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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혼인 → 존엄성 항이 있음.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단순한 사회적 제도가 아니며 인간의 약함을 달래기 위한 치료법은 더더욱 아닙니다. 결혼은 정말로 초자연적인 부르심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교회 안에서 이뤄지는 위대한 성사입니다. (에페 5,31-32) 동시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맺어지는 영원한 계약입니다. 우리가 좋아하건 아니건 간에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혼인성사는 결코 스스로 풀 수 없는 것입니다. 결혼은 그리스도와 함께함으로써 거룩하게 된 영원한 계약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남편과 아내의 영혼을 채워주시고, 부부가 함께 당신을 따르도록 초대하십니다. 그분은 부부의 결혼생활 전체를 지상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기회로 변화시킵니다.

남편과 아내는 그들의 결혼생활을 성화(聖化)하며, 그 안에서 다시 자신들을 거룩하게 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만약 부부가 자신들의 영적 발전에서 가정생활을 배제한다면 그건 심각한 실수입니다. 결혼이라는 결합, 자녀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일, 가족의 필요를 채워주고 가정의 안전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 공동체를 이루는 다른 사람들과의 친교 등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이 처한 일상 상황에서 이뤄지며, 그리스도인 부부들은 이런 일상의 상황들을 거룩하게 만들도록 소명 받았습니다.

모든 가정이 맞닥뜨리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진심으로 마주하며 신앙과 희망의 미덕을 실천한다면, 또한 사랑과 열정을 다해 부부의 의무를 온전히 이루어내기 위해 분투한다면, 부부는 그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한다면, 부부는 모든 일에 있어 애덕을 실천하게 됩니다. 그들은 웃는 법을 배우며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위해서 기꺼이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법을 익힙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경청하고 자녀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가족들이 진정으로 사랑받고, 또 이해받고 있음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 부부는 이기심 때문에 벌어지는 사소한 마찰들에 대해서는 잊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일상에서 애정을 다해 서로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가정의 삶을 성화(聖化)하는 것,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인 부부의 목표입니다. 동시에 진정으로 가족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하루하루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의 많은 미덕들이 필요합니다. 우선 신학적인 미덕이 필요하고, 이어서 신중함, 충직함, 성실함, 겸손, 부지런함, 명랑함 등 다른 미덕들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결혼과 결혼생활에 한해서 말한다면, 남편과 아내 간에 서로의 사랑을 명확하게 얘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복음서가 기록한 요셉 성인 

복음사가 마태오 성인과 루카 성인은 요셉 성인이 다윗과 솔로몬의 가계, 즉 이스라엘의 왕족 집안 출신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분의 선조들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명확히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두 계보(系譜) 중 어떤 것이 유다 율법에 따른 예수님의 양아버지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 또한 어떤 것이 예수님의 육신을 낳아주신 어머니 성모 마리아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울러 요셉 성인의 출신이 인구조사를 위해 다녀왔던 곳인 베들레헴인지, 아니면 그가 살았고 일했던 나자렛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그가 유복한 집안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시 세상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그는 단지 한 사람의 노동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힘들고 초라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 성인이 하신 바로 그 일을, 인간의 육신을 취하신 하느님께서 선택하셔서 우리 인간들과 똑같이 생계를 위해 삼십 년 동안 종사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요셉 성인이 장인(匠人)이었다고 일러줍니다. 몇몇 교부(敎父)들은 그분이 목수였다고 설명합니다. 유스티누스 성인은 예수님의 생애에 관해 얘기하면서 요셉 성인이 쟁기와 멍에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세비야의 이시도르 성인이 요셉 성인의 직업을 대장장이라고 결론 지은 것은 아마도 그 영향을 받은 듯합니다. 어쨌든 간에 요셉 성인은 오랜 세월 고되게 땀 흘려 얻은 손재주로 이웃 시민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주던 기술자였던 것입니다.

복음서는 놀랍도록 착실한 성인의 모습을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그분은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삶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여러 문제에 직면해서 어려운 상황들을 잘 대처하며,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책임감을 갖고 솔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요셉 성인을 나이든 남자로 묘사하는 전통적인 그림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런 그림들이 성모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童貞)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긴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저는 그분이 건강하고 젊은 남자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성모님보다는 조금 나이가 들었겠지만, 자신의 인생과 일에 있어서 전성기를 맞은 젊은 남자였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정결의 미덕을 실천하기 위해 굳이 늙고 기력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겠지요. 순결이란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이니까요. 젊음의 힘과 유쾌함은 결코 고귀한 사랑의 장애물이 아닙니다. 요셉 성인이 성모 마리아와 결혼했을 때, 그러니까 성모님의 거룩한 모성(母性)의 신비를 알고 성모님과 함께 살게 됐던 그때 요셉 성인은 젊은 마음과 육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주고자 하신 고결함을 존중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피조물들과 삶을 나누고자 오셨다는 또 하나의 징표였던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사랑에 대해 조금도 알 수 없으며,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정결의 의미를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얘기했지만, 요셉 성인은 갈릴래아 출신의 장인(匠人)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이었습니다.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처럼 보잘것없는 마을 사람의 삶에 무슨 내세울 것이 있었을까요? ‘일(노동)’ 말고는 아무것도 없지요! 항상 끊임없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매일 매일의 일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가 저물면 그다음 날을 위해 휴식하며 기력을 되찾을 가난하고 작은 집이 있을 뿐이었겠지요.

하지만, 요셉이라는 이름은 히브리말로 “하느님께서 더하실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의 거룩한 삶에 전혀 예상치 못한 영역을 더해주십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에 의미를 주는 중요한 영역, 거룩한 영역을 부여하십니다. 이를테면 요셉의 겸허하고도 거룩한 삶에 동정 마리아와 우리 주님 예수님의 삶을 더해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한없이 너그러우십니다. 요셉 성인은 당신의 아내인 성모 마리아의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새겼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루카 1, 28-29).

요셉 성인은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에게 위대한 일들을 하게 하시고 그를 신뢰하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각각의 모든 사건들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바를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성경이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찬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태 1,19). 히브리말로 ‘의로운 사람’은 ‘착하고 충실한 하느님의 종’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 (참조 창세 7,1. 18,23-32) 혹은 이웃에게 훌륭하게 행동하고 자애로운 사람을 의미합니다. (참조 토빗 7,5. 9,9) 그러므로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고 자기의 온 생애를 형제와 동료들을 위해 바침으로써 스스로의 사랑을 증명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거룩한 은총의 성사들 

진실로 투쟁을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교 2천년 역사에서 절대 변하지 않은 유용한 방법을 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이고, 고행이고, 또한 자주 성사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행도 역시 기도지요. 육신의 감각으로 드리는 기도니까요. 그래서 추려보면, 이 방법은 두 단어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성사입니다.

이제 성사(聖事)에 관해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성사는 하느님 은총의 근간입니다. 성사는 하느님의 사랑 넘치는 친절하심을 확인하는 경이로운 증거입니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내린 교리의 정의를 조용히 묵상해봅시다. “성사란 은총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그 은총을 우리 눈앞에 가져다 놓고 선포하는 일종의 감각적인 징표이다.” 우리 주 하느님은 무한(無限)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다할 줄 모르며, 우리를 향한 그분의 온화함과 다정하심은 한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그리고 무상으로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일곱 개의 효과적인 징표를 세우셨습니다. 그 일곱 가지 징표(칠성사)는 안정감 넘치고 간단하며 쉬운 방법으로 인간이 구원의 공로를 나눌 수 있게 해줍니다.

만약 성사를 포기한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특히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사에 대해 잊은 듯이 보이며, 성사라고 하는 이 그리스도 은총의 흐름을 비웃기까지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른바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이러한 상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니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해야만 합니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우리가 더욱 감사하고 사랑하면서, 이들 성사의 원천에 다가서도록 용기를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조금도 느끼지 않고 갓 태어난 자녀의 세례를 미루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정의와 사랑에 심각하게 맞서게 됩니다. 세례를 미루는 것은 신앙의 은총을 자녀들에게서 빼앗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원죄로 얼룩진 세상에 태어난 한 영혼 안에 깃들어 계신 복된 삼위일체의 엄청난 보물을 앗아가는 까닭입니다. 아울러 그들은 견진성사의 참된 본질도 바꾸려 듭니다. 거룩한 성전(聖傳)은 이견 없이 견진성사를 영적 삶을 굳세게 해주는 성사로 받아들입니다. 견진성사는 더욱 많은 초자연적인 힘을 영혼에 부여합니다. 조용하면서도 풍요로운 성령의 강림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군대(milites Christi)’답게 싸울 수 있게 해줍니다. 그 싸움은 이기심과 온갖 유혹에 맞서는 스스로의 은밀한 전투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느님의 일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린다면, 고해성사의 가치를 인정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고해성사는 인간과의 대화가 아닌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고해성사는 하느님 정의(正義)의 법원(法院)인 동시에, 특히 하느님 자비의 법원입니다. 그 법원에는 사랑 넘치는 재판관이 계셔서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에제 33,11)

우리 주님의 다정하심은 정말로 무한합니다. 그분이 당신의 자녀들을 얼마나 친절하게 대하시는지 보십시오. 그분은 결혼을 거룩한 결합으로 만드셨고, 그리스도와 당신 교회가 일치를 이루는 상징으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 가정의 근간이 되는 위대한 성사로 만드셨습니다. 혼인성사로 이뤄진 그리스도인 가정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평화와 화합의 장소여야 하고, 또한 성덕(聖德)의 학교여야 합니다. 부모는 하느님의 협력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를 사랑해야 할 의무를 가집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썼던 것처럼, 부모를 사랑하라는 네 번째 계명을 십계명 중 가장 사랑 넘치는 계명으로 설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거룩하게 결혼생활을 한다면, 여러분의 집은 평화와 기쁨 가득한 밝고 즐거운 가정이 될 것입니다.