이것은 오래된 이야기 방식 같지 않습니까? 좀 더 현대적인 언어로 바뀌지 않았을까요? 학술용어 같은 말로 개인의 결점들을 감추는 그런 언어 말입니다. 확실히 가치 있다고 사람들끼리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살 수 있는 ‘돈’, ‘영향력’, 그리고 자기 자신을 항상 높은 자리에 오르게 해주는 ‘약삭빠름’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런 식의 소위 현대적 사고방식은 스스로를 ‘성숙한 어른’이라고 규정하면서 종교마저도 무시합니다.

저는 비관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래 본 적도 없고요.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승리하셨다고 신앙이 제게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당신 승리의 약속으로 우리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계명 또한 투신(投身)입니다. “싸우라”는 뜻이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주신 부르심에 따라서 사랑으로 투신해야 할 의무를 가집니다. 우리는 이 소명을 자유의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끈질기게 싸우도록 우리를 재촉하는 의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우리가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한다면,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과 누룩이 되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들 자신이 하느님의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결심을 지켜나가겠다는 우리의 다짐은 더 나아가 정의의 의무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이 의무는 끊임없는 투쟁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모든 전승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군대(milites Christi)’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나쁜 성향들과 쉬지 않고 맞서 싸우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군대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초자연적인 식견이 너무 짧아서, 사실 신앙이 깊지 않기 때문에 전쟁과도 같은 지상의 삶에 대한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심술궂게 에둘러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군대라고 여긴다면, 세속적인 의도로 신앙을 사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요. 압력을 가하거나, 별도의 고립된 작은 집단을 따로 만든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그러나, 이런 순진해빠진 생각은 완전히 비논리적이며, 보통 겁 많고 안락함을 좋아하는 심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광신주의보다 더 그리스도교 신앙과 거리가 먼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을 취하든 간에 광신주의는 신성(神聖)과 세속(世俗)의 불경한 결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우리의 투쟁을 우리들 각자가 자신과 벌이는 전쟁으로 이해한다면, 광신주의의 위험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투쟁은 하느님을 더욱더 사랑하고, 우리의 이기심을 뿌리 뽑으며, 온 인류에게 봉사하기 위한 노력으로 끊임없이 새로워집니다. 뭐라고 변명하건 간에 이러한 투쟁에 등 돌리는 것은 싸우기도 전에 항복함을 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몰락하고, 신앙을 잃고, 마음 깊이 우울해지며, 가련한 쾌락에 빠져 이리저리 방황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현존하심 안에서, 그리고 신앙을 살아가는 모든 우리 형제들의 현존 안에서 치르는 우리의 ‘영적 전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싸움을 피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비체인 교회 전체를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빵과 수확, 모든 인류가 함께하는 영성체 

우리가 지금 이야기했듯이 예수님은 씨 뿌리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으로 그 일을 계속해나가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상처 입은 손으로 곡식을 눌러서 당신의 성혈로 적셔 깨끗하게 하시고 순결하게 만드십니다. 그렇게 정결해진 씨앗을 밭고랑에, 이 세상에 뿌리십니다. 그분은 씨앗을 하나하나 심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위치에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 결실을 맺는 것을 증언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손길 안에 있다면,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분의 성혈을 한껏 머금어 우리들 자신이 바람에 실려 뿌려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확신해야 합니다. 씨앗이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땅에 묻혀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싹이 돋아나고 곡식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곡식으로부터 빵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으로 그리스도의 성체로 변화하는 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다시 한번 씨 뿌리시는 분인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1코린 10,17)

씨가 뿌려지지 않으면 수확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아낌없이 뿌려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려야 하고, 그분을 갈망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사람들이 오래 견뎌온 굶주림을 되돌아보는 좋은 기회입니다. 진실과 정의, 일치와 평화에 대한 굶주림을 다시 생각하는 기회인 것이지요. ‘평화에 대한 굶주림’과 마주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에페 2,14) 라고 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되뇌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열망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일치를 염원하는 이들은 “완전히 하나가 되게” (요한 17,23) 해달라고 기도하시는 그리스도를 보아야만 합니다. 정의에 대한 굶주림은 인류를 하나로 조화롭게 해주는 원천(源泉)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그 원천이라 함은 곧 우리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이고 서로가 형제이며, 그러한 사실을 우리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화와 진리, 일치와 정의를 우리는 갈망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조화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없애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애의 기적을 일으키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은총으로 그리스도교적 삶의 방식대로 살 수 있도록, 다시 말해 “서로 남의 짐을 져주며” (갈라 6,2)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율법의 완성이자 본질인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들처럼, 순결한 마음을 가진다는 것, 하느님 같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을 ‘인간적인 애욕과 섞이지 않은 것, 오염되지 않은 것’ 정도로만 여긴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말 것입니다. 건조하고 영혼 없는 ‘형식적 사랑’만을 베풀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럴 경우 우리의 사랑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진정한 사랑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애정과 인간적 온기가 담긴 사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사람의 마음을 하느님께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죄와 벌의 상황으로 오도(誤導)하는 그릇된 이론들과 옹졸한 변명들을 결코 지지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예수 성심 대축일’에 우리는 이웃의 고통에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선한 마음을 달라고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만, 이 세상의 모든 아픔과 고뇌를 치료하는 진정한 약이 바로 사랑이요 애덕(愛德)이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위안들은 잠시의 효과도 갖기 어렵고 고통과 절망만을 뒤에 남길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다면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해와 헌신, 애정과 자발적 겸손이 깃들어 있는 사랑을 해야 한다고 저는 주장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율법을 두 가지 계명, 실제로는 하나의 계명으로 요약하신 이유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이웃을 사랑하는 것’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 말고 여러분과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따금 이 가장 기본적인 의무를 잊고 실천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여러 가지 예를 떠올릴 겁니다. 시급히 시정돼야 할 불의(不義)와 고쳐지지 않는 온갖 학대(虐待), 항구적인 해결책을 찾으려는 시도 없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차별 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저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제가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여러분께 상기시켜 드리는 것이 제 의무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설명하신 ‘심판 장면’을 묵상해봅시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마태 25,41-43)

고통과 불의에 대항하지 않고, 그 고통과 불의를 감소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개인이나 사회는 그리스도 성심의 사랑과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문제들의 다양한 해결책을 찾고, 이를 실제로 적용하는 데 있어 완벽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에 봉사하겠다는 같은 열망 안에서 하나로 일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사람들의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말씀도 예수님의 삶도 아닐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교라면 하느님과 인간을 기만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