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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자유 → 개인 자유 항이 있음.

대림은 희망의 시기 

그리스도의 탄생을 우리 자신과 분리해서 대림 시기의 하루하루를 계산한다면, 저의 대림 제1주일의 강론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부르심의 실체(實體)에 관해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파견하셨는지 숙고해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감화시켜 그들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하느님께 다가가도록 격려하고, 교회와의 일치를 실감하며, 하느님의 왕국이 모든 이의 마음속에 펼쳐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파견된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헌신적이고 충실한 자세로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처럼 거룩해지기를 열망하십니다.

여러분은 자신 안에서 자만과 육욕, 나태와 이기심을 발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과 헌신, 자비와 겸손, 희생과 기쁨을 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소를 받지 않은 사람들처럼 자신을 고립시킴으로써 여러분이 추구해야 할 인생의 목표들을 축소시켜서는 안 됩니다.

얼마 전에 저는 독수리 한 마리가 철창에 갇혀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독수리는 지저분한 몰골이었고 깃털의 절반이 빠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발톱 사이에는 고기 조각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만약 제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부한다면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생각했습니다. 저는 족쇄가 채워진 그 외로운 독수리가 애처로워 보였습니다. 하늘로 솟아올라 태양을 마주보기 위해 태어난 새였을 텐데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그 보잘것없는 수준을 한껏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류에 봉사하는 그 변변치 않은 수준을 최고로 격상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우리들 영혼에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지 않는 외진 구석이나 틈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 어두운 구석이 사라지면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에, 입술에, 가슴에 오셔서 여러분의 행동에 당신의 모습을 새겨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삶의 모든 감정과, 일과, 생각과 말이 모두 하느님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루카 21,28). 우리는 방금 이 복음 말씀을 읽었습니다. 대림시기는 희망의 시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부르심의 이 엄청난 전망(지평)이 매일의 현실이 될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 합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현존 위에 세워진 이 삶의 일치가 우리네 일상의 현실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저와 함께 우리 성모님께 간구합시다. 당신의 아드님이 탄생하시기를 기다리며 보내신 그 몇 달이 어떠했을지 상상하려고 노력합시다. 우리의 성모님, 거룩한 마리아께서 여러분을 ‘제2의 그리스도’, 또한 ‘그리스도 자신’ (alter Christus, ipse Christus)으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을 밝게 비추는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현존하시는 그분께 대한 신앙입니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상황을 변화시키는 역할, 인간 역사의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세상의 창조로부터 시작해 마지막날에 완성에 이르게 될 인간의 역사에서 그리스도인은 결코 내쳐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도시에 모여 사는 시민이며, 그의 영혼은 하느님을 갈망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아 왔고, 그 사랑이야말로 땅에 사는 모든 인간이 도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목표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 자신의 개인적 경험이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저는 사제로서, 그리고 영혼의 목자로서 제가 하는 일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돕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여겨왔습니다. 사람들을 도와 각자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요구들을 받아들이고 특별히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스스로 발견하도록 돕는 일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인 양심의 특징이라 할 인간의 거룩한 독립성과 축복받은 개인적 책임을 어떤 식으로든 제한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행동방식과 영성은 밝혀진 진실의 초월성을 존중하고 인간 개인의 자유를 사랑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한 말씀 더 드리자면, 그리스도인의 행동방식과 영성은 또 하나의 깨달음을 근간으로 합니다. 이는 곧 역사가 결코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선택에 따라 열려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존중하신다는 깨달음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성전으로 피신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발전에 어깨를 으쓱하거나, 인간 또는 국가의 성취와 일탈을 무시하면서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하느님의 창조물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진 각 개인의 존엄함을 깨달음으로써 세상이 지니는 고귀함과 아름다움의 가치를 인정하게 합니다. 신앙은 또한, ‘자유’라고 하는 훌륭한 선물을 존중하게 합니다. 자유는 우리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고, 천국의 은총을 통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스스로 세워갈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신앙을 인간의 이데올로기로 격하시킨다면, 여러분은 신앙을 하찮은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본래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여러분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해서 정치적-종교적 기준을 세운다면, 그 또한 신앙을 얕잡아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성소의 존엄함을 생각할 때, 우리는 교만하고 건방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리스도인의 사명에 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되는 우리의 실수는, 우리가 흙으로 만들어졌으며 먼지로 돌아갈 비천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악(惡)은 우리 주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우리들 가슴 깊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곧잘 잊어버립니다. 이러한 악은 우리를 이기적이고 비열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모래와 같이 허술하고 위험한 존재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은총만이 굳건한 대지(大地)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봅시다. 또는 현재 세상이 처한 상황을 살펴봅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신 지 20세기가 지난 오늘날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됩니다. 또한 자신의 성소에 충실한 사람은 더더욱 소수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 년 전에 착하지만 신앙을 갖지 않은 어느 남자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세계지도를 가리키며 제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실패하셨는지 보십시오. 수 세기 동안 인간에게 당신의 가르침을 전하려 했지만,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보시는 대로입니다. 어디에도 그리스도인이 없네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요즘 굉장히 많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실패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삶이 세상을 계속 풍요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당신 아버지께서 맡기신 그리스도의 과업이 지금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분의 권능은 역사를 꿰뚫고 올곧게 전진합니다. 그분의 권능은 진정한 삶을 가져다주십니다. 그리고 “아드님께서도 모든 것이 당신께 굴복할 때에는, 당신께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분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1코린 15,28)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세상 안에서 이 사업을 이뤄가시는 데에 우리가 협력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자유’라는 위험을 감수하십니다. 저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께 깊이 감동받았습니다. 그분은 무방비 상태로,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는 힘없는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가까이 다가오셔서 우리 인간의 수준까지 스스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필리 2,6-7)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유와 불완전함과 비참함을 존중하고 경의를 표해주셨습니다. 그분은 진흙으로 만든 그릇 안에 당신의 거룩한 보물을 담기로 동의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담긴 보물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강하심과 우리의 연약함을 한데 섞는 일을 두려워하시지 않았습니다.

개인의 자유 

자신의 일을 할 때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그들이 하는 일들이 가진 의무를 회피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인간의 모든 활동을 축복한다”는 표현이 그들의 고유한 본질에 대한 모욕이나 무시를 뜻한다면, 저는 그런 표현을 결코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인간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알리는 플래카드나 종교를 드러내는 명찰을 달고 다니는 건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게 반대하는 의견들을 존중합니다만, 그런 식의 표지를 달고 다니는 것이 우리 신앙의 거룩한 이름을 헛되이 사용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가톨릭”이란 이름 또한 때로는 인간의 기준에 따라 점잖지 못한 활동과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습니다.

죄를 제외하면 이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들은 선합니다. 우리 주 하느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긍정적인 방법으로 분투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시민들과 어깨를 맞대고 세속에서 꾸려가는 모든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존엄성에 기반한 모든 가치들을 수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특별히 소중하게 여겨야만 할 한 가지 가치가 있습니다. 바로 ‘개인의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의 개인적 자유를 보호해야 합니다. 물론 그러한 이웃의 자유 또한 지켜야 할 그들 나름의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만 인간적인 동시에 그리스도교적으로 진실되게 자기 자신의 자유를 지킬 수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엄청난 초자연적 능력, 즉 거룩한 은총, 그리고 다른 놀라운 인간적 능력, 바로 ‘개인의 자유’를 거저 주셨습니다. 이렇게 주어진 개인의 자유가 방종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우리는 더욱더 성실해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이 하느님의 율법에 따르도록 진심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자유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 유일한 종은 하느님 사랑에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묶어 맨 이들뿐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사랑의 노예들인 것입니다.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은총에 응답할 수 없습니다.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주님께 우리들 자신을 거리낌 없이 내어드릴 수 없습니다. 가장 초자연적인 이유를 들자면 우리가 그렇게 원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제 말씀을 듣는 분들 중 몇몇은 저와 오래 알고 지냈습니다. 그러니 제가 평생 ‘책임을 수반한 개인의 자유’를 강론해왔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실 수 있을 겁니다. 등불을 들고 정직한 사람을 찾으려 했던 디오게네스처럼 저는 온 세상을 돌며 자유를 찾았고, 지금도 그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더더욱 자유를 사랑하게 됩니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에 저는 자유를 가장 사랑합니다. 자유는 우리가 그 가치를 충분히 가늠할 수 없는 보물입니다.

제가 개인의 자유에 관해 말할 때, 사제로서 제 능력 밖에 있는 정당한 문제들에 관해 참견할 핑계로 사용하려는 게 절대 아닙니다. 세속적이고 시민적 영역에 속하는 현실 문제들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제게 맞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주제들은 우리 주님께서 인간이 자유롭고 차분하게 논의해야 할 문제로 남겨 두셨습니다. 사제의 입은 모든 인간적이고 당파적인 논란을 피해가야 한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제는 오직 하느님과 그분께서 주신 구원 교리로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서만 입을 열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사와 하느님께 더욱 가깝게 다가가는 내적 생활로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서만 말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형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그리스도의 나라를 정치 공학적인 면으로만 바라본다면, 그는 신앙의 초자연적인 목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과는 전혀 무관한 양심의 무거운 짐을 질 위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멍에는 편하고 가벼운 멍에이고, 그분이 주시는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사제로서 제 역할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을 사랑합시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다른 사람들의 정당한 자유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그들과 조화롭게 어울려 살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